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우카페
41.
새해가 되어 [저승카페]의 촬영이 시작됐다.
나도 아직은 해외 드라마를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국내 드라마는 유독 시간에 쫓긴다. 일명 쪽대본이라 불리는 대본에 시간을 쫓겨가며 촬영하기 일쑤고.
10여년 뒤, 넷플릭스가 들어오고 독점작들이 제작되면서 사전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지지만,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
그나마 대본 작업에 현주가 투입되면서 속도가 붙어 촬영 초반은 대본에 쫓기지 않고 여유로운 편이었다.
"잠시 쉬었다 갈게요!"
세트 조명이 문제가 생긴 듯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
조그마한 핸드 메이드 카페를 옮겨놓은 듯한 세트. 웬만한 카페 못지않은 장비가 다 세팅되어 있었다.
[저승카페]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어설픈 세트 여러 개를 만들어 저 퀄리티로 드라마의 볼륨을 늘리기보다, 제대로 된 카페 세트를 만들고, 카페 중심의 이야기를 풀어가자는 류창진 PD의 아이디어.
그래서 카페 세트에 힘을 준 게 느껴졌다. 아주 최신의 장비부터, 손 때 묻은 과거의 장비가 뒤섞여 있다. 마치 카페의 시간은 세상과 다르게 흐르는 듯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다음 촬영을 위해 대기 중이던 내가 그 세트로 다가가 인사했다. 아무래도 나는 데뷔 1년이 안 되는 신인. 촬영장의 배우들 모두 선배였기 때문이다.
주연배우 두 명이 바(BAR) 형태의 테이블에 앉아 쉬고 있었다.
"이정건 선배님, 그리고 서수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선배들 옆쪽, 그러니까 바 테이블 쪽에 나란히 앉기가 좀 민망해서 커피를 만들어야 하는 쪽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두고 두 명과 마주하고 섰다.
"크크크, 지우야 너 왜 거기 가 있어? 옆으로 와. 왜? 커피라도 만들 게?"
"지우 씨 대본 리딩하고 우리 처음이죠? 거기 그렇게 있으니까, 진짜 카페아르바이트생 같다."
내가 굳이 몇 시간 뒤 촬영인데 이렇게 미리 나와서 배우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하는 건 이유가 있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결국 배우들이 만들어가는 거다.
몇몇 선배들이 하는 저 이야기를 예전에는 이해 못했지만, 요즘 들어 저 말이 계속 생각난다.
내가 만약 김범을 포기하고 내 연기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의 [폭력의 사슬]이 있었을까?
이전 생에서 내가 생각했던 팀플레이는 제 몫을 다하는 것이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하자면, '나만 잘하면 돼'.
그렇게 했을 때 실패한 지난 생과, 이수한과 이태환, 그리고 장인호 사장 등의 도움을 받아 빠른 시간에 결과를 만들어 낸 지금.
어쩌면 팀플레이라는 게 함께 잘해서 시너지를 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하는 건 당연한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한 번 돌아보는 것.
세트를 죽 둘러보니 확실히 있을 건 다 있네. 냉장고에 우유 있고.
"뭐 하나 만들어 드려요?
"네? 뭐 가능한데요."
잠시 세트 안의 장비와 원두를 확인했다.
"잠시만요."
'드르륵'
원두를 꺼내고, 곱게 갈아 낸 다음 컵을 예열했다. 전동 그라인더도 있었지만 핸드밀을 꺼내어 직접 갈았다. 저가형 전동 그라인더보다는 핸드밀이 낫기에.
두 배우는 내가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했고.
"예열한 데미타세에, 안티구안 프랜치 로스팅 두 잔입니다. 두 분 다 체중 조절하시는 것 같아서 다른 건 안 넣었어요."
"우와, 이쁘다.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와, 이거 좋은데?"
첫 한모금 마시자 마자 깜짝 놀라는 두 사람.
"안티구안 원두가 화산지대에서 재배 되는 거라 약간 스모키한데, 류 PD님이 신경 써서 가져다 놓으셨네요."
"카페 알바 했던 거야?"
이정건이 커피를 음미하며 물었다.
"아뇨. '강림차사'가 게으른 '백풍차사' 대신해서 카페 일을 도와주잖아요. 그것도 수십 년 동안이요. 바리스타도 기술자인데, 어설프게 했다가는 티가 날 거 같아서 캐스팅되자마자 쭉 연습했습니다."
사실 내게는 이게 기본이다.
적극적으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배역의 직업, 가족관계 등을 철저히 연구하고 디테일을 쌓아가는 것.
이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캐릭터를 만들어지는 거니까.
2000년대 초반부터 카페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나도 그 덕분에 쉽게 바리스타 학원을 찾았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요청해서 수강까지 끝마쳤다.
예전이었다면 커피 만드는 걸 배우는 것까지였겠지.
"음? 향 너무 좋은데? 지우 씨 나도 커피 한 잔 부탁해도 될까요?"
"나도, 나도! 지우 씨 나 이틀 밤새웠어요! 한 잔만."
"나는 삼 일째!"
이후 무수한 악수, 아니 커피 요청을 받았다.
***
1월이 들어서고 [폭력의 사슬] 팀은 선댄스 영화제까지 갔다가 귀국했다. 아쉽지만 수상은 실패했다.
나는 [저승카페]의 촬영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어서 이수한, 조감독이었던 경수형과 김범이 갔었다.
그렇게 대충 돌아가는 상황만 확인하고 [저승카페] 촬영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전 [폭력의 사슬]의 조감독이었던 경수형이 전화가 온 것이다. 상담할 게 있으니 한 번 볼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경수형이 말한 날짜에는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어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경수형과의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으나 [폭력의 사슬] 촬영현장이 좀 고됐나.
몇 주 동안 고생을 함께 하다보니 내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형 소리가 나오게 됐고, 이후 편집 간에도 종종 만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 중심에 이수한이 있었긴 했지만.
어째든 주연배우인 이정건이 촬영하는 동안 짬이 난 상황. 나는 아직 2~3씬 정도는 분량이 없기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사람들에게 돌릴 커피 몇 잔을 만든 후, 내가 마실 커피를 뽑았을때 경수형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형도 커피 한잔할래요?"
"좋지. 근데, 너 무슨 저승사자 배역이라고 안 했냐?? 무슨 배우한테 커피를 만드는 걸 시켜?"
"현장에서 노가다 시키던 [폭력의 사슬] 조감독님이 하실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요."
실제로 경수 형은 약간 허당 끼가 있는 이수한 감독 대신 악역을 자처하면 현장에서 군기 반장 역할을 많이 했다. 꼼꼼하게 현장 잘 챙기기도 했고.
"커피 겁나 맛있네. 와 이거 배우고 나발이고 커피 만드는 거 시킬만하네. 너 배우 때려치워도 먹고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내가 내어주는 커피를 받아든 경수형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어쩐 일이세요? 선댄스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전화가 왔을 때부터 미묘하게 목적을 말하지 않았던 경수형. 이 형이 경우가 없는 사람은 아닌데 전화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적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물어볼 게 좀 있어서."
그러면서 내미는 한 부의 대본.
"음? 이게 뭐예요?"
물어보고 나서 아래에 있는 경수형의 이름을 봤다.
"내가 쓴 각본."
"아! 형 작품 하나 들어가시게요?"
"으응···"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혹시 배우가 필요 하신 거예요? 나 이제 좀 비싼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농담이에요. 형이 작품 하는데 제가 무조건 도와야죠. 어떤 배역이에요? 드라마 촬영만 끝나면 스케줄 없어요."
출연이라면 솔직히 해줄 의향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폭력의 사슬] 조감독이었으니까.
1년 전과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고 그 결정적이 역할을 했던 게 [폭력의 사슬]아니겠나.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스케줄을 잡는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다, 생각했는데 경수 형이 한 말은 출연제의가 아니었다.
"이 작품, 다 까였어. 받아주는 제작사가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좀 부끄럽긴 한데 한번 읽어주라. 너 대본 보는 감 좋잖아. [폭력의 사슬] 때도 니가 어드바이스 해서 좋아진 부분 많고. 뭐가 문제인지 한 번 읽고 말해줄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경수 형.
"욕해도 좋으니까, 솔직하게만 말해줘."
덧붙이는 그의 말에 비장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힘들게 이야기할까. 전화로 말하면 될 것을, 직접 만나서 부탁씩이나 필요했던걸까.
시계를 한 번 보고 내 촬영까지 넉넉하게 시간이 남은 걸 확인한 뒤 바로 읽었다.
빠르게 넘어가는 대본.
경수형은 내가 빠르게 보는 것이지 대충 보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담담하게 기다렸다.
대본을 다 읽고, 덮은 뒤 다시 경수 형에게 건넸다.
하···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다 읽고 난 뒤, 느낀 점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담으려 애쓰고 있지만 와 닿는 건 없고, 이야기가 분산되다 보니 주요갈등이 힘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캐릭터가 뛰어나지도 않았고.
"음··· 좀 그렇네요. 제작사가 원할만한 대본은 아니긴 하네요."
에둘러 표현했지만 대충 그도 그 말의 숨은 뜻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말을 이해했는지, 그도 더 캐묻지 않았고.
"하··· 고맙다. 대충 나도 예상하고 있었어. 내가 수한이 형처럼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수한이형 처럼 전 재산 꼬라박아 이 영화 만들 자신도 없고."
경수형의 한숨 섞인 푸념에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경수형 또한 영화학도로서 제2의 이수한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기에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계산적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가 가진 재능이었고.
"어쩌시게요?"
"글쎄. 고향에 내려가 좀 쉬다 올까? 아니면 취직자리라도 알아봐야지."
"형, 고향 내려가는 거 급해요?"
"아니 급하기 뭘. 그냥 쉬러 가는 건데."
"그럼 형, 수한이 형이랑 다 같이 한 번 볼까요?"
"야, 무슨 내가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송별회까지 필요 없어. 진짜 보내버리려고 하네 얘가."
"아니 아니, 송별회가 아니라 형들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앞으로 계획 같은 거."
"아··· 그거야 뭐 수한이 형이나 나나 요새 맨날 노니까···"
"놀다니?"
살짝 당황했다. 이수한, 이 우스운 형 설마 각본 안 쓰고 놀고 있나?
"수한이 형 요새 만화방에서 살아."
"네? 만화방이요?"
***
촬영이 쉬는 날, 일부러 이수한을 찾았다.
살짝 걱정되기도 했고.
다른게 걱정 되는 게 아니라 영화가 너무 성공해서 걱정했다.
돈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나야 그 모든 걸 겪고 지금에 와서 돈을 수단으로서 대하지만, 이수한은 아직 30세도 되지 않은 젊은, 원래의 내 나이로 봤을 때는 어린 감독이다.
백룡 영화제 때 잠시 본 이후 그 전 후로는 내가 바빴고, 영화제에서 만났을 때 잠시 이야기 한 게 전부다. 그동안의 근황이 궁금했고 개인적인 용건도 있었기에 약속을 잡았다.
1월 초,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할 때쯤, [폭력의 사슬]은 극장에서 완전히 내려갔다.
총 관람객 약 104만 명.
총 매출 약 90억.
영화발전기금 3%. 부가세 10% 공제.
공제금액을 제외하고, 극장수익 45%, 배급사 55%.
배급사는 저 55%에서 10%를 가져가고 남은 금액이 투자자에게 돌아온다. 거기에 추가 홍보비 2억가량을 제외하면.
41억 가량.
제작 투자. 이수한, 이지우.
각각 80%와 20%의 지분을 보유.
이수한 32억 8200만 원.
이지우 8억 2000만 원.
당장 내가 머릿속으로 계산해서 3개월 뒤 나오는 극장 수익이 저 정도고, 2차 판권과 해외 수출까지 계산하면 수익이 더 불어날 계획이다.
잘 곳도 없어 찜질방과 여관을 전전하던 사람이 저런 돈이 생긴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단순히 감독과 배우 간의 관계가 아니라 이수한은 어떨 때 보면 진짜 형 같았으니까.
그래서 경수형과 함께 날 잡아서 이수한에게 가기로 했다.
약속을 잡긴 했는데, 뜬금없이 동네 만화방으로 오라고 했다.
좀 늦어진다는 경수형의 문자를 확인하고, 이수한이 있다는 만화방에 찾아가긴 했는데···
경수형이 만화방에서 산다길래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 줄 알았지, 맙소사.
"형, 이거 뭐야? 만화방에 이불이랑 베개는 왜 있어? 이러면 주인이 뭐라고 안해?"
"어? 지우 왔냐?"
만화방 소파를 붙여 누운 이수한이 이불 속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만화방 테이블 위에 재떨이에는 꽁초가 수북했고, 컵라면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더니 이수한이 담배를 물면서 말했다.
"어, 주인이 뭐라고 안해. 내가 주인이거든."
"야이 미친 인간아. 제발 좀 우습기만 하라고! 모자라지 말고!"
이수한은 그동안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모두 털어 넣어 만화방을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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