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우리 제작사 하나 차리자
42.
"형 아직 술 안 깼어? 만화방을 인수했다니 뭔 소리야."
발치에 있는 소주병을 툭 하고 건드리며 말했다.
"술 안 깬 건 맞는데, 여기 인수한 건 사실이야."
이때 살짝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평생 쓸 수 있는 돈도 벌었겠다, 만화방 인수해서 영화 안 만들고 대충 살 작정인가?
앞으로 정산 될 극장수익이 약 32억. 지금 시세로 강남에 25평 아파트 한 채가 5억이 안된다. 20년 후에는 20억 가까이 되고. 집이 아니라 가로수길 상가 한 채를 산다면 남은 평생을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을 테지.
그런 물가를 비교하기 전에 큰돈 아닌가. 관리만 잘한다면 적당히 사치 부리면서 살아도 평생 놀고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다.
내 전생에 [폭력의 사슬]의 관객스코어는 10만 정도. 수익 역시 지금의 1/10 정도였을 거다. 이 역시 독립영화로는 쾌거가 맞지만, 그 애매한 성공은 그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신인 감독, 그리고 독립영화의 유례없는 성공. 그것도 80%의 투자지분을 가진 감독. 이수한이 지금에 안주하여 행복하다면, 아니 만족한다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전생에 그가 만들었던 많은 작품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쩌면 한국의 최고의 액션 감독을 돈 속에 파묻어 고사시켜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 반, 걱정 반, 생각하고 있었다.
"뭐해? 앉아. 여기 건너편 만화방인데요 족발 특대 하나랑 피쳐 5개요. 네네 감사합니다."
이수한이 족발집에 전화하며 일어났다.
"경수는 언제 오는데?"
"잠시 일 있어서 좀 늦는데. 아니 근데 무슨 아침부터 술이야?"
"아참, 너 술 안 먹지?"
"안 먹는 걸 떠나서 지금 아침 10신 데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수한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돈 많은 백수가 아침부터 술 좀 마실 수 있지. 왜! 일단 이거 니가 먼저 좀 봐바."
그러면서 만화방 카운터 쪽에 충전 돼 있던 노트북을 가져왔다.
"이게 뭔데?"
"어? 뭐긴 뭐야. 차기작이지."
노트북에는 한글 창이 떠있었고, 중앙에 커다랗게 [해적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해적왕?"
"어, 내가 몇 개월 만화방에 있다 보니까, 원피스, 해왕기, 풀어헤드 코코를 다 봤거든? 내가 만화보다 뽕이 차올라서 며칠 전 속초까지 갔다 왔다는 거 아니겠냐. 하여튼, 로망과 낭만이 있는 바다사나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싼 우리나라에서 그럴싸한 해적 영화 한 편 있어야 하지 않겠냐?"
기억이 나버렸다.
너무 망해서 20년 후쯤 대한민국 블록버스터의 발전을 10년쯤 후퇴시켰다 평가받는 똥망작 [해적왕].
이전생에도 [폭력의 사슬]의 흥행으로 충무로 슈퍼루키 취급을 받은 이수한이었으니 투자유치가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영화가 해양 블록버스터 [해적왕]이고.
이전 역사에선 이수한은 [해적왕]으로 크게 한 번 말아먹고, 이후 저예산 상업영화로 착실하게 필모를 쌓아서 '폭력의 거장'이 된다.
어쨌건, 다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에 안도, 그 글이 하필이면 [해적왕]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수한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계속해서 '낭만'과 '로망'을 외치면 입으로 똥을 싸고 있었다.
"아니, 그러면 만화방은 왜 인수 한 거야?"
"어? 여기? 사무실 겸 집? 뭐 그런 용도로 쓰려고. 여기서 몇 달 지냈는데 사장님이 제발 집에 좀 가달라고 하더라고. 나 집 없다고 하니까 여기 곧 폐업할 거니까 다시 오지 말라고 해서, 그냥 내가 사버렸어."
"형 근데 새해에도 이따위로 살 거야?"
"아, 당연히 이렇게는 못 살지. 사놓고 보니까 인테리어 할 돈이 없더라고. SJ에서 극장수익 정산해주면 그때 인테리어 하려고."
"그게 아니라, 어··· 그··· 상식적으로··· 아니다 형. 우습고 좋네. 형답고."
코 쓱 하며 웃는 이수한.
칭찬 아니라고··· 겸손한 듯 웃지 말라고···
그러면서 저기는 빔프로젝터를 놓는다니, 이쪽은 침대를 놓을 거라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참 했다.
만화책과 소설책이 쌓인 작업실. 그리고 블루레이 타이틀도 수십 개를 주문했다고 했다.
그쯤되니,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수한을 내 기준으로 해석했던 거지.
돈? 이수한에게 돈이란, 영화나 만화를 실컷 보게 해주는 도구 쯤이었던거다.
수십억이 생겨서 하는 플렉스라는 게 만화방 인수해서 거기를 작업실로 꾸민다니.
시발··· 존나 멋있잖아.
여러 번 충격을 받아, 놓칠뻔한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건네받은 시나리오를 읽었다.
이미 바뀌어버린 이번 생이지 않은가. 내가 아는 그대로의 이수한이였기에 기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읽었다. 이수한도 전생의 이수한이 아니기···
아니기는 개뿔. 역시 똥망작 맞다.
도대체 무슨 뽕을 처맞았길래 이런 망작이 나왔을까.
감정선이 수시로 튀고, 대사가 작위적이다. 초반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너 내 동료가 되라' 이 부분은 웃기다기보다 불쾌할 지경이고.
딱, 이수한이 각본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것 말고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나리오였다.
이 똥을 충무로에 던져놓는다면, 이수한이라는 이름값으로 비싼 값에 팔리겠지. 투자할 사람도 줄을 설 테고.
이수한이 한국 블록버스터의 발전을 10년쯤 후퇴시키기 전, 그리고 모두가 윈윈하는 방향으로 어드바이스 해주기로 했다.
"어, 음··· 형. 내가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 조목조목 따지고 들 수야 있겠지만. 그 전에 현실적인 것 부터 한번 이야기 보자. 해양 블록버스터면 배 띄워야겠네? 고려 시대 배경이니까 소품도 싹 다 만들어야겠고. 군대도 등장하니까 엑스트라에 CG도 많이 써야 하고. 예산이 대충 봐도 100억 단위 들어가는데 이러면 투자자나 제작사의 입김이 너무 세져서 형이 원하는 그림 뽑기 힘들 걸?"
"아, 그런 거야 내가 어떻게든 잘 설득해서···"
"제작사를? 투자자를? 형이 생각해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알지?"
한국의 영화산업은 그나마 감독을 존중해 주는 편이다. 하지만 저 정도 사이즈의 대작을 작업할 때는 투자자나 제작사의 압박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대규모 전투장면을 작업할만한 역량을 가진 제작사가 이제 두 번째 영화를 찍는 이수한을 크게 존중해 줄 리도 없고.
이수한의 기본 능력치가 있는데, [해적왕]이 그 정도로 망한 것은 아마도 그런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는 능력과 별개로 아직 어린 감독에 불과하니까.
앞으로 10년 쯤 후, [UBD]라는 영화가 나온다. 제작사의 입김이 너무 심하게 들어가 150억원의 예산을 퍼부어서 17만이라는 기적의 관객 스코어를 기록하는 영화. 아마도 [해적왕]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대작 찍는다고, 대감독 되는 게 아닌 거 알지?"
"으응?"
"형이 원하는 영화를 찍으려면 방패가 필요해. 제작사가 나서서 투자자를 상대하고 설득하면 누가 감독을 건들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잠시 뜸을 들였다. 경수형이 오면 한번에 말하려 했는데.
"우리 제작사 하나 차리자."
"누가? 우리가? 에이, 안돼. 인마. 제작 그게 쉬워 보여도 얼마나 어려운데. 사람은? 난 못해! 그럼 니가 할거야? 너 바쁘잖아. 그리고 회사는? 뭐 등록이다 법이다 해서 얼마나 복잡한지 아냐?"
"그걸 왜 형이나 내가 해? 그걸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때 경수 형이 만화방에 들어왔다.
만화방 문 앞에는 내가 굴린 소주병이 있었고, 그걸 밟고 살짝 삐끗한 경수형.
"아··· 수한이형 진짜 새해에도 이따위로 살 거야?"
우리 제작자 등장이었다.
***
아직 이 시기에는 제작자라는 역할이 크지 않다. 보통 감독들이 제작자의 역할까지 겸해서 하려 하고, 전문적인 제작자들이 이제 막 등장해 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현장을 지휘해서 영화의 '연출'을 한다면, 제작자는 투자유치, 촬영지원, 배급사 선정 및 IP관리, 편집, 프로젝트의 기획 부터 상영 후 관리까지 다 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폭력의 사슬]이야 1억도 안든 코딱지만 한 영화기에 이수한 혼자서 찍을 수 있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는 없다.
막 말로 [해적왕]을 찍는다 치자. 세트부터 시작해서 배 모형, 스튜디오 대여, 필요 소품을 다 챙겨야 하는데 이수한이 할 수 있을까? 그 전에 개인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제작사가 그런 부분을 꼼꼼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이전 [해적왕]에는 그게 안 됐다. CG처리는 허접했고, 고증은 조선과 고려시기가 뒤죽박죽. 그 전에 제대로 된 제작사라면 그 영화를 찍었으면 안 됐고.
영화는 감독이 찍고, 제작자는 영화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체크하고 감독하여 감독이 연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드는 역할이라 보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수형과 이수한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계산적이고 리스크 관리에 철저한 경수형이 수시로 이수한의 폭주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면 [폭력의 사슬]은 없었을 테니까.
특히 이수한이 쓴 [해적왕] 각본을 본 뒤, 그 자리에서 삭제 했을 때 감동 받았다.
저게 옳게 된 제작자지.
그 [해적왕]을 다시 볼 일 없어서 다행이다.
대략적인 계획을 두 사람에게 알려줬다.
[폭력의 사슬]은 시작일 뿐이라고. 이수한이, 그리고 경수형이 계속 찍고 싶은 영화를 찍으려면 그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이 제작사를 설립하는 거고.
투자금은 이수한이 마음만 먹으면 조그마한 제작사 하나 세우는 건 문제가 아니다. 만약 한다고만 하면 나도 보탤 예정이고.
실제로 경수형이 쓴 각본은 별로였지만, 영화를 보는 눈은 상당히 좋다. [폭력의 사슬]에서 김범과 나의 배역을 바꾸자고 먼저 제안했던 것도 경수형이었고, 현주가 쓴 각본으로 옴니버스 구성하자고 했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것도 경수형이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경수형이 제작자로 시작해 제작사 하나를 통째로 인수할 만큼 유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시기가 좀 빨라 질 뿐이다.
이수한과 경수 형에게 제작사 이야기를 전하고 극장 수익이 정산되기 전에 답을 달라고 했다. 만약 제작사를 세우겠다고 하면 적극 돕겠다고도 말했다.
내가 이렇게 제작사 설립에 열을 내는 것은 곧 시중에 풀릴 꼭 잡아야 할 대본이 있기 때문이다.
[악의 기록]. 판권이 곧 풀린다.
***
시간이 흘러 [저승카페]가 첫 전파를 탔다
[저승카페] 첫 방영, 시청률 8.9%
[단군삼신기] 5화 시청률 16.2%
[겨울이었다] 5화 시청률 14.5%
SBC의 [단군삼신기] 배우가 있는 한 대기실.
시청률 기록표를 보고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으하하, 내 이럴 줄 알았다. 이정건 이 새끼 한물간 거 맞다니까. 백룡에서 존나게 가오 잡더니 시청률 8퍼센트가 뭐냐."
[단군삼신기]는 단군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분장 소요가 많았고, 지금도 여러 명의 스태프가 달라붙어서 박정태의 분장을 도와주고 있었다.
"다른 드라마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하는 것만 집중하자. 정태야."
매니저로 보이는 한 남자. 하지만 연예인의 매니저라고는 생각지 못하게 날카로운 인상을 가졌다.
차 실장이라 불리는 남자는, 무심히 노트북을 조작하다 말고, 분장팀이 신경 쓰이는 듯 흘깃 보고 말했다.
"차 실장님. 주말 10시 드라마 시청률 8퍼면 망한 거 맞죠?"
그러나 차 실장이란 사람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태는 제 할 말만 했다.
"이제 1화 방영됐는데 망하고 말고가 어딨어. 지금 시청률은 의미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어! 이정건이랑 트러블 있는 건 들어서 아는데, 괜한 소리 기자들 앞에서 하지 마라."
"걱정 마세요. 좀! 내가 이 짓 하루 이틀 하나. 아 그나저나 그 이지우라는 애새끼도 날 잡아서 조져야 하는데···"
"눈치 없는 새끼야. 아가리 좀 닫으라고."
차 실장이 눈을 번득이며 말하자, 박정태는 고양이 만난 쥐 마냥 눈을 피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제서야 차 실장의 분위기가 안 좋다는걸 깨달은 박정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 실장은 호스트 바에서 반반한 녀석 주워와 데뷔시켜 놨더니 제가 뭐 되는 것 마냥, 앵앵거리는 박정태가 거슬렸다.
그리고 노트북으로 각종 드라마 반응을 살피기 위해 여러 커뮤니티를 확인 중,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
박정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지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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