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23화 (24/121)

23. [폭력의 사슬 : 사라진 500만원]

23.

아 뭔가···

‘바른길’로 가기위해 유턴 신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제 드리프트 당한 느낌이다.

신께서 보고 계시다가 '네 이놈! 어딜 네 마음대로 바른길로 가려고! 내 바른길을 맛봐라 얍!' 당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상에 나만큼 확실하게 신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믿음이 신앙이 아니라서 문제지.

준비한 내 프로필에 대한 프레젠테이션도, 힘들게 마음먹은 바른길의 고해성사도 나성일 사장의 무관심과 돈쭐에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돼버렸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런 각오로 멋지게 고해성사하고 이수한 감독 앞에서 폼 좀 잡나 싶었는데.

어쨌건 바로 내일 쇼핑몰 피팅모델 촬영, 그리고 다음 날 바로 [폭력의 사슬] 재촬영이다. 다음 주에는 현주의 선배 감독의 단편 영화 촬영과 차차 주에는 이수한 감독의 후배 감독의 단편 영화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는 게 이렇게 무섭다.

계약금 받고 2시즌이나 모델을 할 줄 알았다면 쇼핑몰 피팅모델 촬영은 좀 뒤로 잡는 건데.

괜히 일당 좀 땡겨 받으려고 촬영을 당겼다가, 일을 몰아서 하게 됐다.

사기 미수 한 벌 받는다 생각해야지.

계약금이 입금되는 즉시 이수한 감독에게 투자금 명목으로 500만 원을 입금했다.

재촬영과 편집, 그리고 출품에 들어가는 부대비용까지 포함한 금액이었다.

35mm 필름을 영화제 참가용 블루레이로 바꾸고 출품 비용까지 고려한 금액.

부산 국제영화제와 로카르노 영화제 출품 마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비용을 아끼기보다, 노가다 하는 시간을 줄이고 퀄리티를 높이는데 투자하자는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이수한 감독도 군말 없이 돈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돈을 아낄 때가 아니니까. 차라리 돈으로 퀄리티를 올려서 영화제에 수상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찔러보고, 몇 개라도 수상한다면 상금으로 제작비 일부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테고.

총제작비 9,500만 원에서 2,000만 원의 내 투자금.

약 20%가 조금 넘는 비율이다.

영화를 처음 찍는 감독에게 전 재산을 꼬라박는 사람이 있다?

뿌슝 빠숑?

누군가가 보면 도박이겠지만 내게는 투자였다.

내 연기를 믿고, 이수한 감독을 믿는다.

***

역시 이수한 믿을 수가 없다.

내 태세 전환이 빠르다고? 아니다.

촬영 현장 꼴을 보면 누구든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오늘 새벽까지 ‘ON스트릿’ 피팅 모델 일을 했다. 다음 주까지 영화 한 편을 다 찍어야 하는데, 도중에는 도저히 시간이 안 나와서 약 3일 동안 걸쳐 찍을 분량을 하루 만에 찍었다.

강진호와 함께 말이다.

그 개고생을 하고, 딱 2시간 자고 촬영 현장으로 나왔다.

촬영장에 오자마자 곡소리부터 들렸다.

미소팀(미술, 소품 담당)의 한 여자 스태프가 이수한 감독 앞에서 울고 있었다.

“째성해여, 째성해여. 의상 안 쓸 줄 알고 너무 상한 건 버렸어요.”

독립영화답게(?) 이수한 감독은 당당하게 촬영 할 때 배우들에게 개인소유의 옷을 입고 촬영하라 지시했다. 다만 액션씬에 한해서는 옷을 나눠줬다. 세탁비(?)보다 헌 옷 사서 주는 게 더 싸게 먹힌다나.

촬영 후 그 옷을 미소팀 스태프에게 맡겼고 그 커다란 짐을 둘 곳 없었던 스태프는 그 옷들 대부분 버려버린 것이다.

골때린다. 제작사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고, 제작사 PD(영화 제작자, 영화 외적인 것들을 관리 감독하는 총괄)들이 대머리 아니면 바싹 말라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6월 중순인데, [폭력의 사슬] 촬영은 2~3월이었다. 즉, 그 당시 배경은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초여름이다.

극 중 등장인물들이 입었던 옷 몇 개는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거 아예 다시 찍던가, 아니면 오늘 촬영 접어야 할 것 같은데."

조감독이 와서 넌지시 말했다.

독립영화가 촬영 끝난 지 3개월이 지나서 재촬영할지 몰랐지? 나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개판일지도 몰랐다.

“형 어떻게 할 거예요?”

이수한 감독이 담배를 비벼끄며 답했다.

“후··· 뭘 어떻게 해. 다시 통째로 들어내고 찍어야지.”

"하···"

"시···발."

여기저기서 들리는 한숨 섞인 탄성 소리···

원래 계획은 깔끔하게 6개 씬 찍고, 이전에 못 했던 회식하고 헤어지는 것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이수한 감독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스태프든, 단역 배우든 현장에 나오면 일당은 지급된다. 아무것도 안 찍고 비용 날리느니, 뭐라도 찍고 편집할 때 한 씬이라도 잘 붙여보는 게 나은 셈이다.

결국 기존에 찍었던 씬을 대신해 새로운 의상을 입고 촬영하기로 결정되었다. 두 개 비교해서 나은 것을 쓰면 되니까.

스태프도 몇 없어서 동원된 배우와 사진작가인 강진호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촬영 준비했다.

겨우 준비되고 촬영이 시작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더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에 쨍한 파란색의 하늘. 30도에 육박하는 기온. 촬영장은 그늘 없는 넓은 황무지. 거기에 배우들은 죄다 패딩 아니면 가죽 재킷을 입은 상태로 액션 장면을 소화해야 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우리도 인생···엠생?"

"컷! 다시."

"죄송합니다."

대본을 다시 살피는 조연 배우.

3개월 전 외웠던 대사를 까먹은 배우들이 많아 촬영은 점점 지체됐고, 거기에 더해 더위로 인해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의 불쾌 지수가 급상승한 것이 눈에 보였다.

"하, 씨바."

"왜?”

자신 분량의 촬영을 끝내고 김범이 옆에 와서 구시렁대고 있었다.

“왜긴 왜야 존나 덥잖아.”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웃었다.

새끼 안 변하네···

다음 촬영은 조연들 위주의 촬영이기에 김범과 내가 나란히 쉬게 되었다.

그러던 중 촬영장을 중심으로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들렸다.

“어? 저거 싸우는 거 아니냐?”

촬영장 주변으로 고성과 욕설이 들리고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까 봤던 미소팀 여자 스태프와 단역 배우가 싸우고 있었다.

"뭐? 단역들 연기할 준비가 안 되어있어? 무슨 그런 개 뼈 발라먹는 소리가 있어?"

"대사 자꾸 까먹으시잖아욧! 촬영 늘어지게."

“아니 소품팀에서 일을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고. 왜 단역들을 싸잡아서 욕해? 니가 감독이야? 오늘 원래 6개 씬만 찍는다며? 통보 없이 분량 늘어난 게 우리 잘못이야?”

여자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과의 마찰을 중재를 하러 온 남자 스태프.

“혜지야 넌 잘못 없어, 저리 가 있어. 아니 우리가 언제 단역들 욕했다고 그래요. 그냥 준비도 없이 촬영하러 와서 계속 NG 나는 거 사실이잖아요.”

저거 오히려 불붙이는 거 같은데.

“뭐? 준비? 니들이 준비 개같이 해서 지금 장면 통으로 찍는 거 아냐!”

“개같이? 이 새끼 말뽄새 봐라?”

“이 새끼? 돌았냐?”

단역 vs 스태프 구도로 싸움이 벌어졌다.

얼씨구, 영화 찍으라고 사람 모아놨더니만 영화를 현실로 만들고 있네. 아까 미소팀에서 울던 스태프 이름이 혜지였나? 어쩐지 뭔가 트롤링 할 거 같은 이름이더라니.

“뭐야 저거.”

그렇게 말하며 김범이 나서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의 팔을 잡아챘다.

“뭐 하려구?”

“뭐하긴. 말려야지.”

“안 돼.”

“뭐? 왜?”

으음, 저번에 내가 김범에게 한 오지랖을 대본에 꼼꼼하게 필기해 놓은 걸 본 뒤로 뭔가 김범에게 훈수 두기가 껄끄럽다. 그래도 김범이 제대로 된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봤었기에 그냥 둘 수 없었다.

김범이 가면 어찌 바로 싸움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배우가 되려면 그래선 안 된다.

“너 배우 아니냐? 배우는 몸이 생명이야. 인마. 말리다 너 다치면 촬영 더 밀린다. 아니지, 재촬영할 시간도 없으니까 그냥 오늘 찍는 씬 통째로 날린다고 생각해야지. 그리고 말리다가 누구 하나 실수로 친다? 그러면 10년 후쯤 너한테 맞은 놈이 김범이 사람 팼다고 인터넷에 글 올릴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안 되긴 왜 안 되냐. 수십 년 전 부모님이 떼 먹은 빚으로 이미지가 나락 가는 게 연예인인데. 미투 빚투로 수십 년 연예계 생활 한방에 조지는 사람들 많이 봤다. 행위의 잘잘못은 법원에서 따진다 치고, 그 이전에 이미지와 몸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학폭, 마약, 섹스 스캔들 등 단순히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타격을 받는다.

싸우는 사람을 말린다? 의도는 좋다.

인간으로서는 합격. 배우로서는 불합격.

실수가 나올 만한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어차피 곱창 난 촬영장 분위기를 봐서는 재촬영은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내 말 믿고 근처도 가지 마. 다 끝나고 뒤처리만 잘하면 돼."

"씨바, 뭔 놈의 직업이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아."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다시 싸움을 말리러 가는 기색은 없었다.

음··· 교육이 잘됐군. 김범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빠르게 이해한듯했다.

어쩌면 미래가 없던 그가 배우로서의 미래를 꿈꾸게 돼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확실히 험하게 자라서 지식이 부족할 뿐이지 지능이 낮은 게 아니다.

연기라는 게 감정과 느낌으로 하는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야 머리 좋은 감독들의 세계관을 꿰뚫고 그 안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 김범 또한 그러한 세계에서 살아남았던 녀석이고.

대충 정리되면 다친 사람 추스르고 감정을 털어 낼 수 있게 다독이고, 돈 있으면 회식 쏘고. 그 정도가 배우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야 한 10년쯤 후, 저기 싸우는 단역 배우 중 한 명이 성공해서 '이지우 미담' 같은 소리를 토크쇼에서 해주지 않겠나.

'저기 단역 중 뜨는 사람이 누구였더라? 채강호가 나중에 확 떴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폭력의 사슬] 실사판을 감상했다.

음··· 실사판의 제목으로는 [폭력의 사슬 : 사라진 500만 원] 쯤으로 하면 될까.

점점 격화 돼가는 싸움. 오늘 촬영은 나가리 될 것 같다. 내 돈 500만이 그렇게 터져 나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내 맨탈도 같이 터져 나가는 중이고.

김범이 학질이라도 걸린 듯 온몸을 더듬거린다.

"라이터 있냐?"

"너는 담배 태우는 애가 라이터를 안 들고 다니냐. 자."

그러면서 나는 주머니에 있는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너는 담배도 안 피우는 새끼가 라이터를 왜 들고 다니냐."

"'석환'이 피자나."

"아···"

담배 끊었는데··· 담배 마렵네.

김범이 고개를 끄덕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김범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는 순간.

'찰칵'

강진호가 앞에서 튀어나왔다.

"오? 이거 잘 나왔는데?"

주먹질과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유유히 사진기를 들고 신나게 셔터음을 내는 강진호를 보자니 내가 뭔가 큰 실수라도 한 느낌이다.

괜히 데리고 왔나. 촬영장에 싸움이 나든 말든 개썅마이웨이 사진 찍고 있는 강진호.

아니지··· 그걸 따지면, 김범을 배우 만들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그렇게 따지면 이수한 감독 영화에 출연한다고 결심한 것이 잘못인데.

생각 없이 영화를 찍는 이수한도, 깡패와 배우 그 어딘가에서 줄타기하는 김범도, 눈치 없는 강진호도···.

아···20년 후에는 안 저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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