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마법의 가을
28.
로카르노에서 조상기 기자가 쓴 기사가 나간 이후. 몇 번의 인터뷰, 그리고 고만고만한 소속사에서 찔러보기식 전화 몇 번이 왔다.
그 이외에는 조용했다.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다. 영화를 보지 않고 소문과 기사만 보고 노예계약 하려는 뻔히 보이는 속셈이다. 20살의 연기 천재. 얼마나 먹음직스럽겠는가.
꺼지라고 했다.
계획이 있다.
상을 받고 제일 먼저 포스터에 '로카르노 영화제 신인 감독상'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SJ 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받아 포스터도 좀 더 다듬었다.
아무래도 강진호 작가는 사진작가다 보니 편집 툴을 사용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포스터에 관한 디테일 또한 부족했다.
SJ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중 포스터 전문 용역업체에 강진호 작가를 보냈다. 본인도 포스터 업계에 안면을 틔우게 돼 매우 만족했다.
전문적인 카피라이터들이 달라붙어 홍보문구도 수정하여 포스터 최종본을 받았다.
아마 이때부터 안심했던 것 같다. 애초에 더 나아질거라 생각지 못했던 [폭력의 사슬]의 포스터가 진일보해서 나타났을 때, 대기업 배급사는 다르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영화를 SJ 엔터테인먼트에서 굉장히 신경 쓰고 있음이 보였다.
덕분에 나도 영화 제작에서 한 발 뺀 뒤, 좀 여유롭게 있을 수 있게 됐다. 전생이었다면 가장 바쁜 시기였을 것이다. 개봉하는 영화 홍보를 위해 쇼 프로나 시사회 등에 불려 다녔을 테니.
[폭력의 사슬]은 그런 홍보를 전혀 하지 않기로 했다. 인지도가 전혀 없는 배우와 감독이 시사회를 해봐야 홍보비만 아깝고, 자존심만 상하니까.
그리고 9월이 됐을 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력의 사슬]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건 오히려 별일이 아니었다.
이전에 작업했던 두 개의 독립영화. 너무 기대하지 않았기에 어디 출품하는지 묻지도 않았던 그 영화 두 개.
거의 동시에 그리고 차례로 받았던 두 개의 전화.
두 감독 다 짜기라도 한 듯 같은 말을 내뱉었다.
'우리 영화가 KBC 독립영화 특선에 뽑혔어요.'
그게 말이 돼?
아니 그걸 떠나서 방송사에서 한 배우가 3주 동안 3개의 영화에 나가는 걸 허락해준다고?
독립 단편 영화 특선이 아니라, 이 정도면 이지우 특선 아니냐?
짧게 고민해본 결과, 드라마국에서는 [민주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이지우가 공모로 뽑은 영화에 나오는 이지우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이태환 감독은 최대한 완성본을 숨기고 방송이 펑크 나기 직전에 가져다줄 거라 그랬었다. 방송국에는 당연히 [민주를 기다리며]의 영상을 못 봤을 테고. 기획서를 꼼꼼하게 읽어봤다 쳐도 ‘이지우’라는 사람이 인터넷에 검색되지 않았을 테니 동명이인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의해볼 소속사도 없었고.
자신들이 뽑은 두 편의 영화에 내가 출연하지만, 어차피 주연과 조연. 크게 문제가 없다고 어겼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0월 1일, 첫 주 금요일이 다가왔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민주를 기다리며]가 조용히 방영됐다.
독립 단편 영화 특선.
시청률 2%도 안 나오는 프로그램.
시청률 2%. 그 대부분은 영화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여있는 게시판은 독립영화 특선이 방영되기 수일 전부터 관심을 받았고, 공영방송이 제 기능을 한다고 칭찬했다.
영화가 끝난 늦은 밤. 그 게시판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민주를 기다리며] 에 나온 수많은 상징적인 의미들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분량의 분석 글. 여러 사람이 호응하고 반박하는 사이에 그 글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물어 뜯겼고, 어느 순간 터졌다. 지나친 관심에 작성자가 글을 삭제해 버렸다.
바로 올라온 새로운 게시글.
이후 유행처럼, 놀이처럼 번진 영화 분석.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견해를 더한 분석 글들이 올라왔다.
누군가 그랬다. 정치와 종교는 토론하는 게 아니라고.
어떤 이의 글은 너무 진보 편의주의적인 분석이었고, 다른 이의 글은 너무 보수 만능주의적인 분석이었다.
영화적 관점에서 ‘작품’을 ‘작품’으로만 보는 해석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글들에 묻혀 관심받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아직 초보적인 기능밖에 존재하지 않은 인터넷 커뮤니티. 하지만 그 파괴력은 엄연히 실존하였고 그것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이 이슈는 꽤 먹음직한 이슈였다.
인터넷 기자 김 아무개 씨는 지난밤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슈들을 모았고 그중에 하나를 선택해 기사를 써 갈겼다.
큰 화재의 시작은 작은 담뱃불에서 시작하듯 논란의 시작 또한 이 작은 기사에서 시작했다.
'[민주를 기다리며] 공영방송, 이래도 되는가?'
ㄴ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것도 아닌데 왜?
ㄴ문제작? 이런 기사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 같은데?
ㄴ작품을 작품으로만 봐야지 이건 뭐···.
ㄴ기자가 꼴통인 듯
ㄴ니가 빨갱이인가 보지?
ㄴ주인공 잘생김
주인공 잘생김은 내가 쓴 거다.
뭐?
왜?
어쨌든.
부정의 힘은 강하다.
특히 인터넷에서.
헐뜯고 혐오하고 비난하는 힘은 익명의 가면 아래 더 강하게 움직인다. 논란은 좌우 논리를 막론하고 타올랐고, 여러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당하며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이슈의 중심은 '공영방송의 가치'에서, [민주를 기다리며]라는 영화로, 다시 이태환 감독이라는 사람으로 그리고 다시 좌우 논쟁으로 이동하며 타올랐다. 꽤 오랫동안.
커진 불꽃이 산을 집어먹듯 이슈가 커지고 커져, 현실정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진보 진영에서는 [민주를 기다리며]의 제목을 걸고넘어졌다. 민주화 운동은 피를 흘려 쟁취해낸 것이지 기다려서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이는 곧 감독의 역사관을 공격하는 빌미가 됐다.
보수진영은 영화 내의 근현대사에 대한 불온한 시선에 대해서 문제 삼았다. 또한 선거철에 공영방송에서 이러한 방송을 튼 것 자체가 공영이라는 가치를 훼손한 거라 트집을 잡았다.
거기에 더해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이태환 감독의 가족사를 물어뜯었다. 친일의 할아버지와 군부 독재 시절 한자리했던 그의 아버지의 과거는 국민 보편 정서를 건드렸고, 이태환을 공격하기에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이윽고, 최초의 기사였던 ‘공영방송은 가치’는 잊힌 지 오래. 선거와 표현의 자유에 대해 TV쇼 100분 토론이 진행되었고, 그 토론의 중심에는 [민주를 기다리며]가 있었다.
“이태환 감독님의 [민주를 기다리며]를 만들어서 공중파에서! 그것도 공영방송에서 틀게 한 저의가 궁금합니다! 영상도 방영 하루 전에 제출하는 게 말이 됩니꽈아아아! 사퇴하세요! 아무튼 사퇴하세요!?”
“[민주를 기다리며]는 로맨스 영화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맨트로 주연이었던 나는 ‘스윗 가이’라는 다소 원래의 의미와 다른 뉘앙스의 별명이 붙게 되었다.
그렇게 쥐어뜯고 싸우는 중, 인터넷 다시 보기로 제공된 [민주를 기다리며]. 그 영상을 베이스로 내 얼굴과 내 모습으로 만든 수많은 짤이 만들어졌다. 이 짤들은 장작이 타오르는 동안 널리 쓰이고 하나의 밈이 되었다.
'저 남자 누구야'
몇몇 사람들에게서 시작한 작은 물음.
미약하게나마 배우 이지우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터졌다.
의외의 화제성.
***
10월 7일 목요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개막작 [폭력의 사슬]
국내 최대의 영화 행사의 개막작으로 [폭력의 사슬]이 상영되었고 입소문의 시발점이 되었다.
바로 다음 날 10월 8일 금요일.
부산국제영화제가 상영되는 동안, KBC 독립 단편 영화 특선, 두 번째 영화가 방영됐다. 첫 번째 영화였던 [민주를 기다리며]의 화제성을 이어받아 4%라는 이전 회차의 두 배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제성에 묻어가려는 KBC의 전략이 통했다.
어김없이 내가 주연인 영화였다.
그리고 7일 뒤. 3번째 영화가 방영되었다.
논란은 들끓었던 것만큼 빨리 식었다.
[민주를 기다리며]의 이슈도, 정치 이슈도 사라진 채 방영된 3번째 영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 영화는 시청률 5%라는 기염을 토하며 성공했다.
내가 조연인 영화였다.
다시 7일 후, 마지막 KBC 독립 단편 영화 특선은 0.2%라는 처참한 시청률로 끝마치게 된다.
내가 나오지 않는 영화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식.
그리고 수상.
[폭력의 사슬]
국제 영화평론가협회상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
부산국제영화제 2관왕.
당연한 결과였다.
기본적으로 좋은 연출 능력에 내 조언까지. 두 개 부문 모두 감독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로카르노에 이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까지 출품한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은 모조리 휩쓴 셈이다.
들뜬 표정으로 상을 받고 내 옆에 앉는 이수한 감독.
이어서 '올해의 배우'의 후보자들이 호명되었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나를 포함한 호명되는 배우들의 얼굴이 카메라 잡혔다.
"여우야··· 뭐 내가 상 받을 때보다 더 떨리냐."
"카메라 돌아가고 있으니까 손톱 물어뜯지 마요 쪽팔리잖아!"
하지만, 메인 MC는 다른 배우의 이름을 호명했다.
다른 독립영화의 중견 배우였다.
시상식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었다. 시상식에 자주 와본 나도 항상 의아하다. 왜 수상자가 시상대까지 걸어가는 동안 수상에 실패한 후보자들을 찍는 걸까.
나는 담담히 박수를 치며 수상한 배우를 축하했지만, 내 옆의 이수한 감독은 오만 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의 입 모양이 박제되었다.
'식빵'
으··· 우습기만 해줘··· 모자라지는 말고. 형.
이수한 감독은 나보다 더 ‘올해의 배우’부문에 상을 받지 못한 걸 크게 아쉬워했다. 덕분에 몇 년 뒤 유용하게 쓰일 '이수한 식빵 짤'을 만들어 내었고.
아마도 영화 전반적으로 내 도움이 많았던 걸 의식하는 것 같았다. 연출, 시나리오, 연기에 투자금까지. 내외부적으로 내 손을 안 거친 게 없을 정도니까.
나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석환'은 원래 조연으로 시작한 캐릭터. 분량이 늘었지만 주·조연을 구분하기가 애매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전생에 수없이 많은 상을 받았다. 그런 내가 상에 연연할 리 없다.
폐막식이 끝나고, 특별석이 소란스러웠다.
오늘 공로상을 받은 영화계 원로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시상식의 진행과 수상자의 선정에 대해서 문제 삼는 모습이었다.
그 원로는 평소 고상한 인격과 행실로 칭송받는 분이었는데···
저분 저렇게 안 봤는데··· 다 늙어서 저게 뭐람.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나고, [폭력의 사슬]의 개봉날짜가 잡혔다. 원래의 계획대로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에 초청되면서 개봉일이 국제영화제 이후로 밀린 개봉이었다.
[폭력의 사슬]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민주를 기다리며]
KBC 단편 독립영화 특선
모든 이슈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그 모든 이슈를 빨아먹은 내가 주연한 첫 장편 영화였다.
반응은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었다.
10월 18일. [폭력의 사슬] 개봉.
'배우 이지우' 실시간 검색어 3위.
[폭력의 사슬] 개봉. 실시간 검색어 2위.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스윗 가이'
어디선가 본 듯한 책 구절이 생각났다.
마법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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