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45화 (46/121)

45. 강한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거다

45.

미리 안내받은 검사실에 들어갔다.

연락은 했지만, 원래 내가 와야 하는 날짜보다 빠르게 온 상황.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내 담당 수사관은 다른 사람을 먼저 조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티션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익숙했다.

"진짜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요. 수사관님, 저는 그냥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그 용액이 뭔지도 몰라요."

"박정태 씨, 이미 정태 씨 계좌에서 돈 빠진 거 확인했고, 그 돈이 신검장 군의관한테 흘러들어 간 것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군의관한테 단백질 용액 받아 소변에 섞어 '사구체신염' 으로 신체질환 면제 판정 받으신 거 인정하십니까?"

"저는 진짜 그 용액이 뭔지 모르고, 소변이 나오지 않아서···"

"박정태 씨! 장난하십니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인정할 것만 빠르게 인정하시고, 그냥 맘 편하게 군대 갔다 오세요 네?"

박정태를 여기서 또 만나네.

수사관과 박정태의 대화를 들으며 혼자서 피식거리고 있었다.

"휴, 정태 씨, 일단 식사하시고 다시 하죠. 이지우 씨? 와보시겠어요?"

박정태가 나오고 내가 일어서며 박정태와 눈이 마주쳤다.

김주하 실장의 말대로 박정태는 입구에서 기자들에게 꽤나 시달렸는지 낭패한 몰골이었다.

"어? 너 이 새끼?"

여전히 눈치가 없네.

웬만하면 업계 선배로서 대접해 줄 텐데 박정태는 도무지 정이 안 간다. 이제 뭐 선배 대접해 줄 일도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가려는데.

"너 이 새끼 여자친구는 조사받으러 왜 안 와?"

어? 이거 뭐지?

당연히 병역비리 조사받으러 온 거라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이 검사실에 오는 대부분 사람이 다 병역비리 조사 차 오는 건데, 왜 저 새끼는 나를 보고 병역비리가 아닌 현주를 먼저 떠올렸을까.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시나리오.

너구나 박정태.

백룡 영화제에서의 원한?

라이벌 드라마에 대한 견제?

뭐든 이제 상관없다. 심증이 확실시됐으니 물증만 잡으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수사관의 안내에 따라 앉았다.

"이지우 씨? 이지우 씨?"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아닙니다."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왜 이리 일찍 오셨어요."

"아··· 뒤로 스케줄이 많아서요. 드라마 찍는 중 이라서요."

"아···네."

일반적인 신상에 관한 조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박상필 언제 만났냐.

왜 만났냐.

서류를 건넨 이유가 뭐냐?

등등, 의도가 뻔히 보이는 질문들.

"수사관님 이거 피의자 심문이 아니라, 참고인 조사 맞죠? 저는 진짜 모르는 일이고, 그 서류가 왜 박상필한테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묻고 싶네요."

그리고 미리 가져 왔던 아버지의 국가유공자 증서 복사본을 내밀었다.

"그리고 저는 국가유공자 병역특례잔데 수천만 원을 써서 면제받으려 돈을 쓴다고요? 수사관님이라면 그런 무리수를 둘까요?"

수사관은 담담하게 내가 내민 서류를 확인하고 파일 철에 끼워 넣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고··· 혹시나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 할 시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류를 힐끗 보고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손에든 A4용지와 볼펜.

"아, 그리고··· [저승카페] 잘 보고 있습니다."

웃음과 저 제스쳐의 의미를 내가 확대하여 해석한 건 아닐 것이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 다시 못 볼 것 같은데 사인해 드릴까요?"

"하하, 우리 집 딸내미가 팬이라서요."

수사관 아저씨 아까는 모르는척하더니, 내 드라마 보고 있었나 보네. 수사관의 분위기와 조사내용을 봤을 때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 될 일은 없을 거라 확신이 섰다.

그야 당연히 금전거래도 없었고, 만난 적도 없으니까.

결정적으로 나는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면제 판정을 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박상필에게서 내 이름이 적힌 진단서가 나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피의자 신분이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은거고. 몇 번 떠보는 질문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반응이 없으니 돌려보내는 거라 예상했다.

돌아서 나가려 할 때, 사무실 한쪽 박정태가 국밥을 다 먹고 이를 쑤시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수사관님 저 새끼는 왜 그냥 가요?"

"박정태 씨! 조용히 하세요. 여기가 박정태 씨 집 안방입니까? 이지우 씨는 단순 참고인 조사로 방문한 것뿐이라고요. 피의자 신분인 박정태 씨와는 다릅니다."

내 옆에서 말하는 수사관을 지나쳐 박정태에게 다가갔다.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야."

***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김주하 실장은 나를 검찰청까지 안내하고 바로 사장실로 와서 내가 미리 부탁해놓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김 실장님 제가 요청한 것들 어떻게 됐나요?"

"네, 이수한 감독이랑, 이태환 감독 두 사람 인터뷰 씨네르포에 올라왔습니다."

현주의 능력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두 사람.

현직 감독 두 사람의 인터뷰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지우의 여자친구 '박현주'가, [민주를 기다리며]와 [폭력의 사슬]의 공동 각본가 '박현주'라고 말이다.

"[저승카페] 팀은 움직였나요?"

"네, 류창진 PD랑 유수영 작가가 입장발표 했습니다. 기사도 몇 개 떴고요."

거기에 류창진 PD와 유수영 작가에게도 사태수습을 위해 입장발표를 해달라 부탁했다.

보조작가를 둘 형편이 안되는 유수영 작가를 위해 KBC에서 PD 재량으로 현주를 고용한 거라고, 비용은 현주의 경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저렴한 비용이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영 반응이 없네요. 워낙 지금 병역비리에 채용비리까지 더해져서 지우 기사가 너무 올라와서 묻혀요."

사실 딱히 기대는 안 했다. 묻힐 거라 예상했고.

"정정보도 요청하지 마시고 기다리죠."

"네?"

"허위 추측성 기사 쓴 기자들 싸그리 고소할 거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죠? 기자를 고소한다고요?"

김주하 실장은 진짜로 놀란 듯이 반문했다.

"지금 해명기사나 반박기사 올려도 씨알도 안 먹힐 겁니다."

"그···렇긴 하겠죠."

"지금처럼 불타오를태 반박기사 100개 올리는 것보다 '이지우가 허위 기사를 쓴 기자 수십 명을 고소하다' 라는 기사가 훨씬 잘 팔릴 거란 말입니다."

"아!"

김주하 실장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혹시 이태환 감독 지인 변호사들이 회사에 와있는 것도 지우 씨 변호가 아니라 기자들 고소하기 위해서 모인 건가요?!"

"네. 사실관계가 어긋난 기사를 썼거나, 허위 기사로 명예훼손을 한 기사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포함된 기자들은 예외 없이 고소할 거고요."

우리 현주는 착해요.

채용비리가 아니에요.

우리 현주 능력 있어요.

이런 기사 수백 개 올려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

'배우 이지우, [저승카페] 명예훼손한 기자 수십 명을 고소하다'

이런 기사가 잘 팔린다. 그리고 배우 이지우가 명예훼손 당해서 억울하다는 뉘앙스만 남겠지.

언론사를 고소한다? 소송의 시간이 길어질뿐더러,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비효율적이고. 언론사라고 로펌이 없겠나.

그렇게 되면 로펌대 로펌의 싸움이 된다.

그런데 기자를 고소한다면?

개인대 개인의 싸움이 되는거지.

그리고 나는 승소할 생각이 없다.

기자들을 귀찮게, 괴롭게 그리고 압박할 생각이지.

그리고 언론사의 로펌들은 굉장히 정신없을 것이다.

"사장님. 우리 회사랑 연계된 로펌있죠? 거기 괜찮나요?"

"나쁘지 않네. 전 서울동부지검 검사장이 있거든."

"좋네요. 로펌 좀 움직여 주실 수 있나요?"

"그러라고 계약해 둔 것 아니겠나."

"사장님 혹시 이번 건, 가만히 있으실 거 아니시죠?"

"우리 소속사 식구를 건드렸는데, 가만있을 수 없지."

장인호 사장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언론사도 고소할 거거든.

***

상례를 뒤엎은 일이다.

연예인이 언론사를 고소한다?

혹은 엔터 회사가 언론사와 대립각을 세운다?

어딜 겁도 없이.

언론사가 마음먹고 잊을 만 할 때마다 부정적인 기사를 쏜다고 생각해보자.

지속적인 이미지 타격으로 몇 년 못 버틸 것이다.

반대로 화제성을 가지지 못하게 아무런 기사를 안 올려준다면?

마찬가지로 몇 년 못 버틴다.

언론 권력은 강하고, 연예인 하나 묻어버리는 거 정말 일도 아닐 거다.

그러니 연예인이 아니라 미친개가 되어야 한다.

물리면 '좀 아프네?'가 아니라, 한번 물리면 광견병 걸려 위험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내가 발작버튼 누른 것 마냥 이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전생에 저걸 못했다.

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기사가 났다.

내가 맡은 배역이 폈겠지.

이중계약 문제의 기사.

전 소속사가 계약서로 장난친 걸 마치 나의 문제인 건처럼 기사가 났다. 그래야 조회 수가 많이 나오니까.

소속사를 옮기며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기사가 터지기 10년도 전에 장인어른의 주식을 와이프 명의로 옮긴 것이다. 유산이었고, 세금도 모두 납부가 된.

연예인 불법 도박?

자기네 회사 보도국장이랑 100만 원짜리 내기 골프 친 걸 불법 도박으로 기사를 올렸다.

이런 새끼들이 언론사란 족속이다.

모두 고소해서 모두 승소했지만, 그 어느 언론사도 이를 다뤄 주지 않았다.

나는 불명예를 달고 살았고, 현주는 고통받았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

[박상필 리스트. 연예계 체육계에 만연한 병역비리]

[박상필 리스트, 누구누구?]

[병역비리, 구멍 난 병무청의 신검 실태조사]

나와 김주하 실장, 그리고 장인호 사장은 각기 3사의 9시 뉴스를 모니터링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KBC의 뉴스를 보고 있었고.

박상필 리스트의 보도가 끝날 때쯤, 아나운서의 마지막 멘트.

"...이 가운데 배우 이지우 씨는 참고인 조사중 국가유공자의 자녀임이 검찰 조사 간에 밝혀져···"

그러면서 내가 검찰청에 들어가는 장면이 짤막하게 나왔다.

그리고 마치 인터뷰하는 것과 같이 편집된 영상.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박상필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본적도 없고. 연락해 본 적도 없습니다. 오늘 조사로 제 결백을 증명하러 왔고, 저는 가장 명예로운 방법으로 군 복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플래시 사이로 내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역시 스타일링 받고 가길 잘했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

[드라마계 초비상! 주연배우 병역비리로 얼룩진 드라마들]

타사 드라마를 돌려까는 KBC.

[ [저승카페] 인터뷰 이모저모.]

그리고 채용비리를 의식한듯한 류창진 PD의 인터뷰까지.

'지금 합류하신 박현주 작가님은 이미 영화 두 편을 각본가로서, 얼마 전 흥행하였던 [폭력의 사슬] 공동 각본가이시며···'

웃음이 난다.

오늘 하루, 나 살기에 바빠서 잊고 있었던 사실.

채용비리로 공격당한 건 현주와 나뿐만이 아니었다.

KBC도 채용비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현주와 나를 살려야 했던 것이다.

현주가 유능한 각본가라면, 채용비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띄워야 [저승카페]가 살아날 테니.

그래도 그걸 9시 뉴스에 박제해 버릴 줄이야.

뉴스가 끝나고, 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어떻게 됐나요?"

"없어, SBC에는 자네 이름은 빠졌네."

김주하 실장도 손으로 OK 사인을 만들며 MBS 뉴스에 내 이름이 빠진 걸 알려줬다.

그리고 그 주, 주말 10시

한 주를 뜨겁게 달군 이슈.

그 이슈에서 살아남은 드라마.

가장 적은 비용으로, 3사 드라마 중 최 약체라 평가된 드라마.

[저승카페] 9화 시청률 23.3%

[단군삼신기] 13화 결방

[겨울이었다] 13화 결방

저승카페는 2배에 가까운 시청률 상승을 보였다.

이제 피의 복수를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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