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26화 (27/121)

26. 로카르노

26.

마켓 베지를 한 키가 작은 동양인 남자. SJ 엔터테인먼트의 필름 마케터 차준호였다.

그는 전화기를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SJ 엔터테인먼트. 멀티플렉스형 영화관의 선구적인 기업이자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기업이다. 또한 국내 굴지의 배급사로 배급뿐만 아니라 제작, 투자, 상영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룬 초거대 영화 공룡.

그런 거대 기업의 마케터라며 저 마켓 베지가 특이할 것도 없다. 동양의 작은 시장이라 하지만, 그 상영관의 개수는 인구 대비 아주 높은 편이라 시장성이 좋기 때문이다.

"팀장님. 지금 한국 몇 시죠?"

-어이, 차 대리. 이 새끼야 그건 상식적으로 몇 신지 계산하고 전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전화부터 하고 물어보는 건 무슨 똥매너야. 6시 반.

팀장이라 불린 전화 통화 상대는 평소보다 너무 일찍 일어났는지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아 급하니까 그렇죠. 어차피 한 시간 후면 일어나셔야겠네."

-너도 어차피 죽을 건데 몇십 년 일찍 죽는 건 어떨까?

"그 영화제 관련되어서요···"

얼른 화제를 돌리는 차준호.

-왜? 로카르노 영화제에 괜찮은 거 있어?

"아뇨, 없어요."

-어? 그래··· 그러면 거기서 삽 한 자루 사서 양지바른 곳에 땅 파고 있어. 내가 가서 묻어 줄게.

"그게 아니라 팀장님 혹시 한국 영화 중에 [폭력의 사슬]이라는 영화 아세요? 여기 오니까 온통 그 얘기뿐이에요. 한국 떠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무슨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왜 한국인인 나 빼고 다 알고 있지? 개꿀 잼 몰카인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무슨 소리야 똑바로 좀 말해봐.

팀장의 목소리 톤이 변하고, 농담조로 말하던 말투가 변했다.

"지금 프로그래머(영화제 진행 관계자)들도 그렇고, 심사위원들도 그렇고, 관객들도 그렇고 [폭력의 사슬] 이야기 하는 게 심상치 않다고요. 섹션 자체는 '현재의 감독'이지만 보고 난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에요. 마케터들 사이에서도 계속 말 돌고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한국인 감독이 상을 받은 건 몇 번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감독들은 대부분 중견 이상이었고, 한국에서 탄탄한 입지를 가진 감독들이었다. 대부분 예술영화였고. 현지 반응도 대부분 동양의 작은 나라의 감독이 만든 신선한 작품이라는 느낌이라는 감상이 많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두 가지였다. '놀랍다', 그리고 '재밌다'.

각각 영화제 관계자와 일반 관객의 반응이다.

"제가 급한 김에 마켓(해외 진출을 위해 판매 담당자들에게 영화를 제공하는 공간)을 다 둘러봤거든요? 근데 이 작품 없어요. 해외 진출 생각이 없는 건지 배급사를 못 잡은 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확인해 보셔야 될 거 같은데요?"

-일단 알았다. 확인해볼게. 끊어.

"땅 파요?"

-아니 일단 삽만 사놔."

'툭-뚜'

뭐가 그리 급했던 건지 팀장이란 사람은 제 할 말만 전하고 끊어버린다. 그리고 마지막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차준호는 원래 영화잡지 기자로 오래 일했다. 꽤 능력 있고 잘나갔던 그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외에 무언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고 그래서 필름 마케터로 이직했다.

SJ 엔터테인먼트에 경력직으로 옮기기 전까지 나름 영화판에서 오래 활동했고, 영화 보는 눈도 좋다고 자부했다.

필름 마케터로 활동하면서도 좋은 영화를 많이 발굴해서 극장에 걸었고, 보람을 느꼈다. 물론 성적은 별로였지만.

그런 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은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한국에 개봉도 못한(안한) 작품을 해외에서 극찬하는 상황.

영화제에 상영하는 영화 중 가장 빛나는 영화 [Chain of violence] 아니, [폭력의 사슬]···

그리고 그 아래 적혀있는 이름 셋.

이수한, 김범 그리고 이지우.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왔을까?'

생전 처음 보는 이름 셋이 그의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

"이 영화는 놀랍도록 참신하며 즐거우며 영화 언어의 다변성을 추구합니다. 과격하고 거칠지만 놀랍도록 서정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장르 파괴를 보여줌으로써 보편적인 재미 속에···"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수상 코멘트를 듣자하니 머리가 어질하다.

요약하면 '장르 영화처럼 재미있는데 장르 영화답지 않게 작품성이 뛰어나다.' 쯤 되려나.

그렇게 받은 트로피.

은색의 표범 모양.

그 아래 적혀있는 이름.

[Chain of violence] Lee Soo han

Best Emerging Director

로카르노 메인 경쟁 부문의 신인 감독상. 좋은 상이다. 세계적인 거장들이 거쳐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신인 감독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이기도 하다.

폐막식 직후 해외 여러 매체 기자들의 인터뷰가 짤막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교류의 장이 열렸다. 세계 각지의 감독들이 서로 인사하고, 대화하는 시간.

해외 영화제에 수상 경험은 없었으나, 나는 많은 시상식에 참석했었다. 그래서 큰 감흥이 없었다. 빌려 입은 턱시도도 불편했지만, 어색하진 않았고. 하지만 이수한 감독과 조감독 나경수는 별세계에 온 듯 정신없어 보였다.

"와 저 사람 00 감독 아니냐? 그 00 연출하신 분."

"그냥 프로그래머 같은데요. 스태프 명찰 달고 있네."

"왜 이렇게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는데. 목소리 좀 작게 해요 쪽팔리잖아."

어휴··· 저 우습지만 안 우스운 형.

돈이 없는 우리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로카르노로 오게 되었다. 더불어 수상까지 하게 됐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 영화제라 해도 한국에서 인지도는 높지 않은 편. 사실 베니스, 칸, 베를린과 PIFF정도 말고는 영화제 자체가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지.

그렇기에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정식 초청됐음에도 한국에서 [폭력의 사슬]은 큰 화제를 가지지 못했다.

이수한 감독이 출국 전 인터넷 기자와 영화잡지에 한 번씩 인터뷰 한 게 끝이었다.

솔직히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 격인 '황금표범상'을 탄다 해도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화제성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수한 감독님 맞는가요?"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들린 유창한 한국말.

"네?"

"씨네 르포 기자 조상기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 되실까요?"

바로 이거다. 영화관계자들의 관심. 그들만의 리그에 끼어들기 위한 입장권. 명성.

그런데 이름이 조상기라고? 입장권 찢어버리려고 왔나?

이름을 듣고 굳은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이수한 감독과 나경수 또한 이름을 듣고 표정이 살짝 굳는다.

국내 최대 최다 판매 부수를 가진 영화잡지. 시네르포.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로카르노에 온 게 하필 조상기라니.

영화판에서 유명하다.

일명 좆상기라고. 기자계의 박평식이랄까.

"어제 영화 보고 왔습니다. 너무 불편해하지 마시고, 내일 인터뷰 한번 할 수 있을까 해서요. 출국이 언제시죠?"

"아··· 네. 저희는 내일모레··· 인터뷰해 주시면 저야 영광입니다."

자신도 자신의 악명을 아는지 말을 덧붙인다. 마지못해 수락하는 이수한 감독.

그렇게 폐막식을 끝으로 숙소로 돌아가려 하는데 한 남자가 나를 붙잡았다.

검은 머리칼과는 상반되는 뚜렷한 이목구비.

딱 봐도 혼혈로 보이는 남자였다.

"헤이, 미스터 리! 반가워효! 연기 좋아. 잘 생긴 게 최고야! 늘 새로워! 짜릿해!"

이상한 한국어. 내용도 내가 아는 뜻과는 뉘앙스가 좀 다른 것 같은데.

[폭력의 사슬]의 삼인방이 벙 쪄있자 영어로 막 설명했다.

무··· 물론 나는 다 알아듣지만, 영화제 측에서 따라온 통역 자원봉사자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어, 이지우 씨 연기가 너무 좋고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 연기? 표정 연기? 최고다. 매번 새로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 전율이 들 정도로 짜릿하다."

그때부터는 통역을 통해서 대화가 진행됐다.

"반가워요. 데이비드 킴이라고 합니다. 한국계 혼혈이에요.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시죠."

데이비드 킴, 그리고 혼혈.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그 데이비드 킴 감독?

그리고 이어지는 제스처. 손에 소주잔을 잡은 듯이 구부리고 입가에 가서 꺾는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제스처였다.

"한 잔 하좌!"

이 새끼 한국인 맞네.

***

노상 카페와 술집을 겸하는 가게에서 벌어진 술판. 영화제는 이게 좋다. 옆 테이블에는 무슨 무슨 영화를 연출한 무슨 무슨 감독이 있고, 앞 가게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가 술을 마신다.

말 그대로 영화의 축제. 이런 분위기는 영화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버린다.

데이비드 킴 또한 이수한과 같은 섹션인 '현재의 감독'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었으나 아쉽게 수상은  하지 못했다.

자신과 같은 부문 노미네이트 된 우리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폭력의 사슬]을 관람했다고.

그리고 [폭력의 사슬]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새롭다. 짜릿하지는 않고.

[폭력의 사슬]을 본 사람에게 듣는 첫 번째 관람평이다. 아직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은 영화니까.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수상 코멘트는 너무 난해했고, 일반 관람객들의 시선과 차이가 있으니.

그는 어떨 때는 일반 관객처럼, 어떨 때는 영화인처럼 [폭력의 사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미스터 리, 당신처럼 연기를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꼭 영어를 배워. 언젠가 꼭 내 작품에 출연해 줘."

끝나가는 술자리에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만난 조상기 기자.

인터뷰는 나와 이수한 감독만 참석한 채 호텔 내에 마련된 카페에서 진행됐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시작된 인터뷰.

인터뷰 자체는 크게 특이할 게 없었다.

어느 매체 어는 인터뷰어가 와도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그가 전한 뜻밖의 소식.

"이제 한국 들어가면 바빠지실 겁니다. 두 분, 아니 이 자리에 없는 한 분 포함해서, 세 분 다요."

"네?"

로카르노가 가진 영화적 위상과 국내 대중과의 괴리를 영화잡지 기자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한국 간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사실 제 후배가··· 아닙니다. 한국 들어가 보시면 알 거예요."

그렇게 의문만을 남기고 인터뷰가 끝났다.

한국에 들어온 직후. 좆상기, 아니 갓상기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울리는 이수한 감독의 휴대전화.

"네? SJ 엔터가 저희 영화 배급을 맡고 싶다고요?"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