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46화 (47/121)

46. 잘가라

46.

9시 뉴스가 끝나자마자 바로 현주한테 전화했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었기에, 괜찮다는 문자만 보냈을 뿐 제대로 된 통화를 하지 못했다.

현주도 기사가 계속 올라왔었기에 많이 놀랐을 텐데.

나야 미래를 알고 충분한 준비가 돼 있었기에 대처를 했지만, 그녀는 갑자기 올라온 자신의 기사에 당황했을 것이다.

"괜찮아?"

-어··· 방금 뉴스 봤어. 괜찮은 거 맞겠지? 류 PD님이랑 유 작가님이 전화 와서 다 잘 해결 됐다고는 들었는데···

"어어, 다 잘 해결됐어. 그래도 한 며칠은 인터넷 보지 말고. 그것도 다 해결될 거야."

이미 9시 뉴스에 보도까지 됐을 정도면 KBC는 의견일치를 봤다는 이야기다.

주말 10시 드라마 타임에 경쟁자가 다 고꾸라진 상태. 드라마를 발로 만들어도 시청률 20% 먹고 들어갈 판이다. 거기에 더해 [저승카페]는 초반 화제성은 작았어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던 드라마.

기본 포텐셜이 있었던 드라마였는데 경쟁작들이 망하는 수준이 아니라 터져버렸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드라마 국장은 옷 벗어야지.

KBC도 계산이 끝났는지 확실한 푸쉬를 보여 줬다. 현주가 채용비리와 무관하다는 것을 9시 뉴스에 내보낸 것이다.

문제는 확대 양산되는 찌라시성 기사다.

이것도 곧 다른 불꽃에 집어삼켜 져 사그라질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치··· 또 내 기사 내리려고 뭐 꾸미고 있지? 다 알어. 이태환 감독님이랑도 통화했어··· 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시더라.

"감독님 고맙네··· 오늘 애써주셨는데. 전화도 주시고."

-응, 고마워. 감독님들, 류 PD님, 유 작가님 다 고마운데 니가 제일 고마워. 사실 오늘 온종일 걱정도 되고 내가 진짜 잘못한 게 아닐까 무서웠거든. 인터넷 들어가면 막 날 욕하는 기사가 올라와서. 그런데 통화하니까 좋네. 안심돼. 고마워.

"고맙긴 뭘. 당연한 거지."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냐! 당연한 건 없어. 니가 나한테 당연한 사람이 되는 건 싫어. 나도 너한테 당연한 사람이 되는 게 싫고.

그래서 고마워. 지금도 내 관련된 기사 없애려고 뭐 하고 있는 것도 고맙고.

내가 쓰고 싶은 글 쓰게 도와주는 것도 고맙고, 날 위해 애써주는 것도 너무 고마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아··· 저 말을 듣는데 뭔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와 당당히 함께 하기 위해 그녀의 존재를 공개한 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평범했더라면, 현주가 이지우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평범한 작가였다면 그런 기사가 났었을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을 수없이 했기에 나는 마음 한켠에 미안한 마음이 계속 있었다.

그런 나한테 고맙다니.

"당연한 게 뭐 어때서! 나는 너한테 당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당연히 니 옆에 있고 싶고, 당연히 널 돕고. 당연히 너 사랑하고. 나는 너한테 당연한 사람이 되고 싶어."

현주가 말하는 '당연하지 않은 사람'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 그래, 보통연애라면 그렇게 해야지. 사소한 것도 서로에게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애정을 지켜나가야겠지.

하지만.

나는 그 당연한 일을 못해서 전생에 그녀를 잃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에는 나는 현주에게 당연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르면 달려가고, 힘들면 지켜주고, 그걸 당연하게 하는 사람.

-어휴, 꼭 예쁜 말을 해줘도 이렇게 따지고 들어요. 일은 마쳤어?

그녀는 말은 저렇게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음··· 글쎄 조금 늦을 것 같은데?"

-퇴근하는 길에 잠시 집 앞에 올래? 내가 회사로 가고 싶은데, 사실 좀 무서워. 오늘 기사 올라가서 사람들 알아볼까 봐.

늦을텐데··· 그래도 그녀가 이런 부탁 자체를 한 적이 없기에 간다고 했다.

***

9시 뉴스의 효과는 굉장했다.

이미 내가 검찰청에 들어가는 사진은 움짤로 만들어져 '스윗가이 검찰청 런웨이' 짤이 만들어져 퍼지기 시작했고, 관련 기사들도 지속해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백룡의 '그녀' 이지우의 여자친구 '현주', 영화 각본가로 밝혀져]

[그 여자 각본, 그 남자 연기 화제의 커플. 이지우 박현주 커플]

[유일하게 살아남은 드라마 [저승카페]. 류창진PD, 유수영 작가 인터뷰]

따로 밝힌 적 없었던 내 아버지에 대한 내용도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고.

[배우 이지우 국가유공자 병역특례혜택자]

ㄴ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하신 건가?

ㄴ내가 듣기로는 특수부대셨다던데?

ㄴ특수부대원이 베트남 가서 전사하면 그게 베트남전 참전한 거 아니냐? 돌대가리야.

ㄴ아니, 그게 아니라 HID라고. 북파공작원. 이지우가 나이가 20살인가 21살인가밖에 안 되는데 베트남전이랑 시기가 안 맞지. 병신아.

ㄴ니가 어케 아냐.

ㄴㅇㅇ우리삼촌 사회부 기자. 검찰청 죽돌이임.

딱히 숨기고자 하지 않았기에 퍼져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기에 '시네르포'에서 이수한 이태환 감독들의 인터뷰까지 올라왔고, 현주의 경력이 재조명되었다.

[독립영화 최초 100만 관객 흥행의 영화 [폭력의 사슬]의 각본가 박현주]

여기까지···

여론이 반전된 것을 확인 후, 변호사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이태환 감독은 어설픈 실력이나마 다른 변호사를 도와주기 위해 와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감독님."

"하하 뭘요. 저는 전화 몇 통 돌린 게 다고, 저 친구들도 다 돈 받고 하는 건데요. 어우, 법대 자퇴하길 잘했네. 동기들 하는 거 복잡해서 뭐 도와줄 엄두가 안 나네요."

"진행은 바로 되는 건가요?"

"네. 저 친구들 말로는 월요일에 법원 문 열자마자 바로 소장 접수할 거라고 하네요."

"바로 내용증명 기자들에게 보내는 것까지 부탁합니다."

"네, 저 친구들이 다 잘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러고 몇몇 일을 처리한 후,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김범에게 전화를 걸었다.

"범아, 혹시 예전에 생활할 때 흥신소 하던 분도 알고 있냐?"

-알고는 있지.

"합법적인 곳 맞지?"

-뭐··· 불법은 아니지. 사업자 등록은 하고 있으니까.

"그럼 혹시 박정태, 뒤 한번 알아봐 줄 수 있냐?"

-어? 박정태? 왜? 또 깝치냐? 그냥 내가 가서 찢으면 안되냐?? 확 젓갈 담가 버리게.

"젓갈은 무슨, 그거보다 더 좋은 거 있어. 내가 재미있는 소문을 하나 알거든. 그쪽으로 한 번만 알아봐 주라.

-그런 거면 무조건 하지. 뭔데? 그 소문이라는 게?

***

김주하 실장과 장인호 사장에게 남은 일을 처리한다고 부탁한 뒤, 현주에게 가기 위해 로드매니저 이동수와 회사를 나섰다.

사실 배우가 이 정도로 돌아가는 상황을 체크하고 직접 대응방식을 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니, 없다고 봐야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의 무능이라고 하기보단, 앞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는 미리 대응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준비 자체가 틀렸다.

그리고··· 앞으로 20년후, 연예계에 크고 작은 이슈들이 많았다.

연예계 사업은 앞으로 규모는 커지고 고도화되고 전문화 된다. 그런 시대에서 탑배우로 살았으니, 지금 직원들이 아마추어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하면 내가 뛰어야지. 별 수가 있나.

"동수 씨, 현주네 집 앞 잠시 들렀다 갈 수 있을까요?"

"아 물론이죠. 오늘 화이트데이인데 사탕 주려고 그러는구나?"

아··· 조졌다. 집 앞 찾아오라고 했던 게 그런 이유였나?

"동수 씨··· 그 근처 사탕 파는 곳, 아니 편의점 아무 곳이나 좀 세워 주시겠어요?"

"헐? 지우 씨 아직 선물 안 샀어요? 음··· 지금 선물 살만한 데가 있을까?"

9시 뉴스를 모니터링하고, 몇몇 일의 뒤처리까지 끝내고 나오다 보니 이미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이미 백화점이나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고, 선물은 커녕 사탕이나 사서 줘야 할 판이었다.

최근 촬영이다, 뭐다 바쁘다 보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세 반해 현주는 2월 14일에 손수 만든 초콜릿을 예쁘게 포장하여 선물로 줬고.

아까 했던 통화처럼, 나야말로 당연한 듯 선물을 받고 돌려줄 생각을 못했네···

전생이었다면 이런 기념일이나 생일 등을 까먹으면, 바가지 좀 긁히겠네 하고 넘어갔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단 편의점이라도 잠시 세울까요?"

"네···"

이동수가 길가의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가서 사올게요."

"동수 씨, 제가 갈게요. 직접 고르려고요."

이동수가 가서 법인카드로 사온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제대로 준비도 못 했는데, 최소한 직접 고르고, 내 돈으로 사야지.

편의점 직원과 지나가는 손님 중 몇몇이 나를 알아봤다. 편의점 앞에 전시된 가장 큰 사탕 바구니를 계산하고, 차로 돌아가는 중 뒤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와! 현주는 좋겠다아아!"

아까 편의점에서 봤던 여학생쯤 돼 보이던 손님.

멀리서 소리치곤, 꺄르르 웃으면서 친구들과 지나가는 모습이었다.

피식 웃고 차로 탔다.

저런식의 응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고 편하게 현주와 함께 다닐 순간도 올 것이라고.

그러기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거고.

현주 집 앞에 도착해 전화하자, 곧바로 현주가 내려왔다.

멀리 아파트 공동현관에서 나오는 모습이 퍽 인상 깊었다.

야밤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누가 봐도 박현주였고 저 어설픈 변장까지 오히려 귀엽게 보였다.

현주는 내가 있는 밴으로 와서 문을 톡톡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자마자 하는 소리가,

"와! 너 난 줄 어떻게 알았어? 사생팬이나 안티팬이면 어쩌려고?"

고작 그런 변장 했다고 내가 널 모르겠냐.

"이 차에 내가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아!?"

"하··· 하하."

진짜 당황해 하는 그녀를 보니 긴장감이 탁하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기사를 확인하고 나서 부터 검찰청 조사에 9시 뉴스를 조마조마하게 보는 것까지.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를 보고 한번 웃었을 뿐인데 어깨 위에 있던 짐이 쑥하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선물. 화이트 데이."

"아··· 어··· 응. 고마워."

뭔가 어색한 그녀의 반응에 괜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봐도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선물이니까.

"좀 별로지? 우리 내일 백화점 갈까? 선물 사줄게. 사실 내가 요 며칠 정신이 없어서 선물을 생각 못했-"

"아니 아니! 그런거 아니야, 사실은···"

당황하며 내 말을 막는 현주.

그러면서 부끄러운 듯 내게 내미는 작은 상자.

예쁘게 리본까지 붙어있는 선물상자였다.

"아니 아까 집에 오는데, 편의점 앞에 막 화이트데이라고 선물 상자 쌓여있고 하길래 급하게 초콜릿을 만들었는데··· 생각해보니까 화이트데이는 여자가 받는 날이더라고. 근데 만들었는데 또 안 주기도 그렇고 해서."

아···

전생에도 그랬었지. 그녀는 화이트데이랑 밸런타인 데이랑 착각하기도 했었고, 두 날 모두 선물을 준비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귀찮게 왜 이런 걸 챙기느냐 생각도 했었지만···

선물을 주고 내가 좋아하는 그 모습이 좋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 저 어설픈 변장을 뚫고 나오는 기대에 찬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이 웃기는 상황에서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

[저승카페] 9화가 방영되어 전주대비 2배에 가까운 상승을 찍은 그 바로 다음 월요일.

계획대로 고소절차에 들어갔다.

소속사 차원이 아닌, 나와 현주의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고소가 들어가고,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그 정도가 심한 몇 개의 언론사를 고소했다.

박상필 리스트라는 거대한 이슈에 편승해 나와 현주를 노리던 기사들.

[이지우 역대급 고소에 들어가다. 허위기사를 쓴 기자 상대로 고소절차 진행]

[이것이 필요한 조치? 수십 명의 기자를 상대로 고소장 접수]

[기자를 고소한 이지우.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인가, 신개념 언론탄압인가]

ㄴ기자님, 변호사 고용하시고 기사 쓰는 것 맞죠?ㅋㅋㅋ

ㄴ용감하긴 한데, 병신 같기도 하네. 며칠 전까지 채용비리랑 병역비리로 죽일 놈 만들더니, 지들이 한건 생각도 안 하고 언론탄압 이 지랄.

ㄴ이지우 깡 존나 쎄네. 여자친구 건드렸다고 싸그리 고소해버리네.

ㄴ현주는 좋겠다!

괴벨스가 그랬지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가 필요하다'.

그럼 반박 대신 고소하면 된다. 그리고 고소한 내용을 기사로 만들고 다른 이슈를 만들면 된다.

잘잘못은 법원가서 따지면 되고.

내가 많은 변호사를 동원해 기사를 검토하게 한 이유는 기레기와 기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관계 확인은 물론이고,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의 범위 안에 들어온 선을 넘은 기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고 김범에게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ㅋㅋㅋ 메일로 사진 보내 놨다. 대박이네 이거.]

내 메일로 온 사진 한 장.

지금 기준으로 꽤나 촌스러운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박정태의 사진이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그냥 서 있는 사진.

다만,

술집에서.

옷 반쯤 벗고.

바지춤에 만원짜리 몇장을 꽂아넣은.

전직 호스트바 선수 박정태.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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