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49화 (50/121)

49. 아낌없이 주는 정태

49.

이거 박정태 입대하면 면회라도 한번 가야 되나?

우리 현주 채용비리 기사는 박정태 호스트바 선수 때 사진으로 묻혔고.

박정태 병역비리 덕분에 [단군삼신기] 폭망, 그 반사이익으로 [저승카페]가 대박이 터졌다.

거기에 더해 멀쩡히 잘 굴러가던 [악의 기록] 프로젝트가 터지면서 판권+제작사까지 똥값이 됐다.

이정도면 뭐··· 아낌없이 주는 정태네.

[악의 기록] 촬영 끝나면 진짜 면회라도 가서 치킨이라도 사줘야 할 판. 선물로 내가 주연한 [악의 기록] 영화티켓도 줄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회사에서 [악의 기록] 프로젝트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간 이수한의 만화방.

이수한은 대충 널브러져 만화를 보고 있었다.

"수한이 형, 혹시 씨네게이트 라는 제작사 알아?"

"어? 왔나? 너는 애가 정이 없어요. '형님 안녕하십니까'가 먼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씨네게이트, 알긴 하지."

이수한은 진짜로 인사를 바랬던 건 아닌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기 괜찮아? 어떻게 아는데?"

"크크크, 나랑 경수가 거기 시나리오 들고 갔다가 까였으니까 알지. 아마 거기 사장 [폭력의 사슬]터지는 것 보고 배 좀 아팠을 거다."

"끝? 더 없어? 뭐 노하우가 많다던가, 직원들이 우수하다던가."

잠시 고민하는 듯 보던 만화책을 덮은 이수한.

그러곤, 다시 만화책을 들며 말했다.

"모르겠다. 투자금 끌어 오는 건 그냥저냥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스태프는 괜찮았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건 나보다 경수가 잘 알걸."

나는 바로 휴대폰을 들어 경수형에게 전화했다.

"형, 혹시 바빠요? 그 제작사 중 씨네게이트 알죠? 네네. 거기 한번 알아봐 줄래요? 좀 자세히요. 업계에서 어느 정도 되는지, 그리고 요즘 어떤지."

큰 줄기를 아는 게 중요했다.

제작, 감독, 각본 어느 정도 준비돼 있다. 돈 풀어서 [폭력의 사슬] 팀 끌어 와도 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투자.

그리고 잠시 망설인 끝에, 그동안 못했던 일을 했다.

김주하 실장. 아니 이제 자유인이 된 김주하에게 그동안 못 보냈던 답장을 보냈다.

나는 괜찮다는 말로 시작해 간단한 안부.

이후, 씨네 게이트의 재무제표를 알아봐 달라고.

그리고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말이다.

연예계에 정통하며, 명문대 경제학을 졸업했으며 국내 탑티어 투자회사에 근무한 경력과 동시에 엔터테인먼트의 에이전시에 경력을 가진 인물.

내 기억 속 블루클라우드 엔터테인먼트(현, 청운 엔테테인먼트)의 전문 경영인을 할 만큼 경영에도 유능한 인물.

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

김주하를 마냥 놀게 할 수는 없자나?

"수한이형, 경수형이랑 나중에 한번 모이자. 할 이야기 있어."

***

[저승카페] 이후로 현주는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다.

겨울 방학 내내 [저승카페] 대본작업을 한다고 정신없었고, 개강하고 난 뒤에도 거의 한 달이 넘도록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대본 집필에만 힘을 쏟았다.

결국 무방비한 상태로 중간고사를 맞이했고, 이번 학기가 통째로 망할 판이란다.

원래 대학생활은 3학년부터가 시작이라 조언했지만, 어딜 고졸이 대학생활에 토를 다느냐고 핀잔만 들었고, 얌전히 내 화실 한 쪽에 그녀의 책상을 주문함으로써 원만한 타협을 할 수 있었다.

"으어어, 전공선택 중 몇 개는 드라마 제작 핑계로 최소 학점은 보장해 준다고 교수님이 말했는데 교양은 진짜 답이 없네."

현주는 몇 개의 교양과목 책을 펼친 채 그 위에 엎어져 버린다.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는 현주. 벌써 참여한 작품이 3개나 되다 보니, 학교에 소문이 안날 수 없었다.

내가 백룡 영화제에서 그녀를 밝힌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현주가 채용비리에 연루됐고, 그 오해가 밝히기 위해서 내 여자친구인 현주가 각본가 현주임을 알리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덩달아 현주가 공중파 드라마에 각본을 쓰고 있는 게 교수들에게 알려졌다.

학교생활에 불편한 점이 생겼지만, 대신 몇몇 전공 선택과목은 수업만 들어가도 최소학점을 보장받는 배려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후에에엥, 요즘은 학교 안에 편의점도 다니기 힘들어. 동아리도 못 나간 지 한참 됐고."

"왜?"

"무수한 사인 요청 때문에···"

"오? 스타작가 다됐네?"

고개를 '홱'하고 들더니 나를 보는 그녀.

"내꺼 말고 니꺼!"

역시 그럼 그렇지.

그리고 그런 모습에 괜스레 미안해져 말을 보탰다

"학교생활 많이 불편해?"

내 말투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건 그녀의 평범한 생활이 망가진 건 내 탓이 컸기에.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끼기라도 한 걸까.

나를 보고 웃는다.

"헤헤, 그래도 너랑 같이 여기저기 데이트할 수 있어서 좋아."

그녀의 대답.

이런 점에서 그녀가 어른스럽다는 게 느껴진다.

학교생활이 '불편한가?' 혹은 '불편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의 대답에 현주가 어느 쪽을 대답해도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미안했을 것이고.

그런데 나와 함께 할 수 있어 좋다는 말로 완벽한 답을 해버린다.

잠시 텀을 두고, 그동안 궁금했었던 질문을 건넸다.

"으응··· 그런데 그 개새끼라는 사람은 요새도 연락 와?"

이 모든 사건의 시발··· 점 같은 녀석.

그녀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거에 지분이 좀 있는 녀석이다.

현주를 스토킹하던 녀석 말이다.

"응? 그러고 보니 영화제 이후, 만나자는 소리를 안 하네. 계속 추근대더니. 지가 재벌 3세라나 뭐라나."

"다행이네. 그래도 이제 연락 안 온다니."

이번에 터진 채용비리 기사.

바뀐 역사에 맞춰,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솔직히 나도 많이 놀랐고.

그녀를 지킬 근본적이 힘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아주아주 많은 돈··· 같은 거 말이다.

방송사를 하나 살 정도로 큰돈 정도?

***

며칠 후, 김주하를 데리고 이수한의 만화방을 찾았다.

김주하를 설득한 끝에 이번 제작사 인수간, 투자자문을 맡아주기로 했다.

"수한이형, 경수형. 인사드려 이쪽은 김주하 실장님. 우리 제작사 인수 투자고문 맡아 주실 거야."

김주하를 마땅히 소개할 직책이 없어서 그냥 이전 부르던 대로 실장으로 소개했다.

"아? 그때 그 병역비리 그분? 으엌,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수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박경수입니다."

혼자 만화방에서 몇 개월쯤 내버려 뒀더니 사회성이 박살이 나버린 이수한. 필터링 없이 그대로 말해버렸다.

"어··· 김 실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저 형 원래 저래요. 본바탕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하하, 아닙니다. 뭐 사실이니까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혼자서 만화만 보고 살다 보니 생각하는 대로 말이 바로 나가버리네요.."

그러면서 뒷머리를 긁적인다.

어휴···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형 같으니라고.

사람은 참 좋은데···

네 명이 마주앉아 각자 조사해온 시네게이트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일단 회사는 괜찮아요?"

내가 묻자 경수형이 조사해온 내용을 말해줬다.

"메가 히트한 [밤의 대통령] 알지? 그 영화 한 5~6년 됐나? 그거 만들었던 회사야. 재작년까지는 괜찮았어. 두 개 개봉하고 하나 중박 하나 쪽박. 그런데 작년에 두 개 개봉한 게 좀··· 심하게 망했어. 둘 다 손익분기점 못 넘겨서 그때부터 회사가 좀 삐걱거리기 시작했나 보더라고."

경수형이 [밤의 대통령]을 언급하자 씨익 웃는 이수한.

내가 [폭력의 사슬]오디션때 연기 했던 게 [밤의 대통령]이니까. 조직폭력배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영화. 이수한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SJ엔터에 혹시나 해서 전화해봤는데, 자기네 회사로도 씨네게이트 인수하지 않겠냐고 제의가 들어왔다더라고. 가격은 말 안 해줬지만.".

어쨌든, 작년부터 삐걱거리던 회사가 이번 [악의 기록] 제작이 터지면서 그 리스크가 감당이 안돼 매물로 나온 상황이었다.

"만약 인수한다면 얼마 정도 필요할까요?"

내가 김주하에게 묻자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답했다.

"자기자본 29억 8천만 원에, 부채가 6억 5천. 36억 3천 정도 자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채승계조건으로 인수하신다면 30억쯤 들겠네요. 작년 매출 약 70억, 순이익 약 10억.

사실 비상장기업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가진 총알이 딱 30억쯤이시라 했는데 인수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바로 투자자를 모집하지 못하면··· 버티기 힘들겠지요."

"저 제작사 사면 영화 맘대로 찍을 수 있는 건가?"

"어. [해적왕] 빼고."

질문을 한 이수한과, 그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칼같이 커트하는 경수형.

크··· 옳게 된 제작자의 모습이다.

30억짜리 제작사··· 사실 말도 안 되는 헐값이다. 저정도 사이즈 제작사라면 상장시켜 팔았다면 100억 원도 더 받을 수 있는 회사였다.

박정태가 애써(?)준 덕에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딜을 걸어 볼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투자금이라면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어."

"뭐? 어떻게?"

"영화 펀딩에 가장 중요한 게 뭐겠어?"

"각본이랑, 스타 마케팅?"

"그렇지. 그리고 시네게이트에는 얼마 전 계획이 나가리된 [악의 기록]이란 각본이 있지."

그때 김주하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예 선생님!"

그렇다.

거기에 더해 충무로 슈퍼루키 이수한 감독. 1억으로 100배 매출과 각종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휩쓴 이수한의 차기작.

거기에 이미 대본 숙달이 끝난 예기성 선생님을 더한다면.

이 정보가 사실이 되어 풀리며, 투자자나 투자금을 구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선별하는데 시간이 더 걸릴 걸.

"야, 그래도 내가 연출하는데 예기성 선생님이 하신다고 할까?"

업계 대선배이자, 대배우인 예기성. 그 이름값에 이수한이 눌린 만하다.

하지만.

하게 끔 만들어야지.

"수한이형, 경수형. 그리고 김 실장님 혹시 낚시 할 줄 알아요?"

좀 거물을 낚아야 하는데···

***

예기성에게는 너무 익숙한 촬영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넘게 해왔던 커피 광고 촬영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어린 후배와 촬영하는 날이기도 했다.

대견한 후배.

어린 녀석이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에서는 완벽한 주인공의 모습을.

최근 드라마에서는 또 도발적인 조연의 모습을.

주연 배우 이정건 또한 절대 모자라지 않은 배우임에도 넘어설 듯 말듯 줄타기하며 선을 넘지 않는 연기를 보여줬다.

흡사, 나이 많은 선배 배우가 후배 배우를 이끌어주듯 보조 맞추어 하는 연기.

그러니 오늘 광고에서, 나를 상대로는 뭘 보여줄지 기대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나.

한편으로, 배우랍시고 광고 촬영을 우습게 여겨 대충 준비했다면 엄하게 혼을 낼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감독의 사인과 함께 시작한 촬영.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의 배경과 유사한 카페 형태의 세트.

그 안에 마치 잘 훈련된 바리스타처럼 서 있는 청년.

콘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움직임과 대사.

그리고, 거기에 상황을 부여하고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서사가 스며든다.

"선생님 오셨어요?"

마치 은혜 입은 은사를 오랜만에 만난듯한 반가운 표정.

"향이 좋은데?"

"한잔 타드릴까요?"

정성을 다해 커피를 만드는 청년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창가에 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는 두 사람.

"변하지 않네요."

"그러게···"

- 세상에 없던 커피. 렉심 선물세트.

마지막 나레이션과, 후시녹음까지 끝났다.

예기성은 어린 후배가 혹시라도 광고를 경시할까, 걱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대본과 콘티에서 표현되지 않았던 세세한 감정과 서사의 틈을 완벽하게 분석해온 것이 느껴졌다.

예기성은 그저 후배가 만들어 놓은 서사를 편안하게 따라갔다.

항상 영화계 대부, 선생님의 위치에서 연기 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저 어린 후배는 '존경'과 '감사'라는 무형의 가치를 짧은 광고 안에 완벽히 구현 했다.

'선물세트' 홍보라는 광고주의 니즈까지 완벽하게 충족하면서 말이다.

곰곰히 방금 촬영을 되새김하고 있는데 그 후배가 다가왔다.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마치 아까의 연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혹시 낚시 한번 가시겠습니까?"

예기성은 즐거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이번에는 라면 3개 끓여라. 두 개는 적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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