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제가 안 괜찮아요
47.
며칠 뒤. 박정태에 관한 수십 개의 기사가 한 번에 올라왔다.
[배우 P 모 씨는 전직 호스트바 선수?]
[(칼럼)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도덕적 해이. 이대로 괜찮은가]
박정태가 호스트바 선수였다는 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밝히기 위해 기자에게 제보할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서 박정태는 [단군삼신기]에 중도하차 한 뒤, 바로 입대. 이후 복귀를 위해 이런저런 배역을 알아보던 중 호스트바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고, 배우로서 이미지가 박살 나며 완전히 필모그라피가 끊어진다.
그런데 검찰청에서 박정태의 태도. 과거 박정태가 출연했던 드라마의 경쟁 드라마가 유사한 형태로 망했다는 점. 칠성 엔터테인먼트가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신이 들었다.
이 새끼들이 범인이구나.
김범을 통해 사진을 입수하자마자, 익명으로 언론사에 제보했다.
덕분에 현주의 채용비리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도 거의 사라졌다. 일단 KBC에서 해명해준 것도 있고, 내가 기자를 깡그리 고소한 것과 박정태의 '호스트바 선수' 이슈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묻혔다.
찌라시로 흥한 새끼, 찌라시로 망했네.
안타깝지도 않다. 나에 대한 공격이었으면 동업자 정신이라도 발휘해서 이렇게 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주를 걸고 넘어졌으면 책임을 져야지.
현주가 내 전부인데, 박정태도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겠나.
사실 호스트바 출신이었다는 사실보다 찍힌 사진이 충격적이라 완전히 매장당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어우야, 다시 봐도 흉하네.
얼굴은 모자이크가 됐지만, 기자들이 고의적으로 퍼트린 원본이 각종 커뮤니티에 돌고 있었다.
이걸로 박정태의 연예계 생활은 끝이라고 봐야지.
회사 컴퓨터로 그렇게 기사를 확인하고 있을 때 김주하 실장이 다가왔다.
"지우 씨 시간 되세요?"
"네? 네."
현주의 채용비리와 나의 병역비리 기사가 뜬 이후로 제대로 집에 못 들어갔는지 초췌한 몰골이었다.
[저승카페]촬영은 중지되지 않았다. 나와 다른 배우들의 촬영을 서포트 하면서 이번 일까지 대응하느라 업무량이 많이 늘었을 것이다.
이제 겨우 기사들이 내려가고, 화제가 다른 쪽으로 쏠리고 있으니까.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회사의 휴게실이었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아뇨, 오늘 촬영 있어서 물이면 충분해요."
물 한잔과 커피 한 잔을 뽑아온 그가 내 앞에 앉았다.
"음··· 원래라면 좀 더 일찍 말하려 했는데··· 요 며칠 너무 바빠서 말을 못했네요. 아마 지우 씨 담당이 바뀌게 될 겁니다."
"네?"
"이달 말까지 일하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사장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고요."
"혹시 이번 일 때문에 그러신 거라면, 제가 괜찮다 하지 않았던가요?"
김 실장은 회사와 관계된 로펌과 이미 상담을 마쳤다.
로펌에서 나온 변호사의 말로는 병역법 위반에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에 아마 기소 자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소 된다 해도 기소유예나 무혐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이미 병역비리로 전•현직 프로 운동선수와 연예인 수십 명이 혐의가 확정되었다.
이 조사만으로도 벅차, 김주하 실장처럼 금전거래가 오가지 않은 사람은 기소 자체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회사차원에서도 엄중처벌(구두경고)하여 징계하기 위해 근신(무급휴가)을 하기로 결정했었고.
일단 내가 괜찮았다. 병역비리에 내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화제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검찰청 출두부터, 해명의 과정이 드라마틱 했고, 거기에 더해 현주의 채용비리의 이슈까지 시너지를 일으켰다. 나와 현주의 오명이 벗겨지는 과정 자체가 화제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검찰청에 출두하지 않았다면 박정태가 현주를 공격한 당사자라는 것도 알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었나 보다.
"제가 괜찮지 않네요. 사실 이렇게 화제가 될 줄 몰랐어요. 그리고 몰랐다는 말로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었고요. 지금이야 드라마도 끝나지 않았고, 아직 정리도 다 되지 않아서 남아있지만 끝나는 대로 정리하고 회사를 나갈 생각입니다."
"아··· 아쉽네요. 그동안 잘해주셨는데."
김주하 실장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없이 담담히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결심을 굳히 것 같아 더 잡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고.
사실, 이 바닥에서 정상적인 군 복무 마치고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짜 톱스타들은 가지고 있는 화제성만큼 군대 2년이라는 리스크를 가지고도 복귀에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애매한 애들은 일단 면제 견적부터 받는 곳이다.
진짜 연예인의 군 복무가 당연시된다면 연예인이 입대할 때마다 카메라 수십 대가 따라다닐까?
이번에 박상필이라는 작자가 크게 사건을 벌여서 화제가 됐지만, 박상필 이외에도 병역 면제를 전문으로 하는 브로커는 여전히 존재했다.
안걸린 연예인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런 제반 사항을 꿰고 있는 김주하 실장 입장에서 장래성 있는 소속배우 군 면제가 관심 갔을 테고, 혼자서 해볼 만 하다 싶었을 것이다.
"이번 건,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로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주하 실장은 일어나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고생하셨어요."
"네, 그런데 뭐 당장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하. 지우 씨 [저승카페] 끝날 때까지는 계속 보기 싫어도 보셔야 해요. 어쨌든··· 후련하네요.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는데."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
검찰청에서 내가 조사를 받고 난 며칠 뒤, SJ언터테인먼트에서 극장 수익이 정산되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이수한에게 연락이 왔다.
검찰조사간 고생했다며, 두부김치(?) 만들어줄 테니 만화방 인테리어가 끝나는 대로 시간 나면 놀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검찰에 갔다 온 것과 두부김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수한과 경수형에게 들어야 할 대답이 있었기에 일부러 빠르게 날짜를 잡았다.
그 소식을 들은 현주도 함께 가자 하였고, 결국 김범까지 포함되어 [폭력의 사슬] 회식 겸 이수한의 집들이가 되었다.
실제로 다시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오랜만에 다시 찾은듯한 만화방.
한 달여 만에 다시온 만화방은 더는 만화방이라 부르기 힘든 곳이었다.
책장을 다시 맞췄는지 깔끔하게 배열된 책장과 칸막이로 구분된 주거공간. 그리고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영화를 볼 수 있게 따로 만들어 놓은 공간까지.
이수한이 작업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었다.
이게 플렉스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리 깔아놓은 상 앞에 앉았다.
손수 두부김치를 만들고, 나머지 음식은 배달음식으로 채운 음식들.
그 주위로 오랜만에 [폭력의 사슬]팀이 모였다.
"와, 오빠 여기 진짜 좋다. 나도 여기서 작업해도 돼?"
"작업은 무슨 너 만화 보려고 그러지? 권당 300원. 소설은 700원. 시간으로 계산하시려면 시간당 1000원 주시면 됩니다. 고객님."
장난치는 이수한과.
"와, 이 아저씨 뒤통수 치는 거 봐. 우리 [폭력의 사슬] 각본비 다시 한번 계산해볼까요? 그 각본에 1/3은 제 지분 있는 거 아시죠? 나 새 각본 나오면 이태환 감독님한테 가야지 오빠한테는 절대 안 갈 거야."
받아치는 현주.
"어? 현주 씨 각본 나온 거 있어요? 거기 혹시 나 들어갈 자리 없나요?"
눈치없이 끼어드는 김범까지.
술자리가 시작되고, 웃고 떠들고.
나는 음료수 몇 잔만 마시며 가만히 보고 있었고.
현주도 그동안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는 듯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나도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늑하다고 할까?
그때, 경수형이 자리를 옮겨 내 쪽으로 앉았다.
그의 손에는 반쯤 남은 음료수 한 병이 있었다.
"오늘도 안 마실 거야?"
"네. 오늘은 마시지 않아도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네요."
그리곤 내 잔에 음료수를 따라주고 말했다.
"드라마 촬영은 어때? 할만해? 재밌더라 [저승카페]. 잘 보고 있어."
"아, 그거 다음 주면 마지막 촬영이에요. 내일이 14화 방영이었나? 원래 16부작인데 2부 추가 편성해서 다음다음 주까지 방영이고."
"시청률 1위라며. 축하한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작가랑 주연배우가 애쓴 결과죠."
"너답지 않게 웬 겸손? 이정건 안 잡아먹히려고 똥줄이 타는 거 다 보이던데. 크크."
실제로 이정건이 준수한 연기로 호평받고 있지만, 나와 현주의 이슈로 화제성이 더해져 '강림차사'의 캐릭터가 확 살아나긴 했다.
덕분에 추가 편성된 마지막 2개 회차에서는 내 비중이 늘었다.
근황 이야기가 끝나자 경수형은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 제작사 설립하는 거, 수한이형이랑 이야기는 해봤는데. 그게 하고 싶거든. 그런데 할 수 있을지가 좀 고민 되긴 해. 너도 알다시피 그게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일단 하겠다. 생각했으면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적당한 제작사 인수하던가, 새로 시작하려면 사람부터 모아야 할 테고요."
그리고 좋은 각본을 찾아야 할 거다.
박정태가 주연이 예정돼 있던, [악의 기록] 같은 거 말이다.
***
"선배님 커피 한잔하세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커피네요."
"어, 매번 고맙다, 지우야. 다른 촬영장 가도 니 커피 생각날 거 같다. 인마."
이정건은 커피를 받아 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벌써 저승카페 마지막 촬영이라니···
사실 이정건은 [저승카페]를 찍는다고 했을 때,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영화를 찍고 싶었지만 들어오는 시나리오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이 없었다.
그러던 중 만난 [저승카페].
대본이 좋았고, 캐릭터도 좋았다.
전에 없던 톡톡 튀는 설정에 잔잔한 감동과 로맨스가 있는 드라마.
거기에 잘 조형된 '백풍차사'라는 캐릭터.
할만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타사 드라마가 아무리 잘 나온다고 해도.
'내가 이정건인데.'
사실 이런 마음도 있었다.
작품이 좋다면 내가 이정건인데 이걸 못 뒤집겠나.
헌데,
'뒤집긴 뒤집었는데, 이걸 내가 뒤집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계속 났다.
커피 한 잔 건네고 자신의 촬영을 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저 배우.
처음엔 괜찮은 후배라고 생각했다.
당돌하고, 연기가 되는 후배.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드라마의 회차가 진행될수록, 존재감에서 밀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연습을 하고 촬영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어린 후배보다 나은 연기를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게 좋은 연기인가?'
마치 저 어린 후배가 질문을 던지듯 이정건이 준비한 연기보다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줬다.
채용비리 기사가 뜨고 난 뒤에서는 화제성 마저 밀린 느낌이 들었다.
'좋은 연기를 하고 싶다.'
자신을 괴롭히던 오랜 물음.
촬영장에 선 어린 후배의 연기를 가만히 지켜봤다.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지듯이, 문제의 해답은 문제 곁에 있어요'
마지막 대사마저 완벽하게 해내는 저 배우.
그 모습을 보며 이정건은 자신을 괴롭히던 물음의 해답이 어쩌면 자신 곁에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와~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사방에서 인사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 주 [저승카페]의 시청률이 28%쯤 됐다고 했지.
이번주차에는 30%를 넘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2주 결방하고 방영을 재개한 타사 드라마는 5~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압도적인 차이로 시청률 1위를 지켰다고 할 만했다.
그리고 그 성과는 모두 후배의 덕에 얻은 것이고.
어쩐지 패배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건은 한참 전에 다 먹어 버린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이 커피를 더 얻어먹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예를들어 차기작을 같이 하는 방법 같은것 말이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달려와 인사하는 어린 후배.
"어 그래, 수고했어! 너 이번 주말 뭐하냐?"
"네? 딱히 뭐 없습니다."
이정건은 누가 들을세라, 이지우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그래? 그럼 선배가 돈 쓰는 법 좀 알려줘야겠네. 현금 두둑이 들고 와, 흥청망청 놀아보자.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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