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똥과 똥파리
24.
"네 [오디오 스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은 믿고 보는 조연 배우 특집! 요즘 씬스틸러로 대활약 중인 채강호 씨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제가 예능은 처음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배우를 소개한 MC 외에 다른 MC 3명이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주고받는다.
"채강호 씨. 이지우 씨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다고요?"
"네? 아··· [폭력의 사슬] 그거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 채강호 씨 [폭력의 사슬]에도 출연하셨어요? 그 영화 개봉한지 한 10년쯤 됐죠? 채강호 씨 그때부터 씬스틸러였구나.“
혹시나 모르는 시청자를 위해, MC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큐카드를 보고 읊었다.
인지도가 애매한 배우들이 토크로 화제성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톱스타 팔아먹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자연스럽게 급이 올라가고 이름을 나란히 한 채 인터넷 기사에 몇 줄이나마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지우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 불리는 톱스타. 그 인기에 비해 사생활 관리가 철저하여 기사조차 잘 나오지 않는 배우. 팔아먹기 딱 좋았다.
"그때는 카메오나 조연은 아니었고, 그냥 단역으로 촬영장에 갔어요. 저는 거기가 재촬영인지도 모르고 아는 형 따라간 거에요어쨌든, 그때가 한 6월쯤 됐나? 촬영장에 딱 갔는데 막 파카를 나눠주는 거에요! 초여름인데."
"눼에에. 파카요? 오리털 파카 막 그런 거?"
"네. 하하. 그중에 가죽 재킷이 딱 한 벌 있었는데 서로 얇은 가죽 재킷 가지려고 눈치 보고 막 그랬었죠."
"에이, 이수한 감독, 그건 진짜 너무 했네."
채강호가 썰을 풀자 MC들이 한두 마디씩 거들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그런데 이런거 말해도 되나? 한창 찍고 있는데 배우들이랑 스태프랑 싸움이 난 거예요."
"싸움요? 막 진짜로 몸싸움하고? 때리고?"
"네네. 스태프들 막 붐 마이크로 찍고, 단역 배우들 촬영 소품으로 준비한 각목 휘두르고···"
"와, 그래서 [폭력의 사슬]이 리얼리티가 좋았구나. 대박 날 만하네."
또다시 웃음소리가 배경으로 깔리며 패널들과 MC들이 '깔깔깔' 거리며 리액션을 한다.
"사람들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하고 다들 촬영장 떠나려는데 이지우 씨가 떠나는 사람들 일일이 붙잡고 회식 장소까지 데리고 가더라구요. 너무 배고프고 아프고 힘든데 화난 선배들은 집에 가자고 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대로 가면 편의점 도시락 먹어야 하니까요. 근데 그렇게 잡아주니까 정말 고맙더라고요."
"아, 진짜. 또 이지우 씨 미담이야? 어떻게 게스트로 오시는 분들 하나같이 이지우 씨 미담만 하고 가요? 무슨 이지우 씨는 미담 만드는 기계야? 싸움 났을 때 이지우 씨가 욕하거나 막, 싸웠거나 그런 이야기 없어요?"
MC의 채근에 잠시 고민하는 듯한 모습의 채강호.
머뭇거리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뭐, 이게 험담은 아니고요. 회식 장소에 갔는데 그날 촬영 갔던 단역 배우들이랑 스태프들 한 명 한 명 찾아가면서 술을 따라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술 한 잔 받고 이야기하는데, '연기하는 거 잘 봤다. 고생하셨다. 많이 배웠다.' 제가 단역으로 나온 역할까지 말해주면서 한참을 위로해 주고 가더라구요. 사실 주연 배우가 단역 배우들한테 그러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때 참 멋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끝이야? 결국 또 미담이네. 어휴 지겨워. 이지우 씨 미담."
삐딱한 자세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중년의 남자 MC.
"아뇨, 그게 끝이 아니라. 회식이 끝나고 단역배우들 끼리 2차 간다고 모였는데요. 제가 막 이지우 씨도 신인인데 연기 진짜 잘하더라, 내가 찍은 다른 작품 봤고, 나한테 많이 배운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단역배우들한테 자랑을 좀 했거든요?"
살짝 끊어지고, 다른 게스트들과 MC들의 기대감 차 있는 얼굴들을 짧게 보여준다.
"알고 보니 저한테만 그 소리 한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한테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했더라고요."
"아니 무슨 인간 녹음기야? 무슨 칭찬도 그렇게 기계처럼 해요? 미담을 기계처럼 찍어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칭찬도 기계처럼 하는 분이었네."
이지우의 얼굴에 로봇 모양의 몸통을 합성한 애니메이션 효과가 움직이며 화면을 채운다.
동시에 사운드를 채우는 웃음소리.
"자 그러면 영상 편지 한번 갑시다. 이지우 씨한테."
"네? 갑자기요?"
어물쩍거리는 채강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지우 씨.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회식비를 신인인 자신이 계산하면 말 나온다고 이수한 감독님한테 슬쩍 카드 주시고 간 거 다 압니다. 감사했어요. 다음에 작품 한 번 같이 찍어요~"
***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고생하셨어요. 지금 지나면 다 잘 풀리실 거예요. 선배님 연기하는 거 보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요."
이걸로 3명째인가. 같은 멘트를 3번 연속 우려내니 맛이 안 산다. 좀 지겹다.
사기치는 거랑 애드리브는 잘하는데 이런 건 또 영 안 맞네.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입에 발린 소리 해본 적 없으니.
나의 옛날이 생각나기도 했다. 나는 한 번 엇나간 방향으로 갔었기에 그만큼 돌아서 지금에 오지 않았나. 한 번 죽어서 겨우 고쳤다.
저들을 보고 독립영화에서 피땀 흘리는 당신의 노력 방향이 틀리지 않았노라 말해주고 싶었다.
무명 시절 이렇게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기에 단역 배우들에게 립서비스 한 것도 있다.
상업 영화로 빵 하고 뜬 뒤로는 이런 작은 현장에 올 일이 없었다. 돈만 밝히는 난 이런 영화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안 했으니까. 그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10년 후쯤 미담이라면서 '이지우 썰 푼다' 이런거 살짝, 아주 살짝 기대하는 것도 있고.
진짜 살짝이다.
밤샘 촬영하고 왔다. 그리고 다리도 아직 완전히 나은 상태도 아니었고. 슬슬 빠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같이 밤샘 촬영했던 강진호는 급하게 사진 보정 작업할 게 있다고 빠져버렸고, 이수한 감독에게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다.
이수한 감독은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고 다쳐도 고만고만하게 빨간약 좀 바르면 괜찮아질 상처들이었다.
[폭력의 사슬]은 이제 끝나지만, 그의 영화는 이제 시작이니까. 그리고 원체 사람을 좋아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다. 그가 자리를 옮기면 금세 그의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퍼지곤 했다.
그렇게 이수한이 사람들의 다친 마음에 빨간약을 바르는 것을 잠시간 구경했다.
이제야 좀 감독 답 구만. 영화 다 찍었는데...
뭐 또 찍으면 되지.
이수한 감독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감독님, 죄송한데 이만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잠시 저쪽으로···"
내 사인을 알아채고 그가 나왔다.
내가 'ON스트릿'에서 진 빚을 갚을 차례였다. 이걸로 갚아질지는 모르겠지만.
가게 밖으로 빠져나와 가게 안의 사람들이 밖을 보지 못할 만큼 충분히 이동했다.
"형, 여기. 이거 받아요."
"뭔데? 카드 왜?"
"내가 계산하면 모양새가 이상하잖아. 안에 몇 년 위 선배도 계신 데."
"아씨, 형 돈 있어 걱정 마."
"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카드 또 뒤지게 하지 말고. 또 지하철 가서 노가다 할 생각이지? 로카르노 안 갈 거야?"
'ON스트릿'에서 일 때문에 이거 안 받으면 내가 불편할 것 같아 억지로 그의 주머니에 카드를 쑤셔 넣었다.
"어? 벌써 가시게요?"
아까 내가 영업용 멘트 친 사람이었다. 채강호. 앞으로 조연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가 화장실이라도 갔다 왔는지 손을 털며 가게로 들어서며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네,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셔서요."
그렇게 이수한 감독과 채강호를 뒤로 하고, 꾸벅 인사하고 나왔다.
***
향기로운 꽃에는 벌과 나비가 꼬인··· 냄새나는 똥에는 똥파리가 꼬인다.
이수한 감독을 꽃에 비유하느니 내가 똥파리가 되고 말지.
그렇게 나와, 조감독은 두 마리의 똥파리가 되어 이수한 감독이 작업하는 편집실에 이른 새벽 도착했다. 아침이 되면 편집실 자리를 비워줘야 했기에 아주 이른 시간이었다.
재촬영 때 찍은 작업물 다만 몇 장이라도 건졌길 바라면서 말이다.
"어때요. 형. 건질 거 있어요?"
밤새 편집했는지 눈은 퀭하고 머리와 얼굴은 기름이 잔뜩 꼈다.
"아니. 없어. 소품이랑 의상 때문에 통째로 들어내고 쓰거나, 아니면 안 쓰거나 둘 중 하나야. 근데... 어제 찍은 거 못쓰겠다."
"하···"
조감독의 아쉬운 한숨 소리. 그러면서 슬쩍 내 눈치를 한번 본다.
내 돈 500만 원이 그대로 사라졌다.
티 내지 않고 최대한 덤덤한 척했다. 일단 투자금에 관한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을 작정이다. 투자자가 감독 들볶아봐야 악영향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재촬영에서 싸움 터진 건 이수한 탓도 아니고.
"형, 일단 좀 씻어요. 하루만 더 밤새우면 미군이 형 얼굴을 침공할 듯."
"뭔 농담을 그렇게 재미없게 하냐."
이게 안 먹히네. 20년 후에는 빵빵 터지는데. 20년 후에 내가 개그를 치면 다웃어 줬다고...
"어쨌든 편집은 끝난 거죠? 바로 출품하면 되나?"
"어, 블루레이 변환해서 자막 입힌 다음 보내면돼."
자막 작업은 이미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로카르노가 8월, 로마와 부산 국제영화제가 10월, 그리고 선댄스가 1월. 그렇게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때 편집실에 울리는 노크 소리.
'똑똑'
아 벌써 비워줘야 하나?
그런 생각에 편집실을 정리하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어? 작가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아, 급하게 볼 용건 있다길래 내가 오시라 했어. 편집 중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강진호였다. 그것도 이수한과 매우 유사한 몰골로 들어왔다.
"강 작가님 혹시 밤새셨어요?"
"네···"
"하루 더 밤새···"
미군 침공 개그를 한 번 더 써먹으려다 관뒀다. 강진호 작가는 나랑 'ON스트릿' 촬영하느라, 이틀 밤을 내리 새웠구나.
"네?"
"하루 더 밤새우면 쓰러지실 것 같다고요."
"오늘 꼭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노트북을 펼쳤다.
우람한 그의 몸과 어울리지 않게 숙련되게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빙글 돌려 모니터가 우리 세 명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음? 이거 혹시?
"포스터 시안입니다. 방송 장비 지우고 공간 채우느라 식겁했네요."
포스터 시안인 것은 봐서 안다. 촌스러운 폰트로 [폭력의 사슬]이라고 적혀있으니.
내가 놀란 건 포스터 시안이라서가 아니라 사진 때문이었다.
노트북의 거친 해상도로도 감춰지지 않는 특별한 사진 한 장.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 군데군데 죽어가는 풀 몇 포기가 있는 황무지 배경. 폭력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극한의 분노와 긴박감이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그들 손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들과 긴 막대기 그리고 각목이 손에 쥐어 있다.
그리고 그런 배경들 중앙.
두 남자가 있다.
원근을 조절한 듯 살짝 배경의 폭력과 거리감을 둔 두 남자.
한겨울임을 증명하듯 두꺼운 패딩을 걸쳐 입고 있으나 두 남자는 거친 운동이라도 한 듯 온 얼굴에 땀이 한가득하다. 여기저기 솜이 터져 삐져나온 낡은 패딩.
한 남자가 한 남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고 있다.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희미한 라이터 불 하나만이 그 둘을 연결하고 있었다.
[폭력의 사슬]의 사진이었다
장하다. 강진호. 포스터계를 네 손으로 정복해 버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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