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40화 (41/121)

40. 선생님

40.

백룡 영화제 바로 다음날. 현주는 청운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했다.

현주는 작가 활동을 보장받고, 회사는 사무실 한 칸을 개조해 작업실까지 만들어 주기로 했다.

장인호 사장이 인근에 조그마한 원룸(작업실 용)이라도 마련해 준다는 걸, 현주가 거절했다.

회사의 시청각실이 워낙 좋고, 많은 시나리오와 각본이 들어오는 회사의 특성상, 자료수집에 용이한 회사에서 글을 쓰는 게 더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청운 엔터테인먼트도 당장 현주에게 성과를 기대하고 계약한 건 아닐 것이다. 장래성과 잠재력을 따졌을 것이고, 나와 연관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였을 터.

겸사겸사 회사에서 앞으로 진행할 제작사 각본 작업을 맡길 생각까지 한 계약이니, 회사 차원에서도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손해일 리가 있나. 두 개의 영화 각본에 참여했고 그 중 한 영화는 독립영화 중 이례적인 흥행을 했는데. 오히려 경력직 신입(?) 작가를 빠르게 잡았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계약서를 쓰고 김주하 실장에게 은근히 [저승카페] 유수영 작가가 보조작가를 구한다고 흘렸다.

눈치 빠른 김 실장이라면 내가 한 말의 뜻을 바로 알았을 것이다.

현주가 능력이나, 커리어 향상을 위해서 다양한 작품에 손을 대보는 것이 좋을 테니 말이다.

현주의 계약이 일단락되고 바로 다음날 새벽. 예기성의 전화를 받았다.

-낚시나 하러 가자.

"네?"

뜻밖의, 어찌 보면 뜬금없는 타이밍의 전화였다.

이틀 전 백룡 영화제에서 사고 친 까마득한 후배를 개인적으로 부른다?

무슨 할 말이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거나.

하늘 같은 대선배가 낚시를 가자는데 어쩔 수 있나. 낚시에 ㄴ도 몰라도 따라갈 수밖에.

예기성의 매니저가 이것저것 챙겨서 나를 데리러 왔다.

여기서 좀 당황스러웠던 게, 예기성의 매니저가 예기성의 집 앞으로 가더니 차에 실어놓은 짐을 설명하고, 잠시 기다리라 말하곤 사라졌다.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기다리는데, 한 오 분쯤 됐나? 예기성이 차를 타더니 시동을 걸었다.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어디를 가시는지."

"어딜 가긴. 낚시하러 가지."

"저희 둘이요? 아니, 직접 운전하시려고요?"

그저 말없이 한 번 웃고 마는 예기성이였다.

그렇게 출발하여 도착한 곳은 경기도 외곽의 한 낚시터였다.

예기성의 매니저가 말해준 내용을 기억해내어 더듬거리며 텐트를 치고, 의자를 펴고 대충 낚시터에 온 느낌에 맞춰 세팅했다.

그런데 나는 낚시를 모른다.

이런걸 즐길 여유도 없었고, 내 아버지도 아주 어렸을 적 돌아가셨기에 낚시를 데려가 줄 사람도 없었다.

낚싯대 가방에서 낚싯대 몇 개를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하며 처음 보는 퍼즐을 맞추듯 조각 모음을 하고 있었다. 길쭉한 게 낚싯대고, 낚싯줄 감겨있는 게 릴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걸 어떻게 연결해야 하고, 찌나 미끼를 어떤 식으로 세팅해야 하는지 감이 없었다.

멀찍이 서서 먼 산 보고 있던 예기성이 다가왔다.

"잘 안돼?"

"네··· 선생님. 제가 낚시는 해본 적이 없어서요."

"으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간절히 보내보지만, 헛기침 한 번 하고 마는 예기성이었다.

낚시 메이트를 잘못 고르셨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말했다.

"이거랑 이거 연결하면 되나요?"

같은 로고가 적혀있는 릴과 낚싯대를 들고 예기성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나도 낚시 처음이라."

그게 문제라도 되느냐는 듯, 예기성은 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처음에 저게 무슨 소린가 했다.

낚시터 오자고 한 사람이 낚싯대를 다룰 줄 모르다니.

"라면은 끓일 줄 아니?"

"네."

"그래, 뭘 하든 일단 먹고 하자꾸나."

내가 누구?

지우분식 사장 아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할 줄 모르는 낚싯대 가지고 씨름할 바에 잘하는 라면 끓이는 게 낫지.

라면을 끓이면서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더라.

낚시를 모르는 사람이 낚시라니. 나이도 많으신 노배우가 까마득한 후배를 데리고 하는 장난이라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이 알다가도 모를 상황에서 라면을 끓였고, 조심스럽게 예기성을 불렀다.

"선생님 식사하세요."

그렇게 시작한 식사.

원래의 내 나이대로 계산해도 지금의 예기성이 나이가 많다. 아니, 공식적인 데뷔가 7살 때부터라 했으니 연기 경력이 내 나이보다 많다.

그렇기에 나는 굳이 20살을 연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예의바르 게 행동할 수 있었다. 또한, 내 무명시절과 예기성의 제2의 전성기와 겹치기에 그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자연스러운 존경심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가 상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강하게 항의하셨다는 것도 장인호 사장에게 들은 바 있었고.

"맛있네."

예기성은 담백하게 품평했다.

"제가 분식집 아들이거든요."

"아, 맞다. 분식집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모델로 이 일을 처음 시작했다지?"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시작은 [폭력의 사슬]이 먼저지만, 공개된 것은 'ON스트릿' 모델이 먼저니까.

다시 침묵 속에서 식사했다.

식사를 끝내고, 커피 한 잔 대접한 후, 늦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란히 앉았다.

포근한 겨울 날씨였고, 바람도 불지 않아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쯤 서로 간에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엊그제 있었던 일은 잘 해결 됐다지?"

"네. 선생님. 장인호 사장과 잘 처리 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연예인이라는 게 밝은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그 뒤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으면 안 돼. 주변 사람들 잘 챙겨야지."

"명심하겠습니다."

"현주 양이라 그랬나? 괜찮아?"

"네, 좀 놀라긴 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청운이랑 이번에 전속 작가 계약했습니다."

"장 사장이 머리를 잘 썼네··· 잘됐어. 잘됐구만."

그가 그렇게 끄덕이면서 커피를 입에 살짝 적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배우도 사람인데 사람답게 살아야지. 안 그러냐? 나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쁜 일 한 것도 아니고, 청춘남녀가 연애한다는데 응원해야지. 대신 현주 양 힘들어하지 않게 니가 잘 살피고. 그리고 또 힘든 일 있으면 장 사장이라든지, 나한테 이야기해도 좋고."

그때 느꼈다. 낚시가 의미가 없는 게 아니구나, 정확하게는 낚시보다, 나와 낚시하러 온 이 상황이 의미가 있구나 싶었다.

예기성 선생님은 나를 위로 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배우가 충격받고 힘들어할 것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이 단순한 호의가 나를 40대 중반의 배우가 아닌 진짜 20살의 청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기성 선생님의 눈에 보인 나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연기하는 20살짜리 애로 보고 한소리였을 텐데도, 실제 나이 40 중반인 내가 당황하였다.

대단한 배우가 나를 칭찬했다?

그런 종류의 느낌이 아니었다.

내가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을 때, 예기성 선생님의 커리어에 비해 절대 밀리지 않았으니까.

웃기게도 속 알맹이는 중년인 내가, 힘들때 연락하라는 말이 아프게 그리고 고맙게 들렸다.

마치 내가 20살로 돌아가, 웃 어른이 격려해주는 듯한 느낌.

나도 예기성 선생님도 그렇게 입을 다물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예기성 선생님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어어, 그래 박 감독. 나야 잘 지내지. 준비는 잘 돼 가나?"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받는 예기성 선생님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자리를 피해드려야 할까 싶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때자, 예기성 선생님은 손짓하며 앉아 있어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전화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예기성 선생님이 말했던 박 감독. 아마도 이시기 쯤, [악의 기록]이라는 영화가 프리프로덕션을 할 시기다. 박 감독은 [악의 기록]을 연출한 박찬혁 감독을 말하는 것이다. 예기성 선생님은 그 영화에서 주인공을 쫓는 정년을 앞둔 형사에 캐스팅됐다.

꼭 전생의 기억 때문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소속사에서 예기성 선생님께서 새 작품을 선택하셨다는 이야기가 몇 주 전부터 나오고 있었으니까.

"배우를 추천해달라고? 흠··· 북파공작원 역에 박정태밖에 없다고? 글쎄··· 박정태 친구는 좀··· 그렇지 않나?"

그러면서 나를 힐끗 쳐다보는 예기성 선생님.

"뭐 감독이 하겠다는데 배우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나. 일단 알겠네."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박정태라··· 그래 저 영화는 박정태가 나오기로 했었지. [단군삼신기] 촬영이 끝나자마자 [악의 기록] 촬영이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기성 선생님 눈에 박정태가 차지 않을 것은 분명하고.

안타깝지만 저 [악의 기록]이라는 영화는 개봉하지 못한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프로젝트 자체가 공중분해 되기 때문이다.

몇 년 뒤 시나리오만 다른 제작사에서 구매해서 제작되고, 대박이 난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직업이 전직 북파공작원이다.

북파공작원이라··· 내게는 여러 의미가 있는 단어다. 그 단어가 오늘 이 상황과 맞물려 들어가며 묘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조언과 덕담 그 어디쯤 대해서 이야기하던 예기성 선생님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예기성 선생님의 진짜 목적이 나를 위로하는 것뿐이었는지, 낚싯대는 한 번 펴보지도 않고 갈 채비를 했다.

긴가민가 했던 예기성 선생님의 의도가 확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텐트와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싣고, 차에 타자 예기성 선생님께서 물었다.

"회사로 데려다 줄까?"

"아뇨, 지하철 다니는데 내려주시면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그건 안되지, 배우가 그렇게 혼자 다녀서 쓰나. 회사에 연락해서 사람 나오라 하면 되니 일단 회사로 가자꾸나. 나도 회사에 볼일이 있고."

회사에 도착하니 이미 로드 매니저인 이동수가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기성 선생님께서 가시는 걸 배웅해 드리고, 그렇게 차를 갈아탔다.

"지우 씨, 어디로 갈까요? 바로 집으로 데려다 줘요?"

아··· 잠시 고민했다. 딱히 스케줄도 없고 현주도 오늘은 [저승카페]의 유수영 작가와 미팅이 잡혀있는 상황.

예기성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한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이 차올랐다.

"현충원··· 현충원으로 가주세요."

"현충원? 동작구에 있는 거?"

"네···"

경기도 낚시터까지 오고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다시 현충원까지 가느라 현충원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위패 봉안실에 들어갔다.

이름과 출생연도만 있는 위패.

계급도, 군번도, 전사 위치도, 전사했다는 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위패.

저 텅 비어있는 위패처럼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돌아가셨기에, 잊고 지냈다기보다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건덕지 자체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내 당황스러움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따스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다 큰 어른이 주는 따스함.

낚시를 하러 와서 낚싯대 한번 던지지 않고 나를 걱정 해주던 그 모습.

그 마음의 크기가 얼마가 됐든, 단순히 소속사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고아였기에 친인척이 전혀 없었고, 어머니 또한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셨다.

주변에 손내밀면 잡아 줄 그 어떤 혈육이 없는 어머니와 난, 그렇게 서로 의지해서 세상을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돈이 없어 어머니가 죽은 거라 생각하며 수전노처럼 살았고.

그런 환경에서 성공은 했지만, 그 성공을 유지할 수 없었다. 내 주변에 진심으로 나를 생각해서 조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조언을 듣지 않았고.

처음부터 없었기에, 바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내게도 아버지라는 게 있었다면, 오늘 같은 조언을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라.'

어쩌면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 위패가 현충원에 봉안된 것은 몇 년 전 북파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률이 개정된 뒤 봉안된 것이다.

위패가 봉안되던 그날, 엉엉 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본적 없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게 싫었다. 죽어서도 어머니를 힘들게 하니까.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래서 그 이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국가유공자의 자녀다.

전생에 나에게는 아버지는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국가유공자의 자녀. 군 면제.

그리고, 한때 아버지였었던 내가 다시 아버지의 위패를 보고 있자니 가슴 속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죽기 직전까지 아들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 졌다.

먼저 죽은 아버지를 수십 년 만에 용서했다.

***

혼자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던 유수영 작가는 현주의 합류를 흔쾌히 수락했다.

유수영 작가의 보조 작가로 계약한 것은 아니었다.

유수영 작가 또한 신인작가였기에 보조작가의 급여를 지급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류창진 PD가 예산을 꾸역꾸역 받아내 KBC의 계약직 스크립터로 고용했다. 급여는 KBC에서 받지만, 실제 업무는 스크립터가 아닌 유수영의 보조작가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러한 계약 과정에서 청운의 김주하 실장이 직접 유수영, 류창진과 협의하며 계약을 이끌어 냈다.

작가진이 구성되고 3월 셋째 주, 첫 방을 목표로 한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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