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우습지 않은 사람
22
식당에서 끼고 있던 반깁스를 버렸다.
가게 앞 약국에서 진통제도 두 알 사서 먹었다.
"괜찮냐?"
해장국집에서 갑자기 깁스를 뜯고, 진통제를 사 먹는 나를 보고 걱정된다며 'ON스트릿'사무실까지 나를 쫓아온 이수한 감독.
"괜찮아. 형은 그냥 보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심호흡했다.
수술 이후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반깁스를 일부러 좀 길게 끼고 있었기도 하다. 벌써 수술한 지 두 달이나 지났으니까.
시간 참 빠르다.
내가 이전 'ON스트릿'에서 첫촬영 했던 게 2월이었으니 벌써 4개월이 지났나? 6월이면 슬슬 F/W 시즌을 준비할 시기였다. 오히려 지난번이 늦은 감이 있었다.
워낙 많은 브랜드를 유통하다 보니 내가 했던 촬영은 'ON스트릿'이 유통하는 브랜드 일부만 촬영했던 거기도 하고.
이렇게 일찍 연락 한 것은 그만큼 일을 많이 맡기겠다는 것 아니겠나.
그런 생각을 하며 'ON스트릿'을 찾았다.
이미 연락했기에 마케팅팀장인 김민정은 회사 앞에 나와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사무실이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5층짜리 건물의 1층에 있는 카페로 갔다.
앉기가 무섭게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김민정 팀장.
"일단 지난번과 같이 여러 브랜드 합쳐서 스타일링 해서 갈 거고요 날짜는 급하다 해서 내일로 잡았고요···"
계약서와 기획서를 펼쳐두고 촬영 일정에 관해서 설명하는 김민정 팀장.
"페이는 이전과 같이 책정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협상을 알리는 김민정 팀장의 이니시에이팅.
어딜 어물쩍 넘어가려고.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출발하기 전 조감독과 이수한 감독이 챙겨줬던 자료들을 꺼냈다.
"이거 한번 봐주시겠어요?"
거기에는 앞으로 개봉하게 될 [폭력의 사슬]과 [민주를 기다리며]의 기획서와 스틸컷 그리고 출품하게 될 영화제 목록 등이 나와 있었다.
"이게 뭐죠?"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런 건 좀 자신 없다.
뜨기 전엔 주는 대로 받았고, 뜨고 나서는 소속사에서 이런 협상을 주도했으니.
"보시면 제가 이번에 주연한 영화가, 10월에 개봉합니다. 또 8월 로카르노 영화제, 10월에 로마 영화제,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청' 받았고요."
주는 자료를 받아서 주욱 훑어내리는 김민정 팀장.
"지금 나와 있는 자료 외에 2편의 독립 단편 영화 계약이 끝나있는 상태입니다. 상품을 촬영한 사진이 걸려있는 시즌 동안에 개봉 및 방영 예정이 총 4 작품입니다."
하지만 연기라면 자신 있다.
백룡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배우가 치는 구라다.
이걸 안 넘어가곤 못 배기지.
영화제 '초청'이라니 뭔가 근사하지 않은가.
정확하게는 '초청'이라기 보다, '출품'이다. 출품 작품 중 영화제 프로그램 구성팀이 선택하여 섹션 별로 초청작을 구성하는 방식이고.
원래 정교한 구라는 90% 진실에 10%의 구라를 섞어서 만드는 거다.
그리고 그 10%의 구라도 내가 봤을 때 곧 진실로 바뀔 것이고.
일반인이 영화제의 세세한 운영방식을 꿰고 있지는 못할 터.
원래 이런 협상은 소속사에서 하는 것이기에 배우인 내가 직접 하기엔 모양 빠지는 일이지만, 지금 내가 이것 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 모양 빠지는 거짓말.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게 돼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모델이기에 앞서 배우이고, 배우로서 커리어와 이미지 관리, 그리고 향후 귀사와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이 제안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돈 내놔.
"음··· 이건 제가 혼자 결정하기가 힘든 문제라서요.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그리 말하며 잠시 자리를 뜨는 김민정 팀장.
김민정 팀장이 저 말에 숨어있는 의미를 모를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크지 않은 회사다 보니 예산 사용의 권한까지는 가지고 있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 괜찮았죠? 어떻게 답변을 줄라나."
"어? 어···"
긴장감이 풀리고, 이수한 감독의 김이 새는 답변에 살짝 기분이 상하려는데 그가 말했다.
"이거 괜찮은 거냐?"
"뭐? 초청이요? 우리 영화 초청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니 그거 말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지우야. 고맙다. 그런데 우리 이러지 말자."
아니 인제 와서···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짜증이 확 치솟았다.
고개를 홱 꺾어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내가 망하는 게 아니다.
망해도 그가 망한다.
하지만 죄는 내가 짓는다.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나도 작품 가지고 구라치며 재능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성공한다. 이 작품. [폭력의 사슬].
전생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한다.
따서 갚으면 돼.
그런 확신의 반대쪽에서 들리는 또 다른 내 마음의 소리.
내 회귀로 인한 나비효과로 미래가 바뀌지 않았을까?
에쉬튼 커쳐가 연기한 [나비효과]에서는 항상 불행하게 바뀌던데?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하는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내 불안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지우야 우리 빠른길 말고 바른길 가자."
"..."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형 미안한데 나 잠시 화장실 좀."
이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
찬물로 얼굴을 마구잡이로 끼얹었다.
죄책감과 조급증으로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다.
'우리 빠른길 말고 바른길 가자'
이 소리를 듣고 머릿속에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느냐고?
나 때문이었다.
돈 때문이었고.
그래, 내가 성급했다.
어머니 닭 다리 원 없이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조급증을 불러왔다.
세상에 닭 다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나.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위안 삼으라고 눈물과 다리 살을 함께 삼켰다.
그러면서 빨리 성공해서 모시자고 생각했었고.
씨발.
이수한 감독보고 우스운 사람이라고 했던 거 취소다.
20대의 이수한 감독에게 40대의 내 추악한 모습을 보인 것 같은 부끄러움이 들었다.
돈 앞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전생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래, 수단으로서 돈이다.
인정하자.
이수한 이 맞고, 내가 틀렸다.
그와 동시에 든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오랜 삶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
아마 친형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밤낮없이 일하고 아침에 가게를 들러 어머니를 도와주고, 수시로 병문안을 와주던 그였다.
사심 없이 내가 잘되기를 바라며 여러 감독을 소개해 주기도 했고.
그런 그의 진심 어린 행보를 알기에 '바른길'로 가자는 그의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진실로 나를 위해 하는 말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짧은 고민과 판단.
바로 잡자.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게.
"형. 바른길 가자."
다시 카페로 와 짧게 말하고 앉았다.
피식 웃는 이수한 감독.
멀리서부터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마찰음이 들렸다. 김민정 팀장이 윗사람과 상의를 끝내고 카페로 오고 있었다.
김민정 팀장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사장님이 부르시네요. 잠시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김민정 팀장의 의외의 말.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와중이었다.
"어··· 그전에 잠시 드릴···"
"죄송한데 사장님 스케줄이 지금 좀 밀려서요. 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살짝 급해 보이는 김민정 팀장이 내 말을 막아버린다.
금액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 게 아닌데···
어어 하는 순간에 사장실로 이끌려 왔다.
머릿속에 상상하던 깔끔한 인테리어의 사장실과는 거리가 먼 사장실이었다. 건물 통째로 이 회사가 사용하는 회사의 사장실 치곤···
지저분했다.
사방에 붙어있는 각종 옷이 찍혀있는 사진들.
각종 샘플로 보이는 옷들과 신발, 그리고 서류들.
이 사무실에서 유일한 깔끔함을 보이는 한 사람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아, 어서 오세요. 대표 나성일 입니다."
"네. 이지우라고 합니다."
"배우시라고 들었는데··· 옆에 분은 매니저?"
"아뇨, 아··· 형이요."
'아는 형'이라고 말하려다 그냥 '형'이라고 소개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 네. 어쨌든 죄송한데 제가 지금 조금 시간이 없어서요. 빠르게 본론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모델은 하겠습니다만, 비용 관련해서는 처음 이야기 했던 것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네?"
살짝 벙찐 표정으로 김민정 마케팅팀장을 바라보는 사장.
딱 봐도 '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영화제 관련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 순간, 김민정 팀장이 먼저 가로막고 말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어요.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저희가 따로 이렇게 모신 것은 비용 협상보다 차기, 그러니까 내년 S/S 시즌 계약을 같이 진행하기 위함이었어요. 사장님이 잘 부탁한다고 차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하셔서요."
상황을 정리해보려 애쓰는 김민정 팀장.
그런데도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인데.
"일단 앉으시죠. 김 팀장은 미안한데 차 세잔만 부탁해요."
그렇게 김민정 팀장이 비서에게로 가 차를 부탁하고, 곧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차를 내어왔다.
나성일 대표가 숫자와 목록이 빼곡히 적혀있는 몇 개의 서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음··· 제가 방금 확인을 해봤는데, 이지우 씨가 모델을 했던 브랜드의 해당 의류만 재고가 다 빠졌더라고요. 안 팔리는 사이즈까지. 그게 참··· 우리가 딱히 미는 브랜드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다빠졌네. 그래서 우리 주력 브랜드를 한번 맡겨보고 싶어요. 가능하면 올해 F/W 시즌이랑, 내년 S/S 시즌까지요. 아! 아까 얼핏 들었는데 무슨 영화 찍는다고 바쁘시다 그랬나?"
이제야 좀 상황이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아니 정확하게는 대표라는 사람이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이 사람 즉흥적이고 저돌적이다.
회사에 다녀본 적은 없지만, 많은 광고주들을 만나봤던 경험이 있다. 마케팅팀장이 얼마 안되는 마케팅 예산 조율에 관해서 고민한다? 그리고 그 고민을 바로 사장에게 이야기한다? 조금 규모가 큰 회사라면 시스템에 의해서 회사가 돌아가지, 이렇게 사장 한 명의 의사결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장실인지 작업실인지 모를 만큼 바쁘게 일을 보는 것 하며, 회사의 예산이 움직일 때마다 직접 챙기는 것, 그리고 유통되는 브랜드의 재고까지 직업 확인하는 것까지. 규모가 어떻든지 간에 자기가 모든 것을 컨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의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이수한 감독과 잠시 대화했던 짧은 순간에 의사결정과 개선책을 내놓는 실행력까지.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음··· 밑에 사람들 고생 좀 하겠군.
결론적으로 '니가 영화를 찍든, 영화제를 가든 관심 없고 우리 옷 잘 팔리니까 일 많이 줄게 잘해보자'이런 거였다.
"음··· 그리고 페이 관련해서는 원래 저희 쪽 모델만큼 맞춰 드리겠습니다. 대신 계약금 걸고, 올해부터 내년 S/S 시즌까지 기간 정하고 하는 거 다 보니 동종업계 광고 모델 하시는 건 안 되고요, 그 외 몇 가지 조항 추가해서 계약서 쓰는 거로 할게요. 괜찮죠?"
그러면서 일어나 가볍게 악수 청하는 나성일 대표.
광고 모델도 아닌 내가 기간을 가지고 계약을 하는것 자체가 이례적인일.
"이번 시즌도 잘 부탁할게요. 미안한데 제가 지금 비행기 시간이 급해서 세부 사항은 우리 김 팀장이 안내해 줄 겁니다."
자기 할 말만 다다다 해버린다. 자신감 넘치지만, 위압감으로 보이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 때문에 일방적인 통보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족히 십수 년은 어린 나를 존중하는 태도가 보였다.
그렇게 몇 번을 미안하다 인사하고 나가버리는 나성일 대표. 대표가 나가자 김민정 팀장이 웃으며 부연했다.
"저번 시즌 기획 단계에서 이지우 씨 모델로 뽑은 게 우리 사장님이셨어요. 그런데 지금 회사에 와있다니까 재고 장부 확인해보시더니 꼭 한번 직접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아··· 네."
"일단 계약서 다시 보시고 이야기할까요?"
김민정 팀장의 손에는 언제 다시 뽑아왔는지 모를 계약서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에 바로 서명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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