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29화 (30/121)

29. 동류혐오

29.

한 배우가 있다. 전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다.

이립(30세)에 처음으로 백룡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불혹(40세)의 나이에는 3대 영화제의 대상을 모두 수상했다.

그리고 환갑까지 3대 영화제 대상의 숫자를 두 자릿수 까지 불렸다. 그의 이름 앞에는 대배우라는 수식어가 쓰였고, 어디를 가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그는 몹시 우울했다.

그는 소년 같이 호기심이 넘쳤고, 청년처럼 정열적이였었으며, 노인의 지혜로움을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꿈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을 이뤘기에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다.

배우로서는.

그는 영화가 좋고 한국 영화가 더 진일보하기를 바라며 그 중심에 자신이 있길 바랐다.

새로운 꿈이 생겼다.

언젠가 세계 속에 한국 영화가 우뚝 서, 빛 내기를 바랐다.

사랑이라 해도 좋았다.

그는 영화를, 한국 영화를 사랑했다.

어떨 때는 제작자로, 어떨 때는 배우로, 어떨 때는 투자자로 도전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고, 아직 한국 영화는 어설펐다. 기술 자본 시스템 배우. 어느 하나 견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그는 다시 한번 꿈을 잃었다.

스스로 자신을 첫 번째 파도라 생각하고 자신의 뒤를 이어줄 새로운 물결을 기다렸다.

한국 영화가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나, 실험적인 영화에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참여했다.

스스로가 밑거름되어 다음 세대를 위한 옥토를 만들어 주리라 다짐한 후 한 행동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준다고 했다.

별 쓸데없는 일을 한다 생각했다.

그는 너무 많은 상을 받았고, 너무 많은 찬사를 들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트로피 따위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집에 더 이상 놔둘 데도 없고.

첫날 개막식에 자리해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받았다. 공로상의 대가라고 말하지 못하는 애매한 주최 측의 태도가 불편했지만, 알겠노라고 했다.

얄궂다. 그나마 독립영화와 한국 영화 생태계를 위해 애쓰는 몇몇 지인들이 영화제 관계자로 있기에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래서 참석한 개막식.

주최 측의 배려로 앉은 특별석에 무료하게 앉았다.

가끔 몇몇이 인사하러 왔지만, 그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불편한 듯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바쁘다.

말 상대를 해줄 사람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 동년배 배우들은 대부분 은퇴하여 낚시나 바둑 혹은 다른 취미를 하기에 바쁘다.

그는 촬영장에서도 영화제에서도 선생님이었고, 불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상영되는 개막작.

좋은 영화라 생각했다. 신인 감독이라 생각되지 않는 연출. 그리고 각본.

영화가 진행될수록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배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흠 잡을 곳 없는 연기. 연기라는 것은 정답이 없다. 배우의 개성에 따라 그리고 표현되는 상황 감정에 따라 얼마든지 정답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의 눈높이와 경험에 따라 정답은 바뀐다.

계량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분야. 누구에겐 100점이 누구에게는 0점이 될 수도 있는 게 연기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바쳐 즐겁게 일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는 연기가 좋았다.

언젠가 모두에게 100점짜리 연기를 하기 위해 그는 아직도 고민하고 연습했다.

그런데 스크린에 비친 젊은, 아니 어린 배우의 연기.

완벽에 가깝다.

100점 만점에 99점의 연기.

100명에게 물어봐도 99명은 같은 대답을 할 것 같은 연기.

저 배우는 연기를 아주 사랑하거나, 아주 증오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둘 다 이거나.

저 정도의 완벽한 연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행을 감수했을까. 얼마나 연기를 사랑하면 저리 파고들었을까.

그 마음 한편에서 드는 의아함.

그런데 왜 저런 연기를 할까? 왜 기계적이라는 느낌이 들까. 치밀하고 정밀한 로봇처럼 혹은 우수한 회사원이 맡은 일을 처리하듯이 연기한다.

조금의 과잉도 없이.

과잉이 있기에 누군가에게 100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0점이 되는 것이 연기인데···

누구에게나 99점은 받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100점을 받을 수 없는 연기를 하는 배우.

동류 혐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배우를 보고 있노라면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7살에 데뷔해 61세까지 연기한 54년 경력의 배우 예기성은 20세의 배우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았다.

꿈이 없는 사람의 연기였다.

저래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예기성은 이룰 능력이 안 되어 포기했던 첫 번째 꿈. 저 아이는 한 걸음만 디디면 닿을 거리에서 그 꿈을 포기한 듯 보였다.

도전하고 부딪치고 깨져가며 더 나아가야 할 젊은 배우가 벌써 모든 것을 좌절한 듯이 한계를 긋는 연기를 해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모든 사람에게 120점, 혹은 200점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아이. 자신은 감히 흉내도 못 낼 저런 연기를 하는 저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기계와 같은 완벽함으로 연기하는 것이 증오스러웠다.

연기란, 인간이 인간을 연기하는 것임으로.

노년의 원로 배우 예기성은 일정을 바꿨다. 공로상 수상과 더불어 '올해의 배우'의 시상자로서 말이다.

거기서 저 배우를 만나 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연기를 했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했다.

이지우의 답변이 궁금했다.

어쩌면 두 번이나 좌절했던 자신의 꿈을 완성해줄 두 번째 파도···. 아니, 거대한 해일이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됐기에.

영화제 심사위원의 눈알이 어떻게 돼버리지 않은 이상 '올해의 배우' 상은 저 이지우라는 배우에게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식 당일.

'올해의 배우'는 이지우가 아닌 다른 배우에게 돌아갔다.

시상식이 끝났다.

예기성은 그만 참지 못하고 특별석을 박차고 나가 심사위원석에 쌍욕을 퍼부었다.

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

[폭력의 사슬] 시사회가 잡혔다.

원래라면 하지 않기로 했던 시사회. 개봉 전 예매석이 풀리면서 일부 상영관의 표가 매진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배급사에 기자나 평론가들이 전화하는 경우가 많아 아예 언론 시사회를 계획하고 열게 되었다.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일이다. 그전에 화제 몰이를 착실하게 한 덕분이다.

그리고 그 화제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원래 내 계획은 로카르노에서 경쟁 부분 진출하면, 영화 관련 업종 혹은 시네필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민주를 기다리며]로 일반 대중들의 시선을 끌게 한 다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헌데, 모든 일이 내 예상보다 높은 성과를 냈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현재의 감독’ 섹션, 신인 감독상

부산국제영화제, 2관왕.

거기에 [민주를 기다리며]는 나로서 초대박이 났다. 이어지는 독립 단편 2연타까지 나름의 성과를 거뒀고.

짤로 표현되는 밈을 통해 1~20대 중 내 얼굴의 노출이 늘어났다.

[민주를 기다리며] 영화 중 담배 피우는 모습, 휴대폰을 보는 모습 등··· 몇 가지 버전으로 파생되어 소비되어 갔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누군가 어느 게시판에 고민을 올려놓으면 [민주를 기다리며]의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을 올려놓고 ‘힘내’한다.

담배를 찰지게 피운다나.

그러다 보니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다. 편의점에 들렀다가 중학생에게 ‘담배 아저씨’라는 소리도 들었다.

어느 아저씨에게는 ‘스윗 가이’라고 불렸고.

시사회가 시작하기 전 대기실에서 모처럼 [폭력의 사슬] 촬영팀이 모였다. 현주만 빼고.

내가 오지 말라고 했다. 아직 기자들에게 현주를 노출 시키기에는 내가 그녀를 지켜줄 힘이 없기에.

언제나 그랬듯 이수한이 분위기를 주도한다.

"지우야, 요새 잘 나가더라. 무슨 인터넷에 들어가기만 하면 죄다니 얼굴이냐."

"그러게요. 슬슬 그냥 다니기 힘들어지네. 차 사야 하나."

"면허는 있냐?"

"아뇨. 없네···"

수능을 치고 공백기에 이수한 감독, 영화를 찍는다고 바빴다.

그전엔 돈이 없었고.

그런 걸 떠나서 운전하기 싫었다. 이번 생에는 운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러지 말고 소속사에 들어가. 너 간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곳 천지 일 텐데. 김범 너는 소속사 잡았냐?"

"아뇨. 나도 아직 안 잡았는데."

나는 아직 소속사를 들어갈 계획이 없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먼저 소속사를 찾아갈 계획이 없다.

김범은··· 아마도 소속사가 쫄아버린게 아닐까? 사고 칠 관상이잖아. 실제로 내 예전 기억 속의 김범은 의외로 전혀 사고를 치지 않았다.

쟤 생각보다 머리가 좋거든.

그나저나 소속사라···

***

[폭력의 사슬] 팀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사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KBC 드라마국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단편 독립영화 특선을 기획하고 책임졌던 류창진 PD는 그 초상집의 상주라도 되는 마냥 죽을상이었고.

분명 그의 잘못이 맞다. 이태환 감독의 멱살을 잡아채서라도, [민주를 기다리며]를 확인했어야 했다.

아니면 방영 하루 전날 테이프를 받았을 때 방송 편성의 차질이 생기더라도 차주 영화랑 순서를 바꾸고, 다른 영화를 찾던가 해야 했다.

솔직히 조금 억울한 면이 있기도 했다. 이태환 감독 전작이 서정성 짙은 예술영화인데, 이런 사회 반영적인 영화를 찍을 줄 알았겠는가.

게다가 류창진 PD는 단편 독립영화 특선 이후에 기획되어있는 단막극까지 맡고 있었다. 바빴다는 뜻이다.

그리고 2% 남짓의 시청률이 나오던 단막극이 들어가던 자리에 들어간 독립영화가 이리 화제가 될 줄 예상했겠는가.

그리고 이지우!

3개의 영화에 이지우라는 이름이 겹쳤을 때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소속사가 없다느니, 전화번호가 없다느니 그런 AD의 변명을 넘어가 줬으면 안 됐다.

동명이인이겠지··· 하고 넘겼으면 안 됐다.

'이게 이지우 특선이지 무슨 단편 독립영화 특선이야!!"

감성태 CP가 갈구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어이 류 PD 뭐 좀 묻자."

"네?"

예능국의 스타 PD, 권 PD였다.

"혹시 말인데··· 이지우 씨 연락처 있냐?"

"이이익···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꽈아아!"

"아냐 아냐, 미안하다야. 못 들은 거로 해라."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권 PD가 선배이기에 차마 욕은 못 하고 얼굴만 시뻘게진 채 머리를 쥐어뜯는 류창진 PD였다.

류창진 PD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전화번호 알면 욕이라도 할 텐데, 나한테 왜 그러느냐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고작 단편 영화에서 그런 인생 연기를 했냐고 말이다.

이지우의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비례해서 쪼그라드는 그였다. 회사 편성을 조져가며 이지우를 띄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가온 드라마국 2팀 CP 감성태.

"류 PD 따라와 봐···"

"네···"

요즈음 들은 목소리 중 가장 누그러진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일말을 희망을 가지며 류창진 PD는 감성태 CP를 따라갔다.

드라마국 CP 실에 들어가자 CP는 류창진 PD 앞에 기획서 한 묶음을 올렸다.

"뭐··· 뭡니까? 이건."

"골라··· 일단 묻지 말고 골라봐."

여러 개의 드라마 기획서였다. 몇 개의 기획서를 읽어본 류창진 PD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기획서상 나와 있는 날짜의 새 작품을 한다는 건 3개월 뒤의 SBN에서 하는 대작 판타지 드라마랑 맞붙는 작품을 하라는 뜻이니까.

"CP님···  살려주세요. 저 이번 것까지 말아먹으면···"

"어휴 멍청아. 너 살려주는거야 인마. 지금 우리 대하사극이 SBN에서 하는 퓨전 사극에 묻혔잖아. 이거라도 띄워야 니가 살지. 지금 맡고있는 단막극 끝나면 이거 받아서 해봐."

궤변이다. 놓여있는 기획서 대부분 안뜰게 뻔해서 짱박아 놨던 기획들이니까.

참지 못한 류창진 PD는 결국 질렀다. [민주를 기다리며] 이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얼마나 가시방석이었는지 모른다.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CP의 말도 안되는 제안을 받는 순간 터져버렸다.

"아니 외주도 아니고 자체제작인데 이 예산, 이 인원으로 주말 10시를 어떻게 채웁니까. 배우는요? 스탭은요? 저 보고 이거 껴안고 죽으라는거죠. 맞죠? 네?"

화가 나서 질러 본 소리였는데.

말이 없는 감성태 CP.

'띄우라고 주는게 아니라 죽으라고 주는거라고?'

"이이익!"

류창진 PD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쥐어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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