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과거를 사는 남자
30.
"이 새끼 잡아와"
"네?"
예기성의 말에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 장인호는 놀랐다.
이 새끼라니? 그 점잖은 예기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생각지 못 할 말이었다.
예기성이 누구인가.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 배우 아닌가. 그것보다 더 유명한 건 그의 인격이다.
연기와 영화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는 한없이 고상하신 분이 대뜸 영화 홍보용 전단지를 들고 와서 사람을 잡아 오라니···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 진정하시고··· 무슨 일인지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장인호 사장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점잖으신 분이 저렇게 화낼 정도라면 분명 상대가 잘못했을 것이고, 예기성 배우가 말해주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새끼, 보이지, 여기 담배 불붙여주는 이 호랑 말코 같은 놈. 이놈 잡아 와. 아주 혼쭐을 내주게."
예기성 배우는 테이블 위로 홍보지 하나를 올렸다.
그 홍보지는 꽤 분위기 있는 영화 포스터였고 중앙에는 한 남자가 한 남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모습이 있었다.
멋있게 흘려 쓴 글씨체로 [폭력의 사슬]이라 적혀있는 제목. 그 영화 홍보지의 영화는 장인호 사장도 아는 영화였다.
아니 모르는게 더 이상하다. 독립영화의 탈을 쓰고 상업 영화들 때려잡고 있는 영화. 그 홍보지에는 조상기 기자가 극찬하던 신인 배우 이지우가 있었다.
배우 이지우. 지금 영화판과 기획사 관계자들 사이에는 유명하다. 화제성 면에서는 따라올 사람이 없고,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났다. 제작사나 기획사에서 영업과 영입을 위해 애쓰는 중이었고.
청운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였다. 조상기 기자의 비평을 보고 신규로 영입하기 위해서 자료조사를 하던 중, [민주를 기다리며] 이슈가 터졌다. 이지우의 화제성을 믿고 데려오기에는 그가 달고 오는 이슈가 미묘하게 정치적이라 고민만 하던 차였다.
조사 도중 알아낸 바로는, 중소 규모의 소속사가 낸 오퍼를 다 퇴짜 놓았다고 했다.
즉, 배우도 개봉하는 영화의 성적을 보고 소속사와 협상하겠다는 의지라 받아들였다. 신인배우 치고는 똑똑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영화가 개봉하고 초반 성적을 보고 나서 오퍼를 넣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라면 여러 군데에서 제시하는 계약서를 받고 고민할 테니. 다른 소속사가 제시한 계약 내용을 확인한 뒤 찔러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기성 배우의 반응을 봐서는 이 배우가 예기성 배우에게 큰 실수라도 한 모양이다. 그것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말이다.
조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무서운 법. 예기성 배우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에 장인호 사장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이 배우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말해주실 것을 물어보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조심스럽게 한 질문.
그에 대한 예기성의 답변은 이상했다.
"연기를 이상하게 해. 아주 이상하게 해. 왜 그러는지 물어봐야겠어. 그래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던지 그런 식으로 가르친 선생을 조져버리든지 해야겠어."
연기를 이상하게 한다고? 장인호 사장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기 기자가 누구인가. 10년 짬밥의 영화 전문 기자다. 아니다 싶으면 거대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이든, 거장 감독이든 까고 보는 양반 아닌가.
그 조상기 기자가 칭찬도 아니고 극찬했다면 적어도 예기성 배우의 눈에 차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한편 관심이 있던 배우를 영입하는 게 물 건너갔기에 아쉬워하며, 장인호 사장은 혹시나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생긴 일도 혹시 이 배우 때문에···"
이미 예기성 배우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기에 장인호 사장도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사태 파악이 끝날 때까지만 기사가 올라가는 걸 기다려 달라고 기자들에게 말해 둔 상태였다. 그 정도 소란이 있었는데도 잠잠한 것은 오로지 예기성의 이름값 때문이었다.
사태 파악을 위해 부산 국제영화제 사무국에 전화했을 때도, 예기성 배우가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만 할 뿐.
"영화제? 아 참 영화제도 있었지. 이 새끼들도 이딴 식으로 영화제 운영할 거면 때려치우든, 나를 부르지 말든 하라 그래. 경우 없는 새끼들. 그딴 썩은 눈깔로 무슨 영화를 고른다고."
"혹시 수상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겁니까?"
씩씩대던 예기성 배우가 테이블이 부서져라 '쾅'하고 내려쳤다.
"이렇게 연기 잘하는 애를 상 하나 안 주고 빈손으로 보내? 심사위원 새끼들 돈 먹인 거 아닌지 확인해 본다 그래! 개새끼들."
처음 화를 냈을 때보다 몇 배는 커진 목소리.
그리고 내려친 손끝에는 방금 이상하게 연기한다고 했던 그 배우, 이지우 사진이 있었다.
장인호 사장은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할지 고민했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지, 이상하게 한다는 건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대답은 들었지만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인호는 기자들에게 돌릴 보도자료를 만들기 위해서 꽤나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독립영화 돌풍 [폭력의 사슬]'
'한국 영화의 저력, 맨손으로 일궈낸 충무로의 기적!'
'독립영화 최초 30만 관객 초읽기!'
'스윗 가이, 배우 이지우 주연 [폭력의 사슬] 흥행돌풍'
어···
음.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성공하는데?
사실, 조짐은 있었다.
언론 대상 시사회에서 반응이 좋았다.
이후 예매율도 매우 높았다.
[민주를 기다리면서]에서 터진 정치적 이슈도 있었고, 단편영화 특선에서 나라는 사람의 화제성도 있었다. 로카르노, 부산 국제영화제 등에서 연달아 신인 감독상을 수상한 감독에 대한 화제성도 컸다.
그런데 그게 벌써 한 달 전 이야기다.
아직도 [폭력의 사슬] 흥행이 이어지는 것은 순전히 영화의 힘이다.
재밌으니까.
배급을 맡은 SJ 엔터테인먼트도 덩달아 바빠졌다.
최초 독립영화 특별관 편성이었던 [폭력의 사슬]이 슬금슬금 상영관을 늘리더니, 지금은 일반 상영관을 포함해 전국 60여 개에 달하는 상영관을 확보했다.
관객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고.
30만. 현재로서는 독립영화 중 최다 관객 스코어다.
장기 상영하는 독립영화 특성을 생각하면 내년까지 상영이 이어진다고 봤을 때, 그 이상 될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투자금 정산은 한참 걸릴 거라 예상했다.
배급사에서 발급하는 정산서는 극장 상영 종료 이후 90일 정도 걸린다. 지금 흥행을 봤을 때 최소 1개월에서 2개월은 더 상영을 할 것 같고, 정산까지 생각하면 반년 가까이 남은 셈이다.
괜찮다. 늦는다 해도 정산금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올라가는 관객 스코어를 보고 내 마음속 정산서를 열심히 새로고침 하면 마음이 따땃해···
"무슨 생각해?"
"따땃한 생각?"
"그러게 추워지긴 많이 추워졌네."
"히터 좀 더 틀어달라고 할까?"
"아니 지금 이게 더 좋아."
내 옷깃을 여미며 그 속으로 더 파고드는 그녀.
늘 가는 카페 말고 오늘은 DVD방에 왔다. 이맘때쯤 한창 유행하던 DVD방. 마음껏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고, 모든 시선에서 해방되는 곳. 우리에게 이곳보다 더 좋은 데이트 코스가 있을까.
내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그녀에게도 느껴졌나 보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종강을 앞둔 그녀는 나와 있을 때 시험공부를 하거나, 쉬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며칠 전 카페에서 그녀는 공부를, 나는 그런 그녀를 감상(?)하고 있는데 야생의 여고생에게 습격받았다.
지우 분식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도 했고, 근처에 여고도 하나 있고 하다 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저기 저 남자 이지우 아니야?’
'저년은 누구야? 수군수군'
'그냥 평범한데? 수군수군'
대충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뒷자리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카페에서 나와버렸다.
내가 연예인이지 그녀가 연예인이 아니니까.
그동안 편하긴 했지. 최근 영화가 극장에 개봉하고 난 뒤 인지도가 확 올라간 게 느껴진다. 거기에 인터넷에 퍼진 내 사진까지.
연예인으로서 자각이 좀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관리가 필요하기도 했고.
과도한 관심은 그녀에게 불필요하다. 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대중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했을 때, 그것이 부정적이었을때 그녀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말이다.
각 종 인터넷 기사, 앞으로 더 커질 SNS,. 가십과 루머를 달고다는 연예인의 삶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다. 그렇기에 내가 아닌 내 가족이 그런 부정적인 관심에 노출되게 하고 싶지 않다.
개인이 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통제 할 수는 없었다.
방법이 필요했다.
그날 이후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카페를 다시 찾지 않게 되었다.
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 카페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추억의 장소가 아니게 됐다.
추억은 과거를 미화시킨다. 이미 과거를 사는 내겐 현재가 더 아름다웠다.
***
김범이 대뜸 연락을 했다. 밥 한 끼 하자고. 그도 이제 차기작을 고르는 중이었고, 딱 봐도 뭔가 고민이 있는 목소리였기에 그러자고 했다.
"요즘 뭐해? 연습은 하고 있냐?"
"뭐 그냥저냥."
뭔 일인데 저렇게 고민할까.
"뭔 일이야.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이야기해 봐."
"나 대학 갈까?"
"푸흡."
먹던 짬뽕이 코로 올라가며 기침이 나왔다.
김범이 대학교라··· 전직 조폭 출신이 대학 가면 재밌긴 하겠다. 영화 한 편 뚝딱이네. [보스는 대학생] 나중에 현주한테 아이디어 줘봐야겠다.
김범은 말 그대로 길바닥 출신. 따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기에 몇 개의 대본을 추천해 준 상태였다. 캐릭터 분석에 참고하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느꼈을 테지.
내게 작품이 들어온 것처럼 그에게도 꽤 작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뜻 출연을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없어서였지 않을까. 내 1회차 삶에서와 같이 조폭 영화만 주야장천 하지 않는 것을 봐선 빚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됐나 보다.
당장 들어오는 배역을 덥석 물지 않는 걸 보니.
조폭, 건달, 양아치. 지금 들어오는 배역이 죄다 그런 거겠지. 안봐도 뻔하다.
[폭력의 사슬]의 '진태'라는 역할이 그에게 잘 맞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연기가 나온 거다.
그걸 아는 그이기에, 아예 다른 캐릭터성을 가진 역할을 맡았다가 망하면 더 이상의 배역을 따낼 수 없을 거라는 위기감이 있었을 것이다.
"연기를 배우고 싶단 거네. 흐음···"
그때 울리는 전화벨.
"아! 미안, 잠시만."
그렇게 김범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지우 씨 맞습니까?
"네? 네."
-YC 엔터 실장 박···
그 뒤로는 듣지도 않았다. 모르는 소속사다. 내가 모르는 소속사라는 건 그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다. 길다고 해도 그저 그런 회사라는 것이고. 기계적으로 늬에늬에 대답하다가,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마음 같아서 그냥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이 상대나 나나 시간을 아끼는 방법이긴 한데, 업계가 좁다 보니 소문이 금방 퍼진다. 신인 주제에 건방이 심하다고 소문낼 필요는 없으니까.
여러모로 시간은 나의 편이다. 나는 향후 어떤 소속사가 크게 될지 잘 알고 있고, [폭력의 사슬]은 계속해서 독립영화의 신기록을 경신하며 착실히 내 몸값과 이름값을 올려주는 중이었다.
요새 나를 찾는 전화가 확실히 늘었다. 배역 제안이나, 오디션 제안도 크게 늘었고. 길에서 조금씩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업계 관계자들의 눈이다. 그리고 내 계획은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그들은 더 분석적이고 정확한 시각으로 나의 스타성과 화제성을 평가할 테니.
그 결과, 이수한 감독, 이태환 감독 그리고 단편 독립영화를 찍었던 두 감독에게까지 부탁이 들어왔다.
대부분 독립영화 배역 제안이었다. 고만고만한 인맥들의 고만고만한 배역들.
독립영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독립영화를 찍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수한 감독과 이태환이 이례적으로 능력이 뛰어나서 같이 작업했던 것이고, 인제 와서 예술을 한답시고 대학생 졸업작품 수준의 작품까지 다 출연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가족을 지킬 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
정산금으로 예정된 금액이 당장 2억이 넘는다. 새로고침 할 때마다 금액은 늘어나고 있고. 그런 내가 급하게 작품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ON스트릿'과의 계약으로 당장 생활비도 크게 걱정이 없는 상황.
내년 1월 선댄스 영화제까지 'ON스트릿' 촬영만 소화하며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었다. 내 덕분에 'ON스트릿'은 내가 유일하게 활동 하는 곳이 된 셈.
내 사진이 줄줄이 걸려있는 'ON스트릿'도 [민주를 위하여] 이후로 트레픽이 폭증했다고 들었다. 이걸로 사기 미수의 빚은 털었다고 봐야지.
전화를 끊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울리는 전화벨. 김범에게 다시 한번 더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식탁 매너가 너무 없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 없는 연예인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 장인호입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신지요?
청운··· 청운이라··· 아! 블루 클라우드?
블루 클라우드가 회사를 확장하면서 회사명을 바꿨고, 그 이전 회사명이 청운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지금은 배우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지만, 나중에 회사를 확장하여 뮤지컬, 연극 제작 및 드라마 제작까지 겸하게 되는 꽤 큰 종합 엔터테인먼트로 성장한다.
그리고 지금 시기라면···
얼마 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영화계 원로 예기성, 그분이 계신 곳이었다.
드디어 원하는 패가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걱우걱 밥을 먹고 있는 김범을 쳐다봤다.
대학 말고 연기를 배울 곳이 있다.
김범 할머니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손자가 취직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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