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34화 (35/121)

34. 니가 어떻게 나를 까겠냐, 내가 난데

34.

류창진 PD는 퇴근길에 대형 마트를 들렀다. 간단한 안줏거리 몇 개와 소주 두 병을 바구니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몇 병 더 담고 싶지만, 퇴직금이라도 건지려면 출근은 해야 하니까 참았다.

시청률 안 나왔다고 자르기야 하겠냐만은, [민주를 기다리며]로 방심위 경고 먹은 게 좀 컸다. 진급은 물 건너 갔다는 이야기였다. 3개월 뒤 방영하는 미니시리즈 하나만 맡고 새로 개국하는 종편자리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지갑과 함께 나온 자물쇠.

"고객님?"

멍하니 자물쇠를 보고 있자 마트 캐셔가 재촉하듯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류창진 PD는 카드를 건네고 물건을 담은 뒤 돌아섰다.

'자물쇠와 열쇠라···'

자신도 모르게 자물쇠와 열쇠를 만지작 거리는 것을 느낀 류창진 PD는 얼른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그 자물쇠의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저승카페]의 마지막 씬의 대사. 저 대사가 마음에 들어 이 대본을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다.

장르소설 매니아인 유수영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 인상 깊은 문장을 차용하여 썼다고 했다. 일상 속 판타지, 혹은 판타지 속 일상을 그리는 [저승카페]에 딱 맞는 대사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류창진은 이지우가 자신에게 이 자물쇠를 준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지우 때문에 망가져 버린 커리어를 이지우를 통해서 바로 잡아 보라는 의미라 생각했다.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자물쇠를 건넬 때 그 눈. 신인으로서의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 무덤덤하고 당연하다는 식의 눈빛.

재수 없었다.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류창진 PD가 보기에 이지우는 그저 화제 몰이를 잘해서 뜬 가십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띄운.

그렇다면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당당하게 찾아와서, 배역을 달라고?'

이성적으로는 류창진 PD도 이게 이지우가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단지 감정적으로 정리가 안될 뿐. 류창진 PD는 생업이 달렸으니까.

'배우가 이지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배우 캐스팅이 안 되고 있지만, 보는 눈을 낮추면 얼마든지 구할 수는 있다. 기획사에서 트레이닝 한 배우들과 같이 기본기가 잘 잡혀 있진 않아도, 이 바닥에서 유명세가 고픈 사람은 많다. 눈을 낮추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경력이나 실력이 검증 안 됐다 해도···

'알게 뭐람. 어차피 KBC 때려치우고 나갈 지도 모르는데.'

'지하 3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눌렀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보이는 한 장의 포스터.

마트 상층부에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을 위해 마련된 포스터였다.

그때, 류창진 PD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 속 자물쇠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띵'

'지하 3층입니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하, 씨발···"

여전히 류창진 PD는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7층입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그래, 욕을 해도 보고 나서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류창진 PD는 극장으로 향했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던 영화. [폭력의 사슬].

평소 영화를 좋아했던 류창진 PD였다. 그래서 단편독립영화 특선도 기획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지우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어 [폭력의 사슬]을 일부러 보지 않았었다.

매표소로 가는 중, 한무리의 인파가 영화를 다 봤는지 빠져나왔다.

"영화 괜찮지?"

"어어, 괜찮네. 좋다. 진짜."

"나는 지금 두 번째잖아."

"그 주인공 연기 개 쩔던데?"

"누구? 양아치 같은 애? 아니면 잘 생긴 애"

"잘 생긴 애. 이름이 뭐지?

그런 소리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독립영화 특별관도 모자라 일반 상영관까지 늘려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었다. 헌데 현장의 반응은 류창진 PD의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7시 50분. 폭···력의 사슬 한 장이요."

"네 잠시만요, 아! 죄송합니다 고객님. [폭력의 사슬]은 상영관이 많지 않아, 7시 50분 영화가 매진됐습니다. 8시 30분으로 예매 해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이이익···"

신음을 흘리지만, 단호하게 안 본다 말하지 못하는 류창진 PD.

"네··· 그걸로 주세요."

겨우 그렇게 말하고 한참을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상영관 하나가 열리며 영화를 다 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든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길쭉한 사람과 통통한 사람이 나와 류창진 PD 옆을 지나갔다.

어쩐지 낯익은 두 사람. 길쭉한 사람은 실내임에도 선글라스에 마스크, 모자까지 썼다. 실루엣을 봐선 업계 사람이 분명했다. 옆의 통통한 사람은 얼마 전 캐스팅 때문에 시놉시스 전달했던 소속사 실장이 분명하고.

몇 가지 정보가 모이자 바로 답이 나왔다.

배우 이정건과 그의 매니저.

"와, 이 영화감독 누구야? 차기작 언제래?"

"몰라, 완전 신인감독에 신인 배우들이더만. 나중에 회사 들어가면 알아볼게."

"크··· 포스터 지리네. 얘가 이지우야?"

그런 소리를 하며 지나가는 두 사람.

류창진 PD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고개를 숙여 피했다. 한 손에는 소주병과 안주가 담긴 봉투가 있는 처량한 모습.

류창진 PD는 뭔가 불편했다. 여기도 이지우. 저기도 이지우.

온통 이지우를 말한다. 이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칼이 다 뽑힐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꾸욱 참고 본 영화.

[폭력의 사슬]을 다 본 류창진 PD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민주를 기다리며]에서 봤던 이지우의 연기. 그저 운이 좋아서, 혹은 배우의 일생에 한 번 있을 열연, 인생연기, 그런 게 아니었다.

이지우는 그냥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지우가 연기하는 [저승카페]의 '강림차사'가 떠올랐다.

수백 년을 살고도, 젊은 모습의 저승사자.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결핍된 존재.

류창진 PD는 이지우에게서 그 비슷한 뭔가를 느꼈다.

류창진 PD는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김주하 실장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이미 늦은 시간, 그리고 조급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전화하지 않고 간단하게 문자를 보냈다.

[이지우 씨 저승카페 하신다 그랬죠?]

***

데이트할 곳이 없다.

최근에 올라간 인지도 때문에 DVD방도 좀 같이 들어가기 애매하다. 카운터 보는 사람의 눈도 불편하고.

어둡고 밀폐되어 있으며, 큰 소리가 나도 영화 사운드에 묻혀서 참 좋았는데···

대본 연습하기에 말이다.

대신에 생각해 낸 게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시청각 자료실이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시청각 자료실은 양산형 DVD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설로 최신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만들어 놨다.

장인호 사장은 아이돌이나 가수를 육성할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소속 배우들을 위해 스튜디오나 안무 연습실에 투자할 돈을 몰빵해서 만들어 놓은 시청각 자료실이었다.

그리고 김 실장에게 여자친구를 데려와서 영화 감상 해도 되느냐고 물어봤을 때 오히려 좋아했다.

현주와 내가 엄한 데서 사진 찍혀 오면 소속사에서도 골치기 때문이다.

피시방에서 내 대본을 받아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다 돼간다.

그때와 다름없이 국어책 읽기로 대사를 받아주는 현주도 그대로고.

그렇게 몇 번 대사를 주고받았다.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지듯이, 문제의 해답은 문제 곁에 있어요."

내가 대사를 치자 현주의 표정이 묘하다.

"왜? 이상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뭔가 좀···"

그러더니 대본을 뚫어져라 본다. 그리고 제 가방에서 펜을 꺼내 더니 대본에 뭔가를 쓱쓱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음, 혹시 이거 대사 이대로 한 번 더 쳐볼래?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져요. 문제의 해결방법 역시 문제와 같은 곳에 있죠."

바로 수정된 대사로 연기했다.

음?

대사의 느낌이 변했다. 아닌가?

뭐지?

사실 대사 한 줄로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캐릭터 성이나 대사 안에 포함된 뉘앙스가 바뀐 것도 아니었고. 그냥 같은 대사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작은 차이.

변한 건 나였다.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 이전 [폭력의 사슬] 후반부 촬영할 때 느꼈던 몰입의 순간과 비슷한 그런 느낌. 마치 내가 캐릭터가 된 듯이, 캐릭터의 감정과 내 감정이 일치하여 쏟아지는 느낌.

이거 좋은데?

내가 추구하는 연기하는 방식과는 좀 맞지 않지만, 뭔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메소드 연기를 올려치는 경향이 있다. 캐릭터의 감정에 완전히 이입해 배우가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연기법.

언뜻 봤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연기법. 하지만 배우는 연기를 보여주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대본과 연출을 이해하고 정확한 감정과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 해야 된다.

메소드 연기법은 캐릭터의 중시하여 폭주하기 마련이다. 상의되지 않은 애드립, 스태프들과의 불화, 감독이나 각본가를 무시한 과잉, 혹은 소극적인 연기.

어떤 배우 중에는 메소드 연기한답시고 각목으로 다른 배우 머리를 치는 척이 아니라 깨부숴버린다거나, 미친놈 연기한다고 프리프로덕션 시기에 죽은 쥐를 여배우한테 택배박스 싸서 보낸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이 너도 본다. 뭐 그런 건가?

안타깝지만 모두 실화다.

메소드 연기를 극찬하면서도 이면의 단점은 잘 언급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변명은 '캐릭터가 시키는 대로 했다'라고 한다. 아니 지가 무슨 웹 소설 주인공이야? 연기하라고 했더니 왜 빙의 하냐고.

이런 연기법으로는 배우로서 롱런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연기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봤을 때 혼자서 너무 튀는 경우도 많고.

특히 나 같이 감정 감응이 뛰어난 경우에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극단적인 몰입 때문에 캐릭터의 감정이 나 자신의 감정이 되어버리는 상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몰입.

결코 연기를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고 내 안에서 맴돌았으므로.

그래서 나는 메소드 연기를 하지 않는다.

내 단점을 극복하고, 더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지난 생부터 꾸준히 했던 훈련. 타고난 감정의 감응을 통해 대본에서 전해지는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과 상황에 대해서 끝없이 반복하며 분석하는 것.

누가 봐도 메소드 연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한 분석을 통한 계산적이고 기술적인 연기를 하는 것.

그것이 내 연기법이다. 메소드 연기법과, 분석적 연기법 모두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그런데, 현주의 대본··· 내 감정을 송두리째 뺏기는 듯하면서도 나를 놓치지 않게 했다.

유연한 몸이 내 재능이고, 맞지 않은 갑옷을 대사라 비유한다면, 내 몸을 억지로 구겨 넣은 게 이전의 내 메소드 연기였다.

메소드 연기가 가능하지만, 할 수록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그런 연기.

하지만 현주가 바꾼 대본은 나를 위해 만들어놓은 맞춤 정장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맞춤 대사!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만들어준, 오직 나만을 위한 대사.

그런 그녀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한다.

"오! 느낌 있어!"

"응?"

"대사가 전체적으로 좋은데 너랑 안 맞는 느낌? 그런 게 좀 있어서 바꿔봤는데 훨씬 좋은데?"

"아···"

"이거 바꿔 달라고 작가님한테 말하면 욕하겠지?"

"그··· 글쎄···"

"아니다, 나도 감독님들이 내가 쓴 대사 수정하면 빡치는데 그냥 못들은 걸로 해."

이태환, 이수한··· 잊지않겠다. 감히 현주의 대사를 수정하다니···

내 마음속 데스노트를 업데이트하고 있던 와중,

'똑똑'

누군가 시청각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지우 씨 계시나요?"

김주하 실장의 목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김 실장.

그렇게 조심할 것 없는데..

뭔가 내가 이상한 짓 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지우씨. 류 PD한테 연락이 왔어요. 크크, 결국 이렇게 되네요. 절대 지우 씨 안 쓸 것처럼 하더니 대본리딩 하자네요. 대본 뽑아 드릴까요?"

들고있던 대본을 흔들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저승카페] 연습하고 있었어요."

"네?"

현주와 연습하던 대본은 유수영 작가의 [저승카페] 대본이었다.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솔직히 어떻게 감히 류창진 PD가 나를 까겠나.

내가 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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