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2화 (53/121)

52. 제가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52.

발신자표시에 이정건이 뜨는 걸 보고 잠시 고민했다.

이미 수정된 시나리오는 투자자들을 포함한 여러 기획사에 돌아간 상황. 이정건은 이전부터 이수한의 차기작에 관심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대충 전화를 건 목적이 뭔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네. 선배님 별일 없으십니까."

-어디냐 너.

전화한 이정건은 차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지, 내비게이션 소리가 섞여 들렸다.

"네? 저 스튜디오 나우라고···"

-알아. 거기 이수한 감독님이 차린 곳 맞지?

"네네 맞습니다."

-후배님 실망이야. 나 후배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러기 있어?

"네?"

-너 이수한 감독님 차기작 주연 확정됐다며? 거기다 예기성 선생님도 출연 확정이고.

"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기획사랑 기자들 사이에 소문 벌써 다 돌았어 인마.

김주하 본부장이 사전작업해놓은 것이다. 이전 기획사 일할 때부터 다져놓은 기자들과 여러 소속사의 인맥을 활용해 미리 파이낸싱 밑밥을 뿌려놓은 것이다.

-근데 왜 나한테 시나리오 안 가지고 오냐.

"하하, 그건 감독님한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너랑 이 감독님이랑 친한 거 다 아는데 무슨.

사실 주인공의 나이대가 30대였을 때 캐스팅 1순위 배우는 이정건이었다.

나때문에 주인공 나이대가 바뀐 이후로 캐스팅 명단에서 제외됐고.

난감했다. 남은 배역은 악역인 재벌 3세 망나니 역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정건의 기존 이미지와 너무 다르고, 무엇보다 악역에, 비중이 주인공보다 작다. 그래서 캐스팅 명단에서 이정건을 제외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정건은 너무 비싸다.

"어··· 선배님? 그게··· 저···"

-스튜디오 나우 거기 예전 씨네게이트 그 자리 그대로지?

"네? 네..."

-근처야 기다려. 이 감독님 계시냐?"

"네. 저도 이제 계약하러 온 참이라서요. 이 감독님이랑 제작자님이랑 다 있습니다."

-오케이, 지금 간다. 커피 끓여놔. 오랜만에 니가 해준 커피나 한 잔 마시자.

그렇게 전화가 끊어지고.

"선배님? 혹시 이정건 씨 여기로 오는 거야?"

"뭐? 이정건이요?"

계약서를 다 작성하고 잠시 여유를 가지고 잡담하던 [악의 기록] 주요 제작진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전화가 끊어지고, 정말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이정건은 매니저와 함께 스튜디오 나우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아이고, 누추하신 분이 귀한 곳에 어쩐 일로, 아니지 귀하신 분이 누추한 곳에 어떻게 오셨어요."

캐스팅 명단에도 없던 이정건이 제작사로 직접 방문하자 이수한도 퍽 놀란 눈치였다.

"하하, 감독님이 제 전화 안 받으시니 그렇죠."

시원하게 웃으며 이수한의 실수를 넘기는 이정건.

평소에는 쓸 일이 없는 사장실에 이정건과 함께 앉았다.

제작자로 경수형과 경영지원 본부장인 김주하 실장, 그리고 이수한과 나까지.

이정건은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같이 온 매니저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시나리오 잘 봤습니다. 이 감독님."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저도 이 작품에 꼭 참여하고 싶-."

"죄송합니다. 이 작품 주인공 역은 이미 캐스팅됐습니다."

단호하게 이정건의 말을 잘라버리는 이수한.

어찌보면 예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이수한의 대답에도 이정건은 흔들리지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주인공 역할에 지우가 캐스팅 된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야 뭐 주인공 역할 시켜주시면···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만, 나이대가 안 맞죠. 하하."

"네? 이정건씨 혹시? '태호'역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제서야 뭔가 대화의 핀트가 맞지 않은 것을 깨달은 이수한. 아마도 이정건이 조연 배역을 위해서 직접 찾아오리라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네 맞습니다. 저는 재벌 3세 '태호'역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 '태호'역을 좀 입체적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재벌 3세이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이라든지, 혹은 뭐 서자? 배다른 자식? 뭐 그런 설정이라든지··· 대놓고 악역을 하기엔 우리 정건이 기존 이미지도 있고···"

이정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끼어드는 이정건의 매니저. 배우를 아끼는 마음은 알지만 저래서는 역효과 날 텐데.

"하··· 이래서 배우들이랑 따로 안 만나려-"

삽시간에 변하는 이수한의 표정.

각본에 손대려면 나처럼 준비를 해오던가.

투자자들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전 재산을 제작사에 베팅한 이수한의 역린을 건드렸다.

우리 우스운 형이 우습지 않은 형으로 변하기 직전 내가 말을 막았다.

"악역이 그냥 악하면 안 되나요?"

"네?"

"주인공은 선한 인물이 아니에요. 선에 대해서 고민하는 인물이지. 그런데 상대역이 악인이 아니라면 주인공의 정체성까지 흔드는 일이죠."

그제서야 매니저가 실수했다는 걸 눈치챈 이정건.

대형 기획사의 톱스타. 이수한 같은 감독을 겪어본 적 없었겠지.

매니저의 말이 이정건의 의지는 아니었는지 이정건은 사과했다.

"어우 형 왜 쓸데 없는 말을 하고 그래. 저도 지우랑 생각이 같습니다. 악인에 서사를 불어넣으면 영화의 톤을 해치죠. 음··· 나름 캐릭터 분석을 많이 해왔는데···일단 미안합니다. 감독님."

"뭐···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냉랭하게 답하는 이수한.

이정건은 담담하게 태호 역을 자신이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태호의 캐릭터는 순수악을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가치가 있죠. 저 또한 그런 캐릭터의 조형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태호가 있기에 주인공의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이 가치를 가지게 되죠. 그리고 한편으로 순수 악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톱스타라고 생각지 않은 태도. 이정건은 담담하게 자신이 분석한 '태호'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말했고, 그 역할을 자신이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어제 내가 이수한을 설득했던 방법과는 정반대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사과에 뜻이라고 하기 뭐 하지만··· 출연료는 절반만 받고 나머지는 러닝 개런티로 받겠습니다."

이정건의 폭탄선언으로 깜짝 놀라는 이정건의 매니저. 그리고 이수한.

"하··· 이정건 씨, 제가 이런 소리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제가 형님이라고 불러도 실례가 안 될까요?"

다시 우스운 이수한으로 변해 있었다.

***

[악의 기록]은 파이낸싱을 끝마치고 본격적인 사전제작에 들어갔다. 시나리오상 주요 배역의 캐스팅을 확정 지었다.

주연은 나. 주요 조연에 이정건과 예기성까지.

재벌 3세 악역에 이정건이 캐스팅됐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투자자들이 말 그대로 몰려들었다.

이전 사극 영화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고, [저승 카페]까지 연타석 홈런을 친 이정건. 그의 몸값은 현재 최고조였고 그의 차기작에 온 관심이 쏠리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김주하 실장은 몰려드는 투자자를 선별하는데 진땀을 뺐다고 했다.

조연과 단역 배역 중 몇몇 오디션이 진행되었고, 제작발표회와, 촬영 날짜가 확정되었다.

나는 화실에서 대본 연습과, 운동, 그림 그리기를 하며 집 화실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가지 예전과 다른 점은 그날 이후 집에 갈 때면 일부러 남매의 집 근처를 지나치는 게 마치 버릇처럼 됐다. 혹시라도 남매를 우연히 마주치면 밥이라도 한 끼 먹여서 보내고 싶은 생각이었다.

내가 이전에 살던 집도 판잣집을 간신히 면한 집이었고, 지금 살던 집은 신축 투룸이지만 이전에 살던 집과 멀지 않은 곳.

동네 자체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생활환경이 좋다고 말할 순 없는 곳이었다.

그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서로 잘 챙기는 남매가 유독 예뻐 보이고 걱정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몇번 그렇게 마주쳐 반강제로 지우 분식에 데려가 푸짐하게 먹이고 김밥까지 포장해서 집에 데려다 줬다.

어머니도 그런 남매가 예뻐 보였는지 살갑게 대해 주셨다. 아이들을 데려갈 때마다 치즈와 참치 속이 다 삐져나올 정도로 재료를 꽉꽉 채운 김밥을 매번 포장해주셨다.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향했다. 혹시나 하교하는 애들을 우연히, 아주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상상하며 말이다.

책가방을 맨 아이들이 골목을 누비며 집에 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들뜬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따뜻해진 늦은 봄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가는 중, 그 아이들의 집의 근처를 지날 때쯤.

'와장창창'

'씨바- 어딨어!'

멀리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닐 거야.

그냥 이 근방에서 자주 있는 그런 다툼이겠지.

치안이 좋은 곳은 아니니까.

내 속마음과 달리, 내 심장과 다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도착한 익숙한 대문. 최근 몇 번이나 지나쳤기에 잘 아는 그 문은 열려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 몇을 헤집고 들어간 그 문 안쪽에는 대낮부터 술에 취한 한 남자와 남매가 있었다.

아···

상황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고, 잠시 멍해져 있는데.

"니 애미가 왔다 간 거 맞잖아! 아니면 이거 뭐야? 어! 도망간 니 애미 어딨어?"

여기저기 흩어진 편의점 봉투들.

그리고 내가 사줬던 각종 생필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의 고성이 계속 이어졌다.

"빨리 말 안 해? 기껏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애비를 속여먹어? 니 애미 어딨냐고!"

주변에서 몇몇 동네 아주머니가 만류하지만, 오히려 거칠게 뿌리치는 남자.

누나는 동생을 껴안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곳곳에 보이는 멍 자국.

처음 만났던 날의 우려.

그냥 멍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생들은 놀면서 잘 다치니까. 아이들은 위험을 판단하는 기준이 턱없이 낮다 보니 무모한 행동을 종종 하곤 한다.

뛰고 구르고 놀다보면 생기는 그런 상처들.

그런 거라 생각했다.

그러길 바랐다.

그리고 나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어쩔수가 없었다.

배우로서는 불합격.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사람으로서는 합격.

아이들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너는 뭐냐, 누구냐 묻는 남자를 밀쳐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이내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내게 달려왔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제풀에 넘어졌다.

넘어진 그 남자를 보고, 패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화실로 돌아왔다.

***

아마 회귀하고 난 이후 가장 정신없이 보낸 한 주였던 것 같다.

처음에 지금 사는 투룸에 애들을 들일까 하다가, 애들 둘과 나와 어머니까지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래서 이사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화실에서 잠시 살기로 했다. 화실에 임시로나마 쓸 아이들 침대며, 책상이며 가구를 들여놓고, 청소업자와 인테리어 업자까지 불러 싱크대와 화장실까지 리모델링 했다.

내가 마실 물 정도만 채워 놓던 냉장고에는 애들이 먹을 음식과 간식으로 가득 채워 놓았고.

고맙게도 세화 세호 남매의 아버지란 사람이 나를 폭행으로 고소해서 경찰서도 갔다 왔다.

당연히 증인이 많았기에 무혐의가 뜨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아동학대로 고소하고, 친권정지소송으로 반격했다. 거기에 아이들에 대한 아이 아버지의 접근금지가처분 신청까지 완료했다.

이미 이 모든 상황을 아는 장인호 사장이 직접 유능한 변호사를 붙여줘서 관련 소송을 진행해줬다.

행방불명인 아이들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란 작자의 친권 정지가 되면 바로 이어서 내가 남매들의 후견인 신청까지 할 예정이었다.

어떤식으로든 이 아이들과 연관이 됐고, 도저히 아이들을 보호시설 같은 곳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기묘한 동거. 아이들이 걱정돼서 나도 화실에서 자는 중이었다.

가끔 어머니가 내게 큰일 했다며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워 해주셨고. 아이들을 위해 수시로 방문해 음식을 냉장고에 채워 주셨다.

현주도 전에 없이 자주 화실에 와서 애들을 봐주는 중이었고.

덕분에 세화와 세호는 조금씩 웃음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화실에 돌아오니 내가 보던 [악의 기록] 대본을 보며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 먹고 사는 건 급한 대로 해결해놨지만, 온종일 이 좁은 화실에서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심심했을까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얘들아, 그거 대본 19세 대본이야 이리 내!"

세화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줄 알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니들, 안 되겠구나?"

애들의 정서상, 마음껏 즐기고 놀 공간이 필요했다.

수한이형 집(?)으로 플스와 엑스박스를 배송시키며 애들한테 말했다.

"따라와. 아조씨가 좋은데 데려가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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