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27화 (28/121)

27. 갓상기 기자

27.

조상기 기자는 로카르노에서 출장을 복귀 기념으로, 동료 기자와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고 집에 들어왔다. 2차를 가자고 권하는 동료의 말을 거절하고 말이다.

오늘은 KBC에서 단편 영화 특선을 방영하는 날이니까. 영화 보는 게 일인 영화 잡지 기자. 오늘은 일이 아닌, 취미로 영화를 볼 생각이었다. 단편 영화라 했으니 40분 안팎일 테고 늦지 않게 잠들 수 있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2차는 조촐하게 집에서 맥주 한 캔, 그리고 포장해온 초밥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편성표대로라면 오늘은 [민주를 기다리며]가 반영하는 날이다. 감독 이태환. 처음 그의 이름을 봤던 건 서울 독립영화제였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주제를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감독. 입봉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미쟝센 활용이 뛰어났던 걸로 기억한다.

KBC단편영화 특선은 얼마 전부터 영화 관련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던 내용이다. 독립영화, 단편영화들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본방 사수해서 정규편성 되게 해보자고.

영화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는 조상기 기자는 이 말이 얼마나 허황한 이야기인지 알지만, 그래도 본방을 사수했다. 혹시 모르니까, 초대박이 날지 모르지 않나.

러닝타임 40분 남짓. 앞뒤로 들어간 광고가 많다. 지루한 광고가 끝나고 시작된 영화. 사전정보가 없었던 영화. 그곳에는 로카르노에서 만났던 배우 이지우가 있었다. ‘역시, 운이 아니었네.’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펜과 메모지를 들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조상기 기자는 '재밌다'라는 생각했다. 영화의 작품성만 따지면 중간보다 조금 높은 수준. 별점 5개 만점에 3개 반쯤 주고 싶었다. 원래는 3개쯤 주고 싶었는데 배우의 호연으로 반 개 추가 했다. 다만 무수히 내포하고 있는 여러 의미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연기를 참 잘하는 배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로카르노에서 봤을 때 그저 캐릭터 성과 배우가 시너지를 일으켜 그런 것이 아닐까? 했던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봤던 ‘대한’은 그런 생각마저 박살 내 주었다.

'대사 없이 연기하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1차를 막걸리를 먹고, 집에 와서 맥주를 마셔서 그런가? 살짝 취기가 돌아 글을 쓰고 싶어졌다.

뭔가 나만 알고 있는 게 아쉬운 느낌?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라는 걸 서로 확인받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 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고 싶은 느낌? 오랜만에 영화를 취미로 봤더니 즐거웠다.

평소 영화광들이 모여있는 한 커뮤니티. 게시글을 썼다. 글 쓰는 게 업인 기자이지만, 어디까지나 [민주를 기다리며]를 본 건 순전히 취미였음으로.

(게시글 171124)

제목 : 오늘 민주를 위하여 봄? 감독새끼ㅋㅋㅋ 미친 거 아님?

생각 없이 봤는데 감독 존나 골때리네 ㅋㅋㅋ

일단 내가 해석한 거 보고 빠진 거 있음 댓글 달아봐라. 찾아내는 게 재밌네.

6:25분 기상, 이거는 6.25 전쟁을 의미함. 일어나자마자 ‘대한’이 동생이랑 싸운 거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둘 사이가 박살 나는 것을 의미함.

샴쌍둥이, 이거는 하나의 유전자? 혹은 자궁? 뭐라고 해석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샴쌍둥이처럼 같은 유전자로(민족성) 붙어있는 두 사람이 분리가 되는 거, 그게 분단을 상징하는 거임.

그리고 '인국' ㅋㅋㅋㅋㅋ '인민의 국가' 네이밍 센스 지림.

두 명의 대부호 : 각각 소련과 미국

그녀 : 민주주의.

'인국'이 속해 있는 종교단체는, 주체사상 말하는 것 같음. 독재자를 사이비 종교로 돌려까는거 같음.

보육원 = 일본 임. 확실함. 난폭한 보육원장과 지속되는 학대.

이거 말고 화면에 보면 보육원에 유독 일본식 물건들 많음. 가장 확실한 게 검찰관계자가 뚱뚱하고, 구청 관계자가 키가 작잖아? 그리고 그 둘 손에 보육원 망하게 되고. 그 두 명이 팻맨이랑 리틀보이임 ㅋㅋㅋ

보육원 나설 때 '대한'이 시계 보는데 그게 8시 15분임. 8.15 의미하는 거임. 즉 보육원을 8시 15분에 나서니까 보육원은 일본을 의미하는 게 맞음.

그리고 버스를 탈 때 보면 419번 버스임. 4·19혁명 말하는 거 같음. 어쨌건 '민주' 만나러 갈 때 419번 타는 거니까.

그리고 카페에서 종업원이 지랄하면서 커피 더 시키라고 할 때 나레이션으로 '내 피 같은 돈···' 어쩌고 할 때 시계 보거든? 그게 5시 16분임. 516쿠데타로 피를 흘렸다 이런 거지.

카드 결제 문자 보면 10.26 5:18 에 통장 잔고가 12,12임.

그리고 마지막 88 담배 사서 피는 장면. 나레이션으로 쾌락 어쩌고 하는 게 아마 3S 정책 말하는 거 같은데 이건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호함.

내가 본 거 말고 더 찾은 사람 있냐?

아침에 일어난 조상기는 어젯밤, 취기 어린, 그리고 치기 어린 글을 썼던 걸 기억해냈다. 맨정신이 글을 보니 어질했다. 거기에 더해 영화와 관계없는 정치 댓글로 불쾌했던 조상기 기자는 글을 삭제했다.

조상기 기자의 글은 이미 캡처본을 떠놨던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재 업로드되었다. 이후 ‘[민주를 기다리며] 분석본’이라는 이름의 짤로 타 커뮤니티까지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김 아무개 기자의 손에 의해 기사화됐다.

조상기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

국내 굴지의 영화 공룡. SJ 엔터테인먼트가 [폭력의 사슬] 배급을 맡게 됐다.

이로써 오랜 노가다로 지친 이수한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극장개봉을 위한 법률적 지식과 마케팅, 계약에 필요한 많은 부분의 업무를 SJ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져갔기 때문이다.

SJ 엔터테인먼트와 미팅 후, 이수한 감독의 말로는 전체적인 영화제 출품 계획은 그대로 가져가고 PIFF에 진출 결과에 따라 마케팅 방향을 달리 가져간다고 했다.

만약 PIFF에서 상영하게 되면 개봉일을 뒤로 미루고 그 화제성을 가져가기로 했다. PIFF 진출이 불발로 끝나면 그 전에 개봉하여 로카르노 '신인 감독상'의 화제가 식기 전에 개봉하여 장기 상영을 통하여 최소한의 이익을 얻기로 했고.

SJ 엔터테인먼트 또한 적극적이라고 했다. 영화 생태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독립영화. 그 발전을 위해 SJ 엔터테인먼트와 영화진흥위원회가 협업한 프로젝트인 독립영화 특별관의 개장. [폭력의 사슬]이 선발대를 맡은 격이라고 했다.

원래의 계획으로는 해외 독립영화 중 흥행이 성공한 작품 위주로 상영하여 자리를 잡으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폭력의 사슬]이 로카르노에서 수상하면서 계획을 바꾸었다고 했다.

아마 독립영화이면서 장르영화인 [폭력의 사슬]이 흥행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국 영화라는 점도 크게 이점으로 작용했고.

독립영화 특별관 프로젝트.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SJ 엔터테인먼트 계열회사인 SJ 시네마가 보유한 일부 극장의 한 개 관을 독립영화로 할당하고 계속 틀어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폭력의 사슬]을 담당하는 SJ 엔터테인먼트 직원도 영화가 잘 뽑혔다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들도 우리 [폭력의 사슬]이 꼭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첫 영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사업을 추진한다 해도 SJ 엔터테인먼트는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이다. 프로젝트의 첫 삽을 뜨자마자 폭삭 망해버린다면 SJ 엔터테인먼트도 사업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래서 [폭력의 사슬]이 총대를 맡은 만큼 적극적인 푸쉬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전생의 기억으로라면 [폭력의 사슬]은 최초 서울 4개의 극장에서 개봉했다. 그것도 좌석도 몇 안 되는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에서 말이다.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대 개봉했고. 그리고 개봉 시기도 한참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전생의 이수한 감독은 이때쯤 열심히 노가다 하면서 상영관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었겠지.

그런데 이번엔 서울 복합 상영관에서만 4개 관이다. 전국적으로 광역시급 4개 관과 독립영화 전문 상영관까지 포함하면 총 12개 관 동시개봉.

머릿속으로 전생에 4개 관에서 시작해서, 10만 관객 수였으니 12개 관 30만 관객 수라는 말도 안 되는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개봉을 기다렸다.

관객 수 30만 명이면 극장 총매출 약 22억.

갈라 먹을거 다 갈라먹고, 제작사 및 투자자 수익 약 10억. 거기서 내 지분이 20%. 약 2억.

이수한 코인 풀 매수! 가즈아! 화성 간다니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땃해 진다. 울적했던 기분이 훌쩍 날아갈 정도로.

그렇게 몇 가지 일을 처리하며 다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고상하게 그림이나 그리면서. 나이 먹은 동료 배우들이 왜 낚시니, 등산이니 취미생활에 몰두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가끔 조상기 기자가 우리 영화 기사를 어떻게 조졌나 기다리며 시네르포 홈페이지를 가끔 들어가서 구경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올라온 두 개의 기사.

하나는 평범한 이수한 감독과 내가 한 문답식 인터뷰 기사.

다른 하나는 [폭력의 사슬] 영화비평이었다.

의외였다. 진짜 그 좆상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영화비평>

제목 : 느슨한 한국 영화계에 긴장감을 주는 신인들

글 : 조상기(시네르포 기자)

참신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경험이다. 이 참신함이 다양한 방면으로 발현되는 것은 몇 배로 즐겁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배우들과 새로운 감독. 새로운 두 가지가 만나 놀랍도록 신선한 시너지를 보여준다.

<중략>

이전 활동이 전혀 없던 신인 감독인 이수한 감독의 연출 능력이 놀랍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각본과 배우이다. 이수한 감독의 성과도 놀랍지만, 공동 집필자로 되어 있는 박현주 양의 각본은 데뷔작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제된 대사를 보여준다.

(관련 내용은, 이수환 감독과의 인터뷰 참고 : 대사는 박현주 양이 주로 만들었다. # 링크)

<중략>

최근 20대 배우의 가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 전 청춘스타는 아직도 청춘스타를 연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돌의 영화 진출이 달갑지 않다.

영화와 영상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부재한 상태에서 그저 시스템과 엔터테인먼트의 이해득실에 의해 영화판으로 내몰리는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형편없는 연기의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정해진 파이를 좀 먹는 준비 안 된 연기자들이 스크린을 차지함으로써 좋은 배우를 발굴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날린다는 관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이러한 현상을 비웃듯 독립영화에서 빈손으로 일어선 두 명의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특히 '석환'의 역할을 맡은 배우 이지우의 연기가 놀랍다. 영화적 언어에 익숙한 것이 데뷔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의 신체와 언어로 표현되는 영상 언어는 정교하였고 치밀하였으며 마치 기계적인 정밀함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하게 관객의 머릿속에 주입한다.

<중략>

다만 시대착오적인 조폭과 그 일당의 행위는 부단히도 소비되었던 식상함을 벗어나지 못하며 몇 년 전 흥행했던 [밤의 대통령의] 구태의연함을 답습하고 있다.

세계무대에서의 활약은 다만 한국에서의 싫증 난 소재가 해외에서 새롭게 받아들여진 것에 불과하다. 신인 감독이 가지면 안 되는 생각이고, 이런 점은 독립영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성에서 어긋난다.

독립영화의 기대치는 참신함과 신선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 영화는 몇 번을 삶은 사골과 같은 조폭이란 소재를 사용한 감독의 저의가 의심되는 바이며 A++ 소고기 등심에 상한 소스를 붓는 만행이···

<중략>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의 ‘현재의 감독’부문 수상의 쾌거를 다시 한번 축하하는 바이며, 이처럼 독립영화의 한계를 타파하고 장르영화의 영화적 언어를 넓힌 모든 제작진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중간에 이상한 게 끼어 있긴 하지만 저 정도는 조상기 기자가 한 워딩 치고는 굉장히 순한 편이다.

어? 이거 내가 아는 좆상···. 아니 조상기 맞나? 갓상기인거 같은데?

일어나면서 기지개를 켰다.

조상기 기자가 열어준 포문. 이어 가야 할 테니까.

가을이 온다.

수확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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