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33화 (34/121)

33.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33.

청담동 한 빌라.

얼핏 봐도 넓어 보이는 집. 내부는 잘 정돈 되어있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상반되게 여러 운동기구와 안마기, 반신욕 기계들로 꽉 차있어 어쩐지 번잡스러운 느낌이 든다.

'띵동'

인터폰의 화면을 보고 문을 열어 주는 한 남자. 길쭉하고 탄탄한 실루엣.

배우 이정건이었다.

"정건아 형 왔다."

"어어···"

먼데 사는 아들을 챙기는 엄마처럼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부터 챙기는 매니저.

"형 대충 올려두고 와요. 내가 정리할게."

"어휴··· 맨날 닭 가슴만 먹지 말고 이것저것 챙겨 먹어."

"양배추랑 브로콜리 꾸준히 먹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거 먹고 어떻게 사니."

그러면서 냉장고 정리를 끝내고 조그마한 생수 한 통을 들고 소파에 앉는 매니저.

"형 사장님은 뭐라셔."

"재계약 니가 말한 조건에 다 맞춰주시겠데."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계약서 줘봐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말하는 이정건.

"야, 너 사장님 앞에서는 그러지 말어라. 좋아하는 티라도 좀 내. 사인하러 가서는 그러면 안 된다 진짜!"

그러면서 서류가방에서 뒤적거리며 계약서를 찾는 매니저.

이정건에게 계약서를 건네면서 흘린 한 부의 대본.

이정건은 대수롭지 않게 주워들었다.

계약서보다 먼저 읽기 시작하는 대본.

"형 이거 뭐야? 내용 좋다. 참신한 데?"

"어? 그게 왜 거기 껴들어갔냐. 다 보고 그냥 버려."

대본에 집중한 채, 매니저의 말을 흘려 넘겨 버리는 이정건.

한참을 읽던 이정건이 대본을 덮으며 매니저에게 돌려줬다.

"형 이거 좋은데?"

"왜? 그거 하게? 안돼, 니가 무슨 단막극이냐. 주말 10시 들어가도 고민할 판국에."

"아니, 내가 들어간다는 게 아니라, 회사에 신인들 주기에 딱 좋은데. 짧은 단막극인데 호흡이 좋아. 캐릭터 호응도 좋고. 처음 보는 작간데 신인인가?"

대본을 받아든 매니저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린다.

"작가가 문제가 아니라 PD가 좀··· 조만간 찍혀서 나갈 거라 소문이 파다해."

"그래? 왜?"

타인의 불행만큼 재미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

이정건이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류 PD라고··· 알라나?

"무슨 작품했는데?"

"아직 작품은 없고, 이제 입봉이야."

"에이 그럼 난 모르지."

턱을 긁적이던 매니저가 살짝 설명하기 귀찮은 듯이 말했다.

"너 얼마 전에 [민주를 기다리며]봤냐? KBC에서 단막극 대신에 단편 독립영화 틀어준 것."

"아니, 보지 않았는데 그 짤방? 그건 봤지. 스윗가이 짤."

"어어, 그거 맞아. 그거 담당했던 게 류 PD야. 그거 터지고 KBC 뒤집어 졌잖아. 공영방송의 가치를 훼손했다나 어쨌다나. 그것 때문에 100분 토론도 하고 방심위 경고 먹고, 드라마국장이 사장실에 끌려가고···"

"아~그래서 그 PD 꺼 안 한다?"

"꼭 안 한다기 보다, 우리 회사에서 갈 필요가 없다는 거지. 단막극이 사실 좀 그렇잖아. 입봉하는 PD들 안면도 좀 트고, 신입 트레이닝도 좀 하고. 그런데 굳이 시청률도 안 나오는데 찍혀나갈 PD가 하는 거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지. 좀 있으면 종편도 드라마 찍는다는데, 신입들 보내려면 차리리 그쪽으로 보내는 게 좋다 이런 생각이야.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규모 좀 큰 회사는 다 같은 생각일 걸?"

"쓰읍··· 아까운데."

"그건 그렇고 너 군대는 갔다 왔다고 했나?"

"어! 나 병장 만기전역이야. 전역증 보여줘? 나 아직 들고 다니잖아."

자랑스러운듯이 지갑에서 전역증을 꺼내 보이려 하는 이정건.

"됐어 인마."

"갑자기 군대는 왜?"

"회사에서 확인해 볼 게 있데. 내일 혹시 모르니까 전역증도 들고 와. 복사해놓게."

"어어, 알았어."

용건이 끝난 듯 짐을 챙기는 매니저. 그리고 방금 생각 났다는 듯이 물었다.

"내일 뭐해?"

"나? 하체."

"어휴··· 그거 말고, 개인적인 일 없으면 회사로와. 계약서 서명하게."

"어··· 알았어. 내일 봐 형."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서는 매니저.

이정건은 매니저를 배웅한 뒤,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쓰레기통에 있던 대본을 다시 꺼냈다.

'[저승카페]라···'

그리고 대본의 마지막 대사를 조용히 읇었다.

'문제의 해답은 항상 문제 곁에 있어요···'

그 대사를 보고 요즘 그를 괴롭히는 문제를 고민했다.

***

"이지우 씨, 이거. 이거 들고 내일 현성 병원 가셔서 검사 하시면 됩니다. 이건 어머니 접수증."

"네, 감사합니다. 여기 실장님이 말씀하신 자료예요."

김 실장이 내미는 접수증 두 장을 받아서 챙기고, 이전 내가 [폭력의 사슬]에서 부상 당했을 때의 진료기록 및 각종 증명서를 김 실장에게 넘겼다.

내가 청운에 들어왔을 때 정말 마음에 드는 점이 이런 것들이다. 계약서를 쓰자마자 건강검진을 시켜 준다. 소속사와 계약된 병원에서 해서 일반인과 동선도 분리돼있고, 대기시간도 없다고 했다.

거기에 지속적인 케어를 위해 이전에 있었던 병이나 부상까지 체크하고 관리한다.

배우가 제일 중요하다는 장인호 사장의 마인드였다.

나는 40대 중반까지 건강했기에 나보다는 어머니가 걱정되었고, 비용을 내가 낼 테니 병원만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 실장은 회사 비용으로 어머니 건강 검진까지 잡아 준 것이다.

대충 몇 번 청운 엔테테인먼트에 와보니, 김 실장이 참 유능하다는 게 느껴진다. 장인호 사장의 신임을 받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중요한 결정은 장인호가 내리지만, 그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대소사는 모두 김 실장 선에서 해결하는 느낌이었다.

또한 왜 팀장이 따로 안 붙고 김 실장이 붙었는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화제성이 높은 나를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면 가실까요?"

"네."

병원 관련된 용건을 정리하고, 회사 주차장으로 내려가 보니 이미 로드 매니저인 이동수가 차를 대기시켜 놨다.

"지우 씨, 이제 출근할 일 있으면 지하철 타지 마시고 저 부르세요. 오늘 갑자기 회사 오셔서 얼마나 놀랐다고요."

차에 타자마자 이동수가 말했다. 아마도 아직 팀을 꾸린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오늘 내가 오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실장님 어디로 갈까요?"

"KBC 본사."

"엥? 지우 씨랑 K 본부 가신다고요? 으, 엄청나게 싫어 할 텐데."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출발합시다."

김 실장 버릇? 습관? 김 실장은 항상 말을 높인다.

나에게도, 이동수한테도. 처음에는 초면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내다 보니 알겠다. 이 사람은 그냥 말을 높인다.

타고나게 예의가 바르달까. 배우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 어찌 보면 타고난 매니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분쯤, 차를 탔을까. 류창진 PD에게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동수 씨, 미안한데 창문 좀 닫아줘요."

살짝 추워진 것도 있고 불편하기도 했었기에 창문을 닫아달라 부탁했다.

"응? 아하하. 지우 씨 불편하게 왜 그래요.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아··· 실제 나이를 따지면 내가 너보다 한 20살 쯤은 많을 걸. [폭력의 사슬] 팀의 조감독이었던 경수형과도 몇 달 만에 말을 편하게 했으니까.

형이라 부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냥 동수 씨라 부를게요. 그게 편해요. 동수 씨 미안한데 저기 다이소 앞에 잠시 세워주시겠어요?"

"뭐 살 것 있어요? 말해요. 내가 사다 줄게요."

"그럼 조그마한 자물쇠 하나 사다 줄래요?"

***

확실히 영화감독들이랑 다르게, PD들은 이게 좋다. 잡으러가기 편하달까. 영화감독들은 잠적 하고자 하면 아무도 모르게 도망 다닐 수 있지만, PD들은 출근해야 하거든.

그렇기에 김 실장은 미리 연락 없이 쳐들어가자고 했다. 어차피 전화도 안 받을 테고, 전화받아도 이지우가 간다면 피할 거라고.

KBC드라마국 2팀의 자리로 가자, 예상대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던 류 PD.

"안녕하세요. 류 PD님"

"네네."

김 실장의 인사를 대충 흘려 받으며 류창진 PD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김 실장 뒤 나를 보고 '히이익' 거리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니!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이지우 씨가! 와요!"

벌떡 일어나 외치는 류창진 PD.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살짝 놀랬다.

당황과 분노가 섞여 말이 잘 안 나오는지 음절이 끊어진다.

놀라거나, 화내거나 할 줄은 알았지만, 둘 다 할 줄이야.

소란이 일자 드라마국 전체가 류창진 PD를 보고 있는 상황. 거기에 요새 화제의 인물인 나, 그리고 여기서 나와 류창진 PD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청운 엔터 김주하 실장이라고 합니다. 류 PD님 우리 이러지 말고 차나 한잔하시면서 이야기 좀 할까요?"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김 실장이 상황을 정리해보려 하자 마지못해 따라나오는 류창진 PD.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로 가 앉았다.

류창진 PD는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이동수가 카페에서 커피를 내어오자 김 실장이 말하기 시작했다.

"자자, 이거 한잔하면서 저희 말도 좀 들어봐요. 류 PD님. 생각해보세요. 저희도 피해자에요. 우리 이 배우가 그런 영화인지 알고 출연했겠어요?"

응 알았다. 정치적 이슈가 될 것도 알았고.

"그리고 그런 영화를 찍었으면, 각본이랑 연출한 감독을 욕해야지, 배우가 무슨 잘못입니까. 시킨 데로 열심히 한 죄뿐인데. 안 그래요?"

그래. 나는 잘못 없다. 이태환이 나쁜 놈이다.

"이슈가 된 것도 그래요. 인터넷에 우리 지우 씨가 글 싸질렀나? 그리고 우리도 괜히 정치적 이슈가 배우한테 묻어서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몰라요."

별로 곤혹스럽진 않다. 정치적 이슈는 영화가 가져갔고 화제성은 내가 빼먹었으니.

"혹시··· 위에서 압박 줘요? 이지우 씨 쓰지 말라고? 와 이거 KBC 그렇게 안 봤는데 안 되겠네. 자체적인 블랙리스트 만들어서 배우들 자른다고. 이게 공영의 가치 훼손이지 딴 게 훼손이야? SBC '그것이 궁금하다' 제보해야겠다. '그궁' 박 PD 나랑 고등학교 동창인데 잘 됐네. 아주 그냥 딱이야."

오 협박까지··· 김 실장 말 진짜 잘하네. 30대 초반에 실장까지 간 게 그저 운이 좋거나 사람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니었다.

김 실장의 쉴새 없는 책임회피, 피해자 코스프레, 협박에 질렸는지 PD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그런 거 없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요즘 시대에 블랙리스트가 어딨습니까."

있다··· 몇 년 뒤면 생긴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어차피 저는 별 권한도 없어요. 사과하러 온 것 같지도 않고. 사과할 일도 아니지만."

김 실장이 슬그머니 대본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이번에 들어가는 단막극 [저승카페]..."

"하··· 씨.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염치가 없으셔도 그렇지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이지우 씨한테 배역을 달라니요. 우리 AD가 이지우 씨 청운에 간지 모르고 실수로 뿌린 거 같은데, 제가 하는 프로그램에는 이지우 씨 안 씁니다. 커피 잘 마셨고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니, 너무 감정적으로 그러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시···"

"감정적이요? 감정적인 거 맞고요. 저 단막극하고 잘릴지도 모릅니다. 감정적으로 이지우 씨와 일하기 싫습니다. 아시겠어요! 네?"

김 실장이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듣지 않고 일어서는 류 PD.

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류 PD님. 잠시만요."

여지껏 가만히 있던 내가 류 PD를 잡자, 그도 살짝 놀라며 나를 본다. 그리고 이내, 어딜 감히 자신을 잡느냐는 식으로 나를 본다.

"놓으세요."

류창진 PD는 자신이 참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이 말했다. 참고 있으니 못 참기 전에 놓으라는 듯이.

음···

진짜 20살의 혈기왕성한 나였다면, 어땠을까? 멱살이라도 마주 잡았을까?

그리고 차비조차 없어서 촬영장까지 걸어 다닐 때의 나였다면 무릎이라도 꿇었을까?

톱스타였을 때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차를 타고 오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다. 류창진 PD의 말대로 사과할 일이 아니기에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나빴던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빴을 뿐.

한번 죽었던 나의 대답은 좀 달랐다.

"류 PD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붙잡은 그의 손에 아까 다이소 앞에서 샀던 자물쇠와 열쇠 묶음을 올렸다.

'자물쇠와 열쇠는 같은 곳에서 만들어지듯이, 문제의 해답은 문제 곁에 있어요.'

[저승카페] 마지막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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