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4화 (55/121)

54. 코리아액션스쿨

54.

세화의 연기에 이수한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 자리에서 이어진 카메라테스트. 나른하게 하이큐를 날리던 이수한도 집중한 게 느껴졌다.

세화의 연기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역치고는 잘하는 게 느껴졌다. 반대로 조금만 가르쳐 주면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 감정의 표현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억눌려있던 희로애락을 터트리듯이 표현하는 세화. 이건 재능의 영역이기에 가르칠 수 없고 타고나는 것이다.

연기라는 것을 처음 하기에 넘쳐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과잉이 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되찾은 10대의 발랄함에 묻혔다.

그리고 특히 '미향'이 삼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감정표현이 확 좋아지는 게 보였다.

'미향'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에게서 자란 여자아이다. 그리고 의지할 곳 없는 '미향'은 삼촌을 아빠처럼, 오빠처럼 따르는 아이였고.

어쩌면 세화는 내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수줍어 못했던 표현을 연기로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되는 연기였다.

세화의 카메라테스트 영상을 몇 번씩 돌려보고 있는 이수한에게 다가갔다. 내 인기척을 듣고 이수한이 먼저 말했다.

"뭐냐··· 얘 연기시켜야겠는데?"

"흐음··· 형이 봐도 그래? 확실히 잘하긴 하는데··· 일단 본인에게 물어보자. 하고 싶은지. 혹시나 하는 말인데 세화가 안 한다고 하면 절대 안돼. 알지?"

"알지. 당연히. 나를 뭐로 보고. 대신 잘 말해줘. 니가 언제까지고 애들 돌볼 순 없잖아. 애들도 제 살길을 만들어놔야 나중에 제 갈 길 찾아가지."

"그렇긴 하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실, 나도 세화가 연기를 계속해보면 어떨까 생각 중이었다. 내 경우에는 이수한처럼 미래의 일 걱정하기보다 당장 세화가 가진 닫혀 있는 마음을 연기로서 풀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최소한 [악의 기록] 촬영을 하면서 사랑받는 조카로 지낼 수 있으니까. 심리치료의 연장으로 말이다.

"그리고 너도 인마. 당장 촬영이 다음 달인 데, 너도 준비해야 될 거 아니냐. 대본 익히는 가야 걱정 안 한다지만, 몸 만들어야지. 이번 액션은 빡세."

"준비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이수한에게 걱정하지 말라 말했지만, 사실 나도 준비할게 많았다. 맨손 액션의 비중이 큰 영화다. 거기에 액션 시퀀스도 길고. 사전제작 표의 일정상, 마지막 액션 시퀀스에만 할당된 촬영이 일주일이다. 그만큼 액션의 볼륨이 큰 영화.

앞으로 코리아액션스쿨 사장인 최두호 무술감독과 연습일정이 빠듯하게 잡혀있다. 영화상에 나오는 비주얼 때문에 몸도 만들어야 한다.

휴식기에는 상관없지만, 촬영이 시작되면 밤낮없이 바쁜 게 배우 아닌가.

솔직한 말로 이수한이 걱정하는 액션에 관해서 나는 걱정하지 않고 있다. 내가 찍은 액션 영화가 몇 갠 데.

걱정되는건 연기하러 집에 못 들어갔을 때 애들이 걱정이지.

만약 세화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해도 문제가 복잡했다. 계약하기 위해서는 세화 세호의 친권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계약사항을 체크 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세화를 촬영장에서 케어해야 할 것 아닌가.

잠시간 고민하고 세화에게 다가갔다.

"세화야, 재밌어?"

"네···"

카메라 테스트 때와는 또 다른, 조용하고 움츠러든 모습.

"연기는? 재밌었어?"

"네?...네"

"연기 계속해보고 싶으면 한번 해볼래?"

한참을 말이 없는 세화.

"괜찮아.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억지로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해."

내 대답이 보채는 것으로 들렸을까.

서둘러 말하는 세화.

"하기 싫은 거 아니에요."

"응? 그럼 하고 싶은 거야?"

"...네."

그러면서 살짝 웃는다.

"하하, 걱정하지 말고. 잘 할 거야. 세화야."

그래 그러면 됐다. 방법은 아저씨가 찾으면 되니까.

***

오랜만에 찾은 코리아액션스쿨. 정확하게는 이번 생에서는 처음 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스턴트 배우 양성소. 코리아액션스쿨. 나중에 몇몇 액션스쿨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 액션스쿨 조차 코리아 액션스쿨이 배출해낸 수강생들이 세웠기에 '액션'이라는 하나만 봤을 때 코리아 액션 스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그 영향력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최두호고.

이미 스튜디오 나우와 코리아액션스쿨은 계약이 끝난 상태.

내가 약속시각에 맞춰 도착하자 이미 최두호 사장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최두호.

최두호 감독과는 전생에 인연이 좀 있다. 내가 조?단역할때 진짜 징그럽게도 갈궈 댔었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내가 경수형한테 무술감독은 꼭 최두호 무술감독 써야 한다고 추천했다.

"이지우 씨, 반가워요. 어서 와요.

"네. 안녕하세요."

"크··· 나도 봤어요 [폭력의 사슬]. 그거 무술감독 없이 이지우 씨랑 이수한 감독이 직접 액션 시퀀스 만든 거라면서요?"

"네? 아··· 네. 이수한 감독님이 액션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해서요. 많이 연구하셨더라고요."

"에이, 내가 현장에 있던 배우들한테 들은 게 있는데요. 오토바이 점프도 직접 뛰었다던데."

내가 겸양을 떨자 웃으며 손을 내미는 최두호. 악수하고 사무실에 앉자마자 [폭력의 사슬]이야기부터 한다.

사실 [폭력의 사슬]은 따로 무술감독이 있었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만한 맨손 액션 장면이 나올 수 있었던 건 미래를 알고 있는 내 도움이 컸다.

연출에 관해서야 이수한에게 내가 조언 정도 해주는 정도지만, 액션 같은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합을 맞춰야 잘 나오는지 이수한 보다 훨씬 잘 아니까.

"저도 액션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야, 몇몇 합 맞춘 씬은 그냥 영화보고 찍은 장면이 아니던데요. 그냥 보고 그 정도 씬 만든다면 우리는 다 굶어 죽죠. 많이 배웠습니다. 하하."

그야 당연히 몇 년 뒤에나 유행할 액션 시퀀스를 흉내 냈으니. 다만 그 액션에 감정과 의도를 담아 연출한 감독의 역량 덕분이기도 했고, 나도 40대의 몸이 아닌 20대의 몸으로 연기했으니 그만큼 퀄리티가 올라갈 수밖에.

나는 전생에 단역부터 조연까지 많은 역할을 했었다. 무명시절에 특히 많은 역할을 했던 건 조폭이었고, 두 번째로 많이 했던 역할은 경찰이었다.

한국영화의 흐름이기도 했고 이시기에 한국 영화의 한계이기도 했다.

돈이 없거든.

헐리우드 처럼 외계인이나 공룡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으니까. 폭력이나 추격, 서스펜스 등의 극한의 상황을 관객을 이입시키는 소재 중 조폭, 경찰만 한 소재도 없다.

조직폭력 간의 암투, 범죄자를 추적하는 형사. 듣기만 해도 피가 생각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소재.

하다 못해 [폭력의 사슬]도 폭력을 표현하기 위해 조폭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지 않는가.

"오늘 바로 시작하시죠?"

그러면서 씨익 웃는 최두호.

나는 저 웃음의 의미를 안다.

"네."

마주 웃어 주었다.

커다란 체육관처럼 만들어 놓은 훈련장.

한쪽 벽면에는 각종 촬영 소품으로 사용하는 검, 도, 창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점프대, 트래펄린 등 장비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이정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스턴트맨과 합을 맞추고 있었다.

장신에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이정건이 매트 위에 맥없이 고꾸라졌다.

"어어, 정건 씨 여기서 버텨주셔야 하는데."

"와, 이거 진짜 빡세네. 생각보다 잘 안 되는데요? 어? 지우 이제 오냐??"

그제야 나를 발견했는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정건.

"야, 너 이렇게 제대로 맨손 액션 하는 거 처음이지? 이게 볼 때는 쉬워 보여도 장난 아니다. 형이 그 재작년에 [무신]찍을때 말이야···"

역시 선배로서 뭘 열심히 알려주려 하지만···

방금 그렇게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설득력이 있겠냐고.

액션 연기는 절대 쉽지 않다.

누구보다 더 내가 잘 알지.

내가 처음 영화 액션을 배운 곳은, 이런 훈련장이 아니라 촬영장에서 깨지고 다치면서 배웠으니까.

"지우 씨, 몸 풀고 가실게요."

간단한 준비운동이 끝나고 한참 동안 기초체력 훈련이 이어졌다.

이후 본격적인 실제 촬영 시퀀스에 맞춘 훈련이 이어졌다.

"첫날이니까 가볍게 1:1 격투씬 합만 맞춰볼게요."

"하나, 둘, 셋에 때리고. 하나 둘에 피하고 퍽! 알겠죠?"

느릿한 구령에 맞춰 동작 하나하나를 구분 짓고 알려주는 스턴트맨.

느릿하게 몇번 합을 맞추고 이어지는 연습.

"오? 잘하시는데요? 그럼 이번에는 좀 빠르게 연속동작으로-"

처음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스턴트맨의 주먹이 안면으로 날아왔다.

물 흐르듯이 피하고 날아오는 손을 잡아채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

내 주먹이 스턴트맨의 코앞에서 멈추자, 그제야 질끈 감은 눈을 뜨는 스턴트맨.

코리아액션스쿨의 훈련량은 토 나오기로 유명하니까. 오죽하면 어떤 여배우는 훈련 중에 못하겠다며 도망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빡센 훈련 뒤에, 의도가 뻔히 보이는 격투 시퀀스 훈련이다.

나쁜말로 하면 길들이기겠지만, 실제로는 스턴트와 위험성에 대한 경고, 그리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신고식에 가깝다.

나도 예전에는 당했지만, 지금 팔팔한 20대 몸이고, 과거 액션 영화를 찍을 때면 여기에 와서 토할 정도로 훈련을 했기 때문에 알고 있다.

멀찌감치 이정건과 수다를 떨며 구경하고 있던 최두호 무술감독이 내가 단번에 액션 시퀀스를 소화하는 것을 보자 다가왔다.

"이지우 씨. 유단잔가?"

***

한참 액션스쿨에서 훈련하며 촬영준비를 하던 중. 기쁜 소식이 왔다.

황 변호사가 전화와, 세화 세호의 친부가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고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업무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사무실로 찾아와 달라 했다.

황 변호사는 이전 이태환 감독의 동기 중 이제 막 변호사 개업한 사람이었고, 이태환 감독의 절친으로 믿음직하다는 소개 때문에 일을 맡겼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바로 본론을 꺼냈다.

"후견인 신청 어떻게 됐나요?"

"안 그래도··· 나쁜 소식이랑 더 나쁜 소식이 있어요."

"음··· 나쁜 소식부터 듣죠."

"세화 세호 모친을 찾았습니다.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친부가 징역을 선고받았다고요. 그래서 애들 이야기를 꺼내긴 했는데··· 칼같이 답변하더군요. 고아원 보내라고요···"

대충 예상했던 일이었다. 애들을 버리고 간 사람이 무슨 정이 남아서 다시 애들을 보려 하겠는가.

다만 애들이 상처받지 않게 나만 알고 있을 생각이었다.

"더 나쁜 소식은요?"

"이혼 후 친권이 친부 쪽에 있기에 친부 징역이 확정되자마자 지우 씨 앞으로 후견인 신청을 넣었는데요···"

어째 말하는 표정이 불안하다.

"불허되었습니다."

이건 좀 많이 나쁜 소식인데?

"아니 왜요?"

"법리적인 해석은 따로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지우 씨가 너무 어리고 직업적 안전성이 떨어지다 보니···"

충격이었다.

세화가 만약 영화를 찍고 소속사와 계약한다?

계좌를 만들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한다?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등록하는 것도.

모든게 불가능해진다.

세화가 꿈을 펼쳐 영화를 찍고, 그 소식을 들은 친부와 친모가 돈 냄새 맡고 찾아와 친권을 휘두르는 모습.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이들을 두번 상처 입히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물었다.

"방법 없어요?"

시간을 되돌려 어려진 게 좋았으나, 이때 만큼 어린 내 모습이 후회 된 건 처음이었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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