55. 이번 건 좀 웃겼다
후견인 제도. 일반적으로 부모가 법정대리인이 되지만 부모의 친권이 상실되거나 정지되어 친권을 상실한다면 후견인이 필요하게 된다.
은행에 가서 간단한 계좌개설에도 법정 대리인(통상적으로 부모)의 서명이 필요하고 거소지명권이나 학교 입학전학 같은 아이들 생활에 필수적인 행정적 처리를 위해서 후견인 선정은 꼭 필요했다.
특히 지금같이 소속사 계약이나, 영화 출연계약에는 두말할 것 없고.
이러한 상황을 말씀드리자 어머니께선 본인이 더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셨다. 그동안 아이들을 돌보며 정이라도 든 것일까.
어머니는 황 변호사에게 '가여운 것들을 위해 부탁합니다'를 연신 말씀하시며 손을 꼭 잡았다. 후견인 신청서에 서명하고, 황 변호사는 이번에는 문제없이 선정 될 거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난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 사실 내 발로 나온 거긴 한 데.
큰 집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나는 화실에서 지내고 아이들을 투룸에서 지내게 됐다.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서, 그리고 애들을 다시 학교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곧 촬영에 들어가면 내가 애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아이들 학교 시간 맞춰서 밥 먹이고, 준비물 챙기고 하는 것들이 의외로 품이 많이 드는 일이고 현실적으로 내가 다 챙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세화는 청운 엔터테인먼트와 임시계약을 맺었다. 정식 계약은 후견인 선정이 끝난 뒤에야 할 수 있기에 장인호 사장이 많이 배려해줬다.
세화는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주선해 준 연기 선생님에게 제대로 된 수업을 받기 시작하자 실력이 급속도로 느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이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나도 좀 더 영화준비에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됐다.
준비를 할 수록, 시나리오를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대본에 몰입되는 것을 느꼈다.
난 점점 무언가를 잃은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메소드연기였다.
***
[악의 기록] 제작발표회장.
씨네 르포 조상기 기자는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로카르노에서 만난 빛나던 배우와 감독.
저 두 사람이 이번에는 무엇을 보여줄까?
거기에 예기성과 이정건이 조연이라니. 각각의 배우로 원톱영화를 찍어도 되는 배우들. 나이대를 대표하는 배우라 해도 과장이 없다.
이정건은 바른 사나이라는 고정 된 이미지를 벗어나야 했다. 대중에게 고정된 이미지는 배우의 수명을 갉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커리어에 첫 악역을 선택한 건 현명한 생각이었다.
예기성은 이제 주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더는 배역을 찾기 힘든 나이다. 조연으로서 연착륙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두 배우에게 중요한 전환점인 상황에서 선택한 영화. 두 배우 모두 배우로서 새로운 성공이 필요했다.
두 배우가 선택한 영화는 이수한 감독의 영화였다.
그래, 이수한 감독의 영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까. 그런데 묘하게 이지우라는 배우에게 기대감이 실리는 이유를 조상기 기자는 알 수 없었다.
[악의 기록] 제작발표회장에는 각종 매체에서 기자들이 왔다.
박정태 때문에 한번 무산됐던 프로젝트이기도 했고, 예기성과 이정건이 최초로 동시에 출연하는 영화이기도 했으니.
최근 여러 이슈를 몰고 다니며 '검찰청 런웨이' 사진이 스포츠신문 1면에 실려 화제성이 높은 이지우까지.
그때 웃으면서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는 장면은 아직 기자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하곤 했다.
그만큼 취재 열기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조상기 기자는 사전 제작사 측에서 배포한 [악의 기록] 보도자료를 다시 한번 훑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기자들의 말 때문에 도저히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망한 프로젝트 다시 하는 거 아닌데, 이게 다 감독이 경험이 없어서 그래. 어떻게 신인배우를 원톱으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냐."
"아무리 [폭력의 사슬]이 흥행했어도 상업영화 첫 입봉인데 이정건 예기성 데려다 놓고 친한 이지우를 원톱 주연 내세우는 건 아니지. 내가 봤을때 이거 밀어주기 분명히 있다."
"그니까. 예전 박정태가 주연했을 때랑 시나리오도 바뀌었다던데. 이지우 캐스팅하려고 시나리오 바꾼 거 아냐?
"하여튼, 독립영화에서 먹혔다고 상업영화에서도 먹힌다 생각하면 오산이라니까. 감독이 주제를 몰라요. 돈 좀 벌었다고 제 하고 싶은 데로 하는 거 보니 솔직히 이번 영화 기대도 안 된다."
이전 십수 명의 기자를 단체로 고소한 바 있는 이지우였다. 기자들에게 인식이 좋을 수 없겠지.
한편으로 조상기 기자는 저널리스트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기자로서 자존심이 있다면 팩트를 기반으로 한 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 말하고 싶었다.
저마다 출처가 불분명한 말을 한마디씩 하는 기자들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조상기 기자는 참지 못하고 무어라 말하려는 찰라, 사회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악의 기록] 제작진들을 모시겠습니다!"
연단의 중앙으로 걸어오는 주요 스태프와 배우들.
그제서야 조상기 기자는 왜 계속 이지우가 생각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기자들에게 하려 했던 변명이 의미 없었음을 깨달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사이로 걸어오는 배우와 스태프들.
잠시간 포토타임.
연단 중앙에 일렬로 선 배우들. 이지우는 이정건과 예기성의 중앙에 섰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치 지금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한 형형한 눈빛. 새하얗게 빛나고 미스테리한 매력을 뽐내던 '강림차사'와 정반대의 이미지. 보기 좋게 살을 태워 구릿빛으로 빛나는 피부. 맞춤 정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승모근과 광배근이 셔츠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이정건과 예기성. 두 별 사이에서 이지우의 존재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조상기 기자는 감독의 예술인 영화라는 매체에서 배우인 이지우가 생각났던 이유를 찾았다.
저 존재감. 마치 이미 대배우인 듯 다른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더욱 빛나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저 배우.
이지우의 존재감은 조상기 기자가 굳이 다른 기자들에게 변명할 필요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기자들이 셔터를 누르기 바쁜 그 모습을 보고 조상기 기자는 속으로 웃었다.
***
내가 주연인 [악의 기록], '현수'역은 전직 북파공작원이다.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비주얼적인 요소는 필수이다. 게다가 나는 체중조절에는 이골이 났기에 익숙하게 목표체중까지 만들었다.
사실 체중 조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어떻게든 아이들의 후견인이 돼야 한다는 압박, 그리고 시나리오에 대한 몰입 때문에 자연스럽게 살이 빠졌다.
거기에 코리아액션스쿨의 하드한 트레이닝. 일과 이후에는 전직 헬스 트레이너였던 로드매니져 이동수와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이번 촬영준비를 하며 이동수가 사회체육학과 출신 전직 헬스트레이너였음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별 어려움 없이 식단관리까지 손쉽게 받을 수 있었다.
원래도 몸은 좋은 편이었으나, 덕분에 체지방을 낮추고 근육이 도드라지게 만들어 누가 봐도 조각 같은 몸을 만든 상태였다.
제작발표회 사회자의 입장 사인.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미리 사인을 맞춰 둔 대로 자리에 앉고 제작발표회가 시작됐다.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요?"
간단한 소개를 끝내고 본격적인 사회자가 준비한 질문이 시작됐다.
첫 질문은 제작발표회에서 단골처럼 나오는 질문.
마이크를 받아든 이수한이 잠시 고민하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답했다.
"어··· 좋은 이야기는 한마디로 줄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이 영화를 한마디로 줄이면, '상실'에 대한 영화입니다."
"네? 잃어버리다 할 때 그 상실이요?"
"네!"
그러고 마이크를 넘겨버리는 이수한.
다소 엉뚱한 대답에 살짝 당황하는 사회자.
평소에 사적인 자리에서 저러면 그냥 이상한 사람인데, 차려입고 많은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는 척하니까 예술가 같네.
역시 유명해지고 봐야 된다.
"네? 아 네··· 그럼 다음 질문은 최두호 무술감독님. 이번 영화에서는 많은 액션이 나온다고 해서 기대가 큽니다. 이미 코리아액션스쿨에서 배우들이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어느 배우가 가장 잘하나요?"
능숙하게 질문을 넘기는 사회자.
보통 무술감독이 제작발표회장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잘 없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영화에 주·조연으로 참여한 최두호의 대중적 인지도가 높다 보니 무술감독인 그도 배급사의 부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네, 다들 잘 따라와 주시고 있지만, 이지우 씨가 남다르게 잘하긴 합니다."
"아! 체력이 좋나요? 아니면 무술 실력이 뛰어난가요?"
그말에 살짝 인상을 쓰는 최두호 감독.
아마도 액션을 무시하는 듯한 저 말이 거슬렸을 것이다. 영화에서 액션은 그저 몸을 잘 움직이고 무술을 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네··· 다 잘하긴 하는데요. 영화에서 액션은 감정의 표현이고 캐릭터 서사를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이지우 씨는 몸을 쓰는 법을 알아요. 그리고 제가 본 배우 중 액션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걸 가장 잘하는 배우입니다."
내가 전생에 징그럽게 갈굼을 당했으면서도 이번 생에도 그를 찾은 이유.
액션에 감정과 서사를 담을 수 있는 무술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조단역 시절 여러 촬영장에서 근본 없는 액션을 배웠던 나에게 진짜 액션을 가르쳐 줬던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코리아액션스쿨에 와서 스턴트맨 해보자고 하니까 거절하더라고요. 하하."
오랜 경력을 가진 그답게, 자신이 좀 딱딱한 답변을 했다 싶은지 사회자에게 농담을 건네는 최두호.
몇번 더 질문이 오가고, 사회자가 준비한 질문이 끝났다. 본격적인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됐다.
어느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이지우 씨에게 질문 있는데요."
사회자가 주는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폭력의 사슬]때부터 이수한 감독님과 각별한 우정이 유명한데요. [악의 기록]의 시나리오가 이지우 씨에 맞게 바뀐 게 혹시 그 우정 때문이었을까요?
이새끼봐라.
내가 기자들을 싸그리 고소한 이후 기자들 사이에서 내가 껄끄러운 존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선 넘었지.
말투는 정중하지만, 자세는 삐딱하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정도면 대놓고 이수한이 친분으로 캐스팅한 거 아니냐고 물어본 것과 다름없다.
현주의 채용비리 기사가 올라갔을 때 가장 먼저 움직여 기사를 쏴준 것도 이태환 감독과, 이수한 감독이니까. 이미 이수한과 나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악의 기록] 시나리오가 박정태에서 내게로 넘어오면서 이수한이 내게 맞춰 수정한 것도 사실이고.
여기서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톱스타 이정건을 재끼고 신인배우를 캐스팅했다고 기사를 쓰겠지.
맞다고 하면 관련도 없는 현주의 채용비리 건을 엮어 친분으로 캐스팅한다고 할 테고.
머릿속에서 어떤 대답을 하면 어떤 기사가 올라올지 차례로 떠오른다.
할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그때 갑자기 마이크를 쥔 이수한이 나보다 먼저 말했다.
"제가 처음 질문에 이 작품은 '상실'에 대한 영화라 말했는데요. 이 작품에서 '상실'을 이지우 씨만큼 잘 표현 할 사람은 없어서 캐스팅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시나리오도 수정하게 된 거고요."
그리고 이어서.
여태 조용히 계시던 예기성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허헛, 저는 나이가 많은 배우입니다. 저는 나이가 많아서 이 배역에 캐스팅됐으니 나이 많은 게 문제가 됩니까? 배우는 각본을 보고 작품을 선택합니다. 그 기준은 흥행의 여부보다 좋은 작품에 좋은 배역, 나에게 잘 맞는 배역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기자님, 배우가 자신에게 잘 맞는 배역을 맡은 게 잘못된 행동인지 묻고 싶네요."
어··· 이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데···
영화계 원로이자, 탑배우인 예기성의 말.
여태 사회자의 질문에 단답, 혹은 허허 웃기만 하던 그가 조곤조곤 말하자 일순 제작발표회장이 조용해 졌다.
살살 약 올려서 고소각 세우려 했더니만. 쩝···
선생님을 수고스럽게 했네.
살짝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홍보를 위한 이 자리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어, 잠시만요. 저는 지우랑 친분 때문에 출연한 거 맞습니다. 지우가 저 이 영화에 꽂아줬어요. 기자님 이거 꼭 써주세요 네?"
뜬금없이 말하는 탑스타 이정건.
사우나 드립 칠 때부터, 안 웃긴다 생각했는데···
이번 건 좀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