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1화 (52/121)

51. 내 안에 흑염룡

51.

이수한은 스스로 장르영화 감독이라 생각했다. 예술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토요일 저녁에 했던 토요명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린시절 토요명화에서 해주던 영화들. 액션, 전쟁, 스릴러, 범죄 영화 등등.

브루스 윌리스. 이소룡, 스티븐 시걸, 장클로드 반담, 아널드 슈워제네거, 이연걸, 성룡 등의 액션 스타들.

그들을 보고 자란 이수한이다.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영화를 좋아했다. 장르영화, 그중 액션영화에 심취한 한 천재가 다시 액션영화를 찍는 꿈을 꾸는 건 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태프로 촬영장을 전전한 게 5년. 어느 촬영장에서는 조감독. 어느 촬영장에서는 소품팀. 군대를 전역하고 영화판에 들어온 이수한에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수한은 전 재산을 털어 넣어 영화를 찍었다.

영화판 관행처럼 내려오는 쥐꼬리만 한 일당. 촬영이 없을 때면 지하철 공사판, 골프장, 빌딩 건설 현장, 아파트 건설현장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해서 모은 돈이었다.

거기서 만난 한 배우.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한 영화를 가지고 수 시간을 대화할 사람을 만났다.

영화적 동지이자 위태로운 동생.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배우. 그러면서도 모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남자.

인간적으로, 남자로서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동생이 추천한 각본을 보고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폭력의 사슬]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그래서 차기작은 좀 새로운 영화를 찍고 싶었다. 액션, 모험, 판타지 뭐 그런거.

하지만 좋은 동생이자, 멋진배우가 내민 각본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악의 기록]을 읽는 순간 들었던 생각.

사회가 개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면 어떨까? 제도권에서 외면당해, 해결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한 개인은 어떤 행동을 할까.

각본을 보고 주제가 떠오르자마자 써내려간 [악의 기록]의 각색.

이수한은 각색작업 말미에 감독으로서 결론을 내렸다.

상실.

시스템, 폭력, 그리고 상실.

[악의 기록]은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말이다.

이수한은 완성한 각본을 두고 유일한 영화적 동지를 불렀다.

어떠한 지적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의 진보적인 영화적 관점은 항상 이수한을 놀라게 했으니.

그런데 그 유일한 영화적 동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아니, 화가 났다.

배신감이 들었다.

'배역을 달라고?'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기획의도, 주제의식을 깡그리 무시한 요구다.

친분을 위시한 말도 안 되는 청탁.

이수한은 감독으로서 분노하였다.

우정을 시험받는 느낌이 불쾌했기에. [폭력의 사슬]에서 진 부채감에 기대 저런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니 지금 눈 앞의 배우가 그 멋졌던 남자와 같은 인물이 맞나 싶었다.

그리고 형으로서 서글펐다.

이수한 자신은 좋은 형보다 좋은 감독이 우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제와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침묵이 있었다.

이수한은 '꺼져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다음에 보자'정도의 말로 순화하여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무엇이 선입니까?"

너무도 잘 아는 대사가 흘러나왔다.

사회 시스템이 행사한 폭력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대사.

법에게서 버림받고 윤리를 상실한 남자였다.

기댈 곳 없는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이 '선(善)'이냐는 고리타분한 물음뿐이었다.

각본을 쓴 이수한만이 알고 있는 이러한 의도.

앞의 배우는 이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대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실'.

세상에 저만큼 상실을 가져본 사람이 있을까 싶은 자의 연기.

아니 애초에 연기이기는 한 걸까 의심이 되는 연기였다.

'너는 무엇을 잃었기에 이런 연기를 하니?'

저 배우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감독은 없을거라 자신했지만, 이수한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음은 깨달았다.

친한 동생이 아닌 한 배우가 만화방을 빠져나갔다.

좋은 형이 아닌 감독은 냉정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영화에서 '상실'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어 경수야 난데."

-어 형! 아니지 사장님. 하하 영 입에 안 붙네. 싸장님! 각본 잘 받았어요. 이대로 캐스팅 진행할게요.

"아니, 프로젝트 진행 잠시 중단하고, 그 각본 버려. 다시 쓴다. 당분간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고."

-뭐? 씨발 형 좀! 기획사 미팅 다잡아 놨는데-

"억울하면 니가 사장하던가."

'탁'

폴더폰을 거세게 닫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이수한.

키우던 조감독몬이 제작자몬으로 진화 성공했음에도 후배몬 트레이너인 그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방금 이 자리에 있던 배우가 한 대사 때문이었다.

'무엇이 선입니까?'

주제의식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놔두고, 감독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은 '선'이라, 옳은 행동이라 할 수 있는가.

이수한은 기존의 대본을 삭제하고 다시 각색작업을 시작했다.

주인공은 20대의 북파공작원, 누나와 조카를 잃은 남자였다.

***

나는 메소드연기를 싫어한다.

감정 변화에 민감하고 감정감응에 탁월하지만, 지나친 몰입으로 나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메소드 연기와 분석적 연기법을 섞어서 사용한다.

하지만 방금의 대본은 나를 배역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딸과 부인을 잃었던 남자의 이야기.

각본을 처음 읽었을 때 그 느낌. 마치 내 이야기 같아서 분석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읽고, 배역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과정이 생략되고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질러버렸다.

이 배역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라고.

각본을 읽고 캐릭터의 슬픔이, 괴로움이, 감정이 마치 내 것처럼 내 몸을 채웠다.

다만, 연기 때 올라온 감정이 추슬러 지지가 않는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며 연기했기에, 그때의 회한과 슬픔이 갈무리 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내가 연기로 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해줬던 이 능력이 또 나를 파괴했다. 변화된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수없이 반복했다.

회귀 이후 억눌러왔던 감정의 벽이 대본이라는 재해에 무너져 버렸다.

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온 감정은 내 속을 헤집었다.

집까지 가는 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집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수와 같은 냉장고에 있는 소주. 간신히 참았다. 마시면 취할 것 같았고, 취하면 무슨일을 할지 스스로도 예상 할 수 없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의 손처럼 덜덜덜 떨며 소주가 아닌 물병을 쥐고 계산대 앞으로 섰다.

한 남매가 계산하고 있었다.

'띡'

"어 손님 이 카드 한도 초과 나오는데요."

봐서는 한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될까 싶은 여자아이와, 그보다 더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

다정하게 손잡은 두 남매는 허름하고 낡은 옷을 입었다.

"세호야, 과자 이것만 빼자. 응? 누나가 다음에 사줄게."

초등학생이라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 어른스러운 말투. 초등학생 여자아이는 마치 어머니의 말투처럼 동생을 달랬다.

바구니에 담겨있는 물건들은 햇반, 3분 카레, 등 딱 두 사람이 한끼 먹을 정도만 담겨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하나 담긴 과자를 조심스럽게 빼며 여자아이가 말했다.

"미안해 누나가 꼭 다음에 사줄게."

그러고 다시 계산했지만.

'띡'

"하··· 한도 초과요."

짜증석인 편의점 직원의 한숨과 눈에 띄게 당황하는 여자아이.

햇반과 카레 두 개를 들고 고민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수한의 만화방에서 있었던 일도 있었고.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기에.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을 했다.

쓰고있던 마스크를 눈 아래까지 치켜 올리고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 아저씨가 좀 급해서 그런데 아저씨가 이거 같이 계산해 줘도 될까? 그리고 동생 과자랑 너도 필요한 거 몇 개 더 집어 올래?"

쭈뼛거리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이러고 가는 여자아이.

번거롭게 거절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좀 힘든 애들이구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리고··· 생각을 삼켰다. 더 생각하면 못 버틸 것 같았다.

남자 동생이 과자 몇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조금 뒤 여자아이가 들고온 물건.

생리대 하나랑 두루마리 휴지 하나.

그걸보고 뭔가 머릿속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얘들아 잠시만."

선그라스를 안 끼고 온 게 좀 후회가 됐다.

눈앞이 뿌예져 앞이 잘 안 보였다. 내가 뭘 샀는지도 모르게 그냥 닥치는 대로 편의점 물건을 쓸어담았다.

과자, 김, 샴푸, 치약, 칫솔, 카레, 짜장, 초콜릿, 라면, 햇반, 햇반, 햇반···

아 씨발 편의점 바구니는 좆 같이 작아서 몇 개 안 들어가자나.

무슨 생각으로 뭘 샀는지 어떻게 계산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계산을 끝내고. 편의점을 나왔다.

이미 애들 손도 모자라 내 양손까지 짐이 꽉 찬 상태였다.

"아저씨가 집 근처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너희 집 근처까지만 가자. 아저씨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 저기 사거리 안쪽 지우분식 아니?"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아이.

"거기 김밥 맛있어요."

그나마 좀 더 밝은 남자아이가 양손에 든 봉투가 기쁜지 기분 좋게 대답한다.

"아저씨 거기서 일하거든? 배고플 때 언제든지 오고··· 일단 집 근처까지만 가자."

그렇게 아이들과 간 곳은 잠시 지네기로 한 투룸에서 멀지 않은 판자집이었다.. 지우분식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고.

"어··· 아저씨가 지우분식 사장님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배고프면 밥 먹으로와. 알았지?"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매.

"감사하기는··· 오늘 아저씨가 너희한테 뭘 해줄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워. 내가 고마워. 진짜···고맙다."

그렇게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집 대신 화실을 찾았다.

이정도면 오래 참았던 것 같다.

현주와 어머니가 모르는 내 슬픔. 그리고 아무도 알아선 안 되는 내 어둠.

항상 밝고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 또한 연기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됐다.

전에 없이 많이 울었다.

울면서 그림을 그렸다.

딸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

일주일쯤 지났나. 이수한이 건조한 말투로 전화했다. 다시 한번 만화방 오라고.

쳇, 내가 오라면 가야돼?

가야지··· 감독님이 오라는데 가야지···

도착하자 마자 이수한은 내 앞으로 각본 하나를 툭 하고 던졌다.

"야 인마, 이럴 거면 좀 미리 이야기해라. 두 번 일 하게 하지 말고."

"아이고 감독님, 배우 나부랭이가 어찌 감독님의 작가적 영감에 조언하겠습니까. 주는 대로 읽어야죠."

"그런 새끼가 그런··· 어휴 아니다. 읽어봐."

다시찾은 이수한은 다시 좋은 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대본은··· 좋은 감독이 쓴 각본이었다.

"캐스팅은?"

"너랑 예기성 선생님 둘 잡고, 파이낸싱 되는 거 봐서 재벌 악역이랑 조카역 캐스팅해야지. 일단 악역은 기획사에 배역제안 돌려보고 조카역의 아역은 오디션 해보려고."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집어치워, 그만해 인마."

"하하, 알았어 형."

[악의 기록] 각본이 완성되고, 스튜디오 나우로 넘어가 본격적인 프리프로덕션이 진행 됐다.

***

며칠 후 오랜만에 방문한 스튜디오 나우에서 [악의 기록]에 관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집과 화실을 구매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외한 잉여자금 모두를 [악의 기록]에 투자했다.

만류하는 경수형과, 이수한.

겉으로 봤을 때는 내가 꼬드겨 제작사부터 영화까지 찍게 됐으니, 나도 전 재산을 투자해서 정성을 보이겠다. 그런 의미로 해석됐던 듯 했다.

어··· 그런 거 아닌데.

나 돈 벌어야 돼! 어딜 니들 좋은 일만 하려고.

5억 원 투자 계약을 하고, 바로 이어서 주연배우로 계약까지 끝냈다.

경수형과, 김주하 본부장의 말로는 [악의 기록]의 제작비는 총 40억 정도 예상한다고 했다.

이전 [폭력의 사슬]로 달달하게 꿀을 빨았던 SJ엔터테인먼트가 배급계약과 동시에 10억을 투자했다.

거기에 이전[악의 기록]에 투자했던 투자자 중 투자금을 빼지 않은 투자금 10억.

총 제작비 40억 원 중 25억 원이 이미 투자가 완료된 셈이었다.

남은 투자금도 아마도 나와 예기성 선생님의 출연기사가 뜨면 유치에 문제 없을 거라 했다.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때 내 전화로 온 전화 한 통.

이정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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