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3화 (54/121)

53. 뭔 데? 왜 잘하는데?

53.

"얘들아, 냉장고에서 먹을 거 알아서 꺼내먹고. 세화야, 순정만화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거든? 골라보면 돼. 뭐라고? [꽃보다 남자]를 안 봤다고? 이거부터 봐. 세호야 너는 이리 와봐."

"네-아저씨!"

쪼르르 달려오는 세호.

"어디 보자, 형? 블루레이 타이틀 중에 애니메이션은 없어? 디즈니꺼나 지브라꺼."

"잠시만··· 일단 상황 좀 설명해주면 안 될까?"

"아! 여기 있네. 세호야 [라이언 킹] 봤니? 크··· 명작이지. 아저씨가 어렸을 때 봤던 건데 이건 꼭 봐야 해. 잠시만."

이수한은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피우던 담배를 급하게 비벼끄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렇게 세호에게 [라이언 킹]을 틀어주고 이수한 곁에 섰다.

"뭐냐."

"뭐긴 뭐야. 후견인으로서 정당한 임무수행?"

"아니, 너 아직 후견인 신청 결과 아직 나오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그 임무라는 걸 왜 내 집에서 하느냐고."

"만화책 있겠다, 블루레이 타이틀 많겠다, 애들 좋아하잖아? 키즈카페가 별거야? 애들 좋아하면 그게 키즈카페지. 아참 엑스박스랑 플스도 여기로 배송시켜놨어. 타이틀도 몇 개 주문해놨고. 크··· 빔프로젝터로 게임하면 지리겠다. 형 홈시어터도 내가 주문할게. 잠시만···"

"키즈카페가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다만, 여긴 어덜트가 사는 곳인데."

아, 아직 키즈카페 같은 건 안 나왔나?

"허 참··· 내가 쟤들 데리고 진짜 만화방, 피시방을 다닐 수는 없잖아? 아참, 미안한데 담배는 나가서 피고."

인상을 확 구기는 이수한, 그러면서도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서 밖으로 나간다.

"에효··· 모르겠다. 시간당 1,000원. 3명이니까 돈 내고 놀아, 인마."

이미 아이들의 스토리를 다 들어서 아는 이수한도 못이기는 척 승낙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현주까지 만화방으로 합세했고.

"넌 또 왜 왔어?"

"누가 보면 아저씨 보러온 줄 알겠네. 세화랑 세호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거지, 아저씨 보러왔겠어?"

"야, 너 예전에는 오빠라고 하더니 왜 요새는 아저씨라 그러냐."

"어휴, 양심도 없지. 아저씨 꼴 좀 보고 말하세요. 만화방에 들어앉은 이후로 도저히 오빠라고 부를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와··· 진짜 커플이 쌍으로··· 너도 돈 내고 놀아. 시간당 1,000원."

"아저씨, [폭력의 사슬] 각본 가격 다시 협의하실래요?"

"작가님, 음료는 커피? 녹차? 음료는 뭐 필요하신지?"

둘이서 티격태격하며 잘 논다.

현주는 [폭력의 사슬]때 각색작업을 도와주고 따로 돈을 받지 않았었다.

그 당시에 이수한은 노숙자와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까. 정확하게는 돈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었다.

이후 극장수익금이 정산되고, 이수한이 각본의 가격을 지급하려 하자 현주가 거절했다. 전체 각본의 1/3의 분량만이 현주가 작업한 분량이고, 그 마저도 분식집에서 함께 각본 수정을 하며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신입 작가의 각본 가격은 1000만 원 전후. 그나마 현주가 작업한 분량은 후반부 일부였고, 오히려 이수한이 현주를 가르치며 작업했었다. 그럼에도 이수한은 공동각본가로 이름 올려줬었다.

게다가 극장수익이 정산됐을 때 이미 현주는 [민주를 기다리며]와 [저승카페]의 공동작가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데는 [폭력의 사슬]의 흥행이 큰 도움이 됐다.

현주도 이수한에게 항상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고마움의 표시로 극장수익 정산 이후 각본가격을 따로 매기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수한이 전 재산을 제작사 인수에 밀어 넣는 바람에 돈이 없는 상태였고, 현주는 이 상황을 알뜰하게 놀려먹고 있는 것이다.

"세화야 어머어머 얘 좀 봐. 너무 잘 어울린다."

그녀는 자신이 어렸을 적 입던 옷과, 백화점에 가서 애들 옷을 한 아름 사왔다.

그제야 나도 애들 입은 옷이 꽤 낡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미쳐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들. 자신의 동생들처럼 애들이 돌봐주는 현주가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새로 입은 옷이 부담스러운 듯 몸을 베베 꼬는 세화. 그나마 세호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잘 적응 하는 편이였으나, 세화가 문제였다.

아이답지 않게 너무나 조숙하다. 말 수도 적고···

차차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소송에 들어간 변호사 말로는 아동학대가 심각했고, 그 기간도 길기에 세화와 세호 아빠는 징역은 피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세화와 세호를 잠시 현주에게 맡기고, 이수한에게 다가갔다.

"형, 고마워. 아무래도 화실에 애들 계속 두기가 좀 그래서··· 애들도 답답해하고. 그렇다고 내가 어딜 데리고 다니기가 좀 그렇잖아? 사람들이 알아보고 하면 애들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질까 봐··· 애들 곧 학교도 다시 가야 되는데. 민감한 시긴데 학교에 소문 퍼지면 안 좋잖아."

아무래도 고맙단 말은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애들이 듣지 못하게 슬며시 다가가 말했다. 내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 이수한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알아 인마. 우리가 장난처럼 웃어 넘어가야 애들도 편하게 지내지. 괜찮아 진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면서 담담히 대답하는 이수한.

그런 이수한을 보면서 괜스레 미안해 졌다.

"형, 뭐 하는 거야? 뭐 도와줄 거 없어?"

"응? 아. 이거? 이번 오디션 카메라테스트 한 거."

"누구? 누나역? 아니면 아역?"

"전부다.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어서 일단은 홀드 시켜놓고 다시 훑어보는데. 쩝. 다시 봐도 없네."

이수한이 틀어놓은 영상은 오디션 받은 배우가 연기하는 내용이었다.

몇 명이 연기하는 것을 봤지만, 이수한이 말한 대로 확 느낌이 오는 배우는 없었다.

그렇게 조카역 아역 배우가 오디션 보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세화가 나와 이수한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응? 세화야 뭐 필요하니? 배고파?"

"아, 아니에요. 그냥 익숙해서, 신기해서요."

화들짝 놀랐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세화. 놀랄 것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지나치게 움츠러드는 세화가 가엽고 안쓰러웠다. 세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 생각을 들어주는 게 맞겠지. 일단 대화를 해볼 생각으로 물었다.

"음 뭐가 신기한지 알 수 있을까?"

"아저씨 집에서 봤던 대본에 있던 내용으로 연기하는 게 좀 신기했어요."

그제야 내 화실에서 놀 거리가 없어서 내가 보던 대본으로 동생과 장난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름 그것도 자기네들끼리 역할극이라 생각하고 논거겠지.

"아, 이거? 음··· 티브이에서 보면 막 연기하잖아. 그런 사람을 뽑는 영상이야. 오디션이라고 해."

그러자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한다.

아··· 그래. 초등학생 고학년쯤 되면 알건 다 알지. 이맘때쯤 슈스케인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기도 했고.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아니 이제는 안다.

반쯤 농담으로, 그리고 반쯤은 아이가 좀 밝고 자신감 있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세화야 너도 해볼래?"

"아니요, 아니에요. 저 잘 못해요. 부끄러워요."

내가 이수한을 살짝 치며 '캠코더 있어?'하자, 이수한이 조그마한 디지털 캠코더를 주섬주섬 세팅했다.

"어려워할 거 없어. 그냥 놀이라고 생각해."

내가 괜히 이런 걸 권한 건 아니었다.

연기 치료. 실제로 심리학에서 시행하는 치료법 중 하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캐릭터를 분석하기 위해서 심리학을 손댄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연기를 통해서 의사소통의 유형에 여러 방법이 있음을 실행해보는 것.

나 또한 메소드 연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기억도 있었기에, 연기가 심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화 같은 경우에는 연기를 통해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음을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대본중 한부분을 펼쳐서 세화에게 보여줬다.

"이 부분을 연기해볼래? 여기 미향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 있지? 이 미향이가 너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면 돼."

내가 고른 부분은, 주인공이 조카(미향)를 얼마나 예뻐하고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씬이였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아무리 며칠 동안 챙겨준 나라고 할지라도 가족이 아닌 이상 내가 세화와 세호한테 지나친 관심이나 애정을 보이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받아들이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부자연스러울 테고.

하지만 사랑하는 조카와 삼촌의 연기를 하는 거라면? 자연스럽게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작품 중 연인 사이였던 배우들이 실제 연인이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삼촌과 조카 연기로 애정에 낯선 아이에게 서투르게나마 애정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심리치료기도 하고.

시종일관 불안해하고 눈치를 보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아니더라도 삼촌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해볼까? 저기 웃기게 생긴 아저씨가 하이 큐 하면 대사를 읽어보는 거야. 알았지?"

"네···"

내가 이수한에게 눈짓을 하자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는 듯이 '하이큐'를 외친다.

아··· 사실 이수한 정도 되는 감독이랑 한때 연기력 하나로 탑배우 찍은 내가 심리 치료를 위해 이런거 하는게 재능낭비긴 한데, 뭐 아무렴. 재능낭비가 아니라 재능기부 아니겠나.

"와아아··· 삼.촌.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보고싶··· 었는데! 히이잉."

어설픈 연기. 속으로 웃었다. 연기를 못 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부탁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애쓰는 그 모습이 예뻤다. 어차피 연기를 잘하리라 기대하고 시킨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그래, 잘했어. 잘하네. 이번엔 아저씨가 대사 받아 줄게, 다시 해볼까?"

어느새 현주와 세호도 관람객이 되어 근처 소파에 앉았다.

"누나, 화이팅!"

"세화야 예쁘다!"

그렇게 관람객의 성원까지 더해지자, 세화는 더 부끄러워 졌는지 몸을 베베꼰다.

"자,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면 재밌을 거야. 형 큐 사인 좀."

"하이 큐!"

심드렁하게 싸인을 보내는 이수한. 그리고 싸인에 맞춰 시작된 연기.

"와아- 삼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힝"

대사 전 눈이 마주치고, 아까의 국어책 읽기보다는 훨씬 좋아진 대사.

그리고 지문에 나와 있는 것은 '와락'안기는 것이지만, 부담스러웠는지 내 근처 와서 살짝 기댄다.

"와, 우리 미향이 언제 이렇게 컸어? 다 컸네. 짜잔! 삼촌이 뭐 사왔게?"

내가 무릎을 꿇어 세화에게 선물을 주는 척하자,

"뭐야뭐야? 이거 내 선물이야?"

어? 뭐지? 내가 대사를 받아주자 돌아오는 대사가 확 살아나며 10대의 밝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 이게 요즘 제일 잘 팔린다던데. 연아의 햅틱이라던가?"

"우와! 진짜 좋아. 너무 고마워! 우리 삼촌 최고!"

이번에는 대본 지문에 있는 것처럼 확하고 안기는 세화.

특히 '너무 고마워! 우리 삼촌 최고!' 이 부분에서는 진짜인지 연기인지 헷갈릴 정도였고.

"커··· 엇?"

자신도 모르게 컷 사인을 내린 이수한.

내가 고개를 돌려 이수한을 바라보자, 이수한도 놀란 듯 나를 멍하게 쳐다봤다.

이게 뭔가 싶은 반응. 그리고 나도 대사 두 마디에 단번에 몰입해버리는 세화에게 놀라버렸고.

"어··· 앞부분 잘라내고 리테이크 갈게··· 요?"

실제 촬영도 아닌데 얼빠진 듯 리테이크를 말하는 이수한과, 나도 모르게 리테이크를 준비한 나.

뭔 데, 왜 잘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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