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50화 (51/121)

50. 무엇이 선입니까?

50.

예기성과 낚시를 가기 위해 이수한과 윤경수 김주하에 나까지 다 모였다.

이수한과 경수형은 꽤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중 이수한의 설레발은 평소보다 더 심해졌다.

"와, 내가 진짜 예기성 선생님께 배역 부탁하러 갈 일도 생기고··· 대감독 다됐다. 진짜."

"아니, 감독은 배우랑 사적인 자리 안 가진다며? 이정건 선배랑 사우나 가자고 할 때는 빼더니."

"갈! 어딜 감히 이정건과 예기성 선생님의 이름을 한 문장에 담을 수 있느뇨! 무엄하다! 급이 다른데."

겨울에는 단벌 패딩+비니+카고바지+노가다 안전화 고정이었고, 만화방에 틀어박힌 이후로는 다 늘어난 러닝셔츠+운동복+슬리퍼와 한 몸처럼 살던 자칭 패션피플 이수한. 예기성과 낚시 계획이 잡히자마자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갔다.

그렇게 산 적당한 등산복. 이것도 경수형이 따라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휴고보스에서 정장을 풀세트로 사입고 낚시터 왔을 거라 했다.

선생님을 모시러 가기 전에 미리 이런 자리가 될 것 같다고 예기성 선생님과 장인호 사장에게 언질을 드렸다. 이수한이 캐스팅을 위해서 예기성 선생님을 뵙기를 원한다고.

소속사를 통해서 배역제안을 하지 않은 이유는 그 자리에서 이수한이 충분히 설명을 할 거고, 그자리에 김주하 전 실장도 참석하게 된다고도 말이다.

어린배우가 애써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모습을 좋게 봤는지, 혹은 이수한의 감독적 역량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김주하 전 실장이 온다는 이야기가 그의 흥미를 끌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김주하는 청운에서 인정받는 직원이었고, 예기성 선생님의 로드매니저로 일을 시작했기에 두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호 사장도 예기성 선생님께서 수락했다는 이야기에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사람이 좋아도 본질은 장사꾼인 그다. 충무로 초신성 이수한의 차기작에 관심 없을 리 없다.

기본적으로 이수한은 장르 영화의 감독이고, [악의 기록]이 무산된 상황에서 예기성 선생님과 작품을 한다면 승산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선생님을 모시고 양평 인근에 낚시터 딸린 캠프장에 도착했다.

김주하 전 실장이 선생님을 모시고 주변 한 바퀴 산책 도는 동안, 남은 [폭력의 사슬] 3인방은 텐트를 치고, 바베큐 준비와 낚시 준비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낚시. 경수형이 예기성 선생님에게 낚시 하는 법을 알려 드리고, 우리는 고기를 구우며 진짜 캠핑 온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기에 의도적으로 술을 배제하고 시작한 낚시.

김주하를 제외하고는 영화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제 김주하도 제작사 설립과 관련되기 시작했기에 아예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었고.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영화 관련 주제로 흘러갔다.

"그래, 이 감독 이번에 차기작 들어간다고."

"네. 아직 확정되진 않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내가 이 감독 작품 피프(PIFF)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폭력'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주 세련됐어. 개인과 개인이 나누는 폭력, 그리고 연쇄를 잘 표현했어."

여기서 새삼 놀란 게, 예기성 선생님은 그저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안목 자체가 뛰어나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번에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분석했다.

"아이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차기작에는 첫 작품에서 다 못 풀었던 걸 좀 더 풀어보고 싶습니다."

"허허, [폭력의 사슬]에서 다 못 푼 이야기가 있었나?"

"네··· [폭력의 사슬]이 개인의 폭력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줬다면 사회 혹은 시스템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과 상실에 대한 영화를 찍어 보고 싶습니다."

이수한의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이는 예기성.

"그래···? 우리 지우군에게 듣기로 차기작에 내가 출연하길 바란다던데, 그래도 출연을 결정하려며 내가 시나리오를 한번은 봐야 하지 않겠나?"

맞는 말이다. 사실 [악의 기록] 엎어졌다 해도 예기성 선생님께서 어디 갈 곳이 없겠나. 원한다고만 하면 언제든지 연기를 할 수 있는 분인데.

방금의 대화로 그의 영화적 식견 또한 보통이 넘는 것을 보여줬다. 이수한의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결정한단 말이었고.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미 대본은 다 보셨습니다.

"뭐라구?"

"제가 [악의 기록]을 한번 맡아서 연출해볼 예정입니다."

"그거 엎어졌다고 하지 않았나? 그 영화가 감독이 문제라 엎어진 영화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씨네게이트가 지금 새 영화를 진행할 형편이 아닐 텐데?"

아마도 이수한이 씨네게이트 감독으로 고용 됐을 거라 생각한 듯한 예기성의 말.

그때 김주하 실장이 들고온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어 예기성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간단하게 정리된 씨네게이트의 인수계획과 차후 작품 계획이었다.

"이수한 감독이 이번에 씨네 게이트를 인수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인수를 위한 기업평가도 진행되는 중이고요. 제작사를 인수하고 바로 작품을 들어갈 예정입니다.

씨네게이트 재정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니기도 하고, 씨네게이트에서 어느 정도 진행됐던 [악의 기록]이기 때문에 빠르게 시작할 수도 있고요."

제작사 인수 후 자금압박과, 투자유치 모두 한번에 해결할 방법.

이수한의 [악의 기록] 제작이었다.

이수한 또한 악의 기록 각본을 보고 연출 하고 싶다고 나섰고.

김주하 실장의 말을 듣고 난 예기성이 서류를 훑어보고 이수한에게 물었다.

"자네는 감독 아닌가? 감독 그만두고 제작사업 하려고 그러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감독하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저 돈만 내고 제작과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래? 음··· 감독 일 잘하고 있는 자네가 뜬금없이 제작사업을 하려는 이유를 모르겠구만. [폭력의 사슬]로 돈도 많이 번 친구가."

그때 이수한이 답변을 미루고 나를 봤다.

마치 이 답변은 니가 하라는 듯이 말이다.

자신과 대화하던, 이수한이 나를 보자 자연스럽게 예기성도 나를 보게 되었고, 이 자리의 모두가 내 입만 보게 된 상황.

내가 시작한 일이었고, 내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도 답변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왜 제작 사업을 하려 하는가.

"좋은 작품이지만 아직 발굴하지 못한 작품이 많습니다."

내 진심과 따로 노는 내 입.

"[폭력의 사슬]도 그랬지요. 모든 제작사가 거부한 작품. 만약 제대로 된 제작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여기 있는 수한이 형, 경수형과 항상 말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 [악의 기록]은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제작사를 인수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제작사가 붙는다 해도 감독이 온전히 역량을 발휘하게끔 환경이 만들어지기도 힘들고요."

앞으로 어떤 시나리오가 흥행할지 알고 있는 나만 할 수 있는 일. 내 커리어와 금전적 이득을 모두 취할 수 있는 방법.

"제2, 제3의 [폭력의 사슬]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행 할 작품을 찍으면 된다.

내 말을 들은 예기성 선생님께서 고개를 끄덕이고 한참을 고민했다.

"참··· 대견하네. 나도 영화에 대해 영화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지만 실천한게 없는데. 젊은 영화인들이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니 참··· 좋구만."

"혹시 그러면 출연을 하시기···"

김주하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애쓰는데 까짓것 못할게 뭐 있겠어. 주하야 소주나 한 잔 따라봐라."

마치 축배라도 들자는 듯이 기분 좋게 말하는 예기성.

낚았다.

대어.

***

예기성 선생님의 확답을 받고, 씨네게이트 인수는 급물살을 탔다. 구두승낙이긴 하나, 예기성 선생님께서 [악의 기록]에 합류하기로 한 이상 투자금 유치는 손쉬울 터였다.

자금 압박 없이 [악의 기록]을 제작 할 수 있는 배경을 가졌기에 제작사 인수에 뜸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몇주간의 지루한 협상과정과 실사를 마치고, 마침내 인수계약까지 끝냈다.

씨네게이트 사장은 불과 2년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시나리오를 검토받으러 왔던 감독에서 회사를 인수하러 온 인수자로 바뀐 이수한을 꽤 불편해했다는 후문이다.

사장은 이수한, 제작1팀 본부장 윤경수, 경영관리 본부장 김주하.

기존 사장의 친인척이 껴있던 몇몇 직원들은 내보냈다. 주요 인사를 보직 이동하고 그자리에 앉은 김주하와 경수형.

이수한은 직접 [악의 기록]의각색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작자로서 첫 작품을 맡은 경수형. 그는 각색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악의 기록] 프리프로덕션을 진행했다.

제작사 스튜디오 나우(NOW)가 설립 됐다.

***

간만에 방문한 이수한의 만화방.

나는 활동이 없어 그림만 그리고 있었지만, 이수한은 씨네게이트 인수 이후부터는 거의 만화방에서 꼼짝 않고 각색 작업만 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경영 관련 된 사항은 거의 김주하에게 떠넘기듯이 하고, 제작 관련 된 사항은 경수형에게 일임했다고 했다.

실질적인 회사 운영을 두 사람에게 맡긴 셈인데 이게 또 의외로 잘 돌아간다고.

이수한의 오른팔이나 다름없고 이수한과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는 경수형.

그리고 이수한과 인간적인 친분은 없지만, 회사 인수간 탁월한 능력을 보인 김주하.

사장이 없다시피 한 이 회사에서 두 사람이 회사 분위기를 주도 하다 보니 서로 견제 아닌 견제가 되고, 반대로 서로의 분야에서 시너지가 나는 것이다.

씨네게이트 인수를 권했고, [악의 기록]의 진행을 추천했던 나도 이수한이 각색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걸 알기에 먼저 연락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작품 진행되고 성공하는 거 좋은데 내가 남 좋은 일만 할 수 없잖아?

내가 자리에 앉자, 이수한이 대본을 건네며 말했다.

"읽어봐 어떤지. 후··· 생각보다 어렵더라고. 각색이란 게. 내가 쓴 각본이면 장면이랑 바로 떠오르는데, 남이 쓴 거로 하니까 바로 떠오르지가 않네."

내가 대본을 받자마자 담배를 무는 이수한.

며칠을 작업만 한 듯 이전에 봤을 때보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자신이 쓴 각본으로 영화를 찍었던 이수한에게 연출을 위해 각본을 수정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 야윈 모습에 그의 영화에 대한 집착이 만나 번뜩이는 눈. 그는 동네 형 이수한이 아니라 이전 [폭력의 사슬] 오디션장에서 만났던 감독 이수한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건네준 대본을 빠르게 읽었다.

그리고,

"형, 아니 감독님. 죄송한데 한 번만 더 볼게요."

갑자기 호칭이 바뀌자 피식 웃고는 다시 담배 무는 이수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각본이 부족하거나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처음 읽을 때 각본에 빠져 분석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읽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읽은 다음 각본을 내려놨다.

가슴이 쿵쿵 울리는 게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각본이 좋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캐릭터 때문이었다.

이수한이 내게 각본을 건넨 이유를 알고 있다.

[폭력의 사슬]부터 이어져 온 버릇 같은 거겠지. [해적왕]을 내게 보여준 것도 같은 이유고.

내가 각본 보는 눈이 좋으니까.

[폭력의 사슬] 때처럼 조언이라도 얻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각본이 완성 됐다는 소식을 듣고 온 난 조금 다른 생각으로 이 자리에 앉았다.

아마 이수한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악의 기록]에 20대 배우는 필요치 않으니까.

주인공은 30대 초중반. 그래서 박정태가 캐스팅된 것이기도 했다. 악역도 마찬가로 30대 초중반의 배역. 주인공을 쫓는 형사는 50대.

주요 배우 중 20대의 배우는 필요 없는 영화다.

그래서 이수한은 내가 대본을 내려두고 한 말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이 감독님. 주인공 역, 오디션을 진행해도 될까요?"

"어? 무슨 소리야."

피식 웃던 이수한의 얼굴이 점점 굳어간다. 장난끼 없는 내 얼굴을 보던 이수한은 급기야 언성을 높였다.

"야, 내가 아무리 너랑 친해도 이거랑 그건 별개지. 지우야 이건 좀 실망인데."

전에 없이 구겨진 그의 얼굴. 그곳에 친하고 좋은 형은 없었다. 그 대신 영화감독 이수한만 있었다.

그가 나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옅었다면, 당장에라도 욕하면서 꺼지라 했을 것이다.

차기작을 준비하며 탑스타 이정건과도 거리를 두던 그 아닌가.

차기작의 배역을 친분으로 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친분으로 얻을 생각은 없었고.

나는 그의 분노를 이해한다. 그의 가장 큰 영화적 동지인 내가, 친분을 이용해 배역을 부탁하는 이 상황이 화가 났을 것이다. 그것도 작품의 설정을 뒤흔드는 부탁을 말이다.

주인공. 그 배역 자체가 딸이 있는 30대 남성이니까.

잠시 이어진 둘 사이의 침묵.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며 내가 먼저 말했다.

"무엇이 선입니까?"

뜬금없이 침묵을 깨는 대사.

그 대사를 직접 쓴 이수한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바로 눈치챘다.

이수한의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기 전, 바로 대사를 이었다.

"저자는 이 사회를 좀먹는 버러지 일뿐입니다.

어린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는 회초리를 학대라, 폭력이라, 악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악입니다.

나는 복수입니다.

나는 내 딸과 아내를 죽인 저 버러지들과 함께 사그라질 그저 악인이며 복수자입니다. 비켜서십시오."

[악의 기록]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딸과 부인을 잃은 남자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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