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민주를 기다리며]
19.
[민주를 기다리며]의 첫 촬영이 끝났다.
자연스럽게 촬영이 끝나고 회식 자리가 이어졌다.
바로 내일 촬영이 예정되어 있기에 모두 자제하는 분위기가 깔려있었고, 나는 술 대신 음료수만 홀짝이고 있었다. 회귀 후 가능하면 술을 마시려 하지 않고있다. 김범과 함께했던 그날처럼 꼭 마셔야 하는 날 빼고는 자제하는 편이다.
유난히 노동법에 민감한 이태환 감독. 얼핏 듣기로 법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법에 맞춘 근로시간 내에 딱 맞춰서 찍어낸다.
그것도 오로지 연출적 역량으로만.
감독마다 성향 차이는 있지만 어떤 감독은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 각도를 바꿔서 수십 번씩 찍는 감독도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촬영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감독 잘못 만나면 매번 초과 근무 확정이다.
초과 근무 수당이 없는 초과 근무지만.
하지만 이태환 감독은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전혀 낭비가 없는 촬영을 한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계산된 프레임과 시간 배분.
배우가 심각한 발연기를 보이지 않는 이상 그의 계산 안에 진행됐다.
오늘 [민주를 기다리며] 첫 촬영. 다만 나의 연기력은 계산이 안 되었었나보다. 장면 대부분이 10 테이크 안에 진행되었고 오히려 계획보다 일찍 끝났다.
이태환 감독이 촬영이 없을 때 얼마나 로케이션 지역을 다녔는지 그는 촬영장소에 언제 어디에 뭐가 있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 덕에 이 말도 안 되는 편안하고 안락한 촬영이 가능한 것이었고.
대신이랄까. 이태환 감독은 시시각각 말라가고 있었다.
내 옆으로 와 앉으며 술을 따라준다.
"고생 많았어요. 이지우 씨! 오늘 너무 좋았어요. 안마셔도 좋아요 그냥 받아만 둬요."
소탈한데, 고급스럽다. 말이나 행동이 배운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내 편견이려나?
"뭘요, 감독님이 고생이시죠. 괜찮으신 거 맞죠?"
다분히 말라가고 있는 그를 의식한 질문이다.
"네, 뭐 아직 살아는 있습니다."
그렇게 이수한, [폭력의 사슬], 영화에 대한 담론 등의 주제로 이어지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이태환 감독이 질문했다.
"시나리오 끝부분 어떻게 생각해요?"
"결말이요?"
"네. 사실 현주 양과도 많이 이야기 해봤는데 확 이끌리는 결말을 못 잡겠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 드려요?"
순간 긴장의 빛이 그의 얼굴에 스친다.
"개인적으로 지금의 닫힌 결말도 좋지만··· 열린 결말로 가는게 어떨까요?"
***
[민주를 기다리며]의 촬영 말고도 두 개의 촬영이 남았다.
하나는 이수한 감독이 잡아준 단편영화의 조연.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주 학교의 졸업한 선배의 작품.
현주는 [폭력의 사슬]을 계기로 영화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 접해본 영화 각본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낀 듯했다. 그런 그녀가 영화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학기 초에 으레 하는 동아리 신구대면식에서 만난 선배가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었다.
이미 [폭력의 사슬]과 [민주를 기다리며]의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현주. 그것뿐이겠는가. 영화를 보는 눈 자체가 대학생 수준은 넘었다. 이수한, 이태환 감독과 차례로 작업하면서 작품을 보는 시야가 확 트였으니.
이수한 감독과, 이태환 감독이 보통 인물인가.
20년 후쯤엔 각각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인물 아닌가.
그런 인물들 틈에서 영감을 나누고, 자기주장을 펼치며 각색 작업을 한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감독이란 종족은 그 에고(EGO) 자체가 단단하여 좀처럼 꺾을 줄 모르는 족속들이니.
나처럼 연기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와 합리, 이성과 감성을 가지고 감독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짜잔, 그 어려운 것을 우리 현주가 해냈다.
보라, 이 아름다운 대본을.
떡잎부터 다른 감독들 사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집어넣었다. 비록 내가 이전 버전의 [민주를 기다리며] 대본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현주의 생각이 담긴 부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처음 [민주를 기다리며]를 봤을 때 느꼈던 것은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주제를 강조하다 보니 캐릭터가 묻히고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밋밋했던 영화가 더욱 주제에 끌려다니게 된다.
캐릭터와 서사에 자연스럽게 주제가 묻어 나와야 하는데 주제에 다른 것들이 휘둘린다고 할까.
하지만 현주의 손길이 닿은 이 대본은 달랐다.
캐릭터와 서사가 도드라진다. 원래 대본의 골격 때문에 한계는 있었지만, 그녀의 장기인 섬세한 묘사로 캐릭터와 서사가 살아나는 게 보였다.
글 쓰는 수준만 높아진 게 아니다.
요즘은 대화하면서 영화 자체를 보는 안목이 훨씬 더 높아졌다는 게 느껴진다. 나야 2회차 인생의 가짜 천재라지만, 그녀를 보면 이런 게 진짜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흡수하는 속도가 놀라웠다. 그리고 그녀의 작가적 영감 또한 굉장했고.
그 영감에 나도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녀의 대본을 받아서 연기할 때 느꼈던 몰입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단어 하나, 온점 하나에서 느껴지는 탁월함은 수천 편의 각본을 읽어봤던 내 입장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유일한 단점인 인풋만 늘려간다면 작가로서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아니. 사실 내가 보고 싶어서 그렇다.
그녀의 각본, 그녀의 영화. 내가 보고 싶다.
그리고 내 손에 있는 그녀의 손길이 닿은 또 다른 대본.
[민주를 기다리며]
얼마나 날 더 놀라게 할건지.
***
06:25
일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할 일이 많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대한'은 남보다 배는 부지런해야 했다.
오늘은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하니까.
김대한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목발을 잡았다. 큰 소리를 내서 '인국'이가 깨면 곤란하니까. 다시 마주쳐봐야 싸움밖에 하지 않을 테니까.
'대한'과 '인국'은 샴쌍둥이다. 엉덩이 일부분이 결합한 채로 태어났고 이 특이한 형태의 아들들을 감당하지 못한 부모에게 버려졌다.
다행스럽게도 두 명의 대부호의 지원으로 어렸을 때 분리 수술받을 수 있었다.
대신 걷는 데 장애를 얻었다.
같은 몸을 공유했던 쌍둥이 동생이지만, 어찌나 생각이 틀리는지.
어제 크게 싸운 후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대한'은 쌍둥이 동생과 이제는 더는 함께 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인국'이 말한 그녀에 대한 비난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대한'의 전부고 '대한'의 미래라 생각했지만, '인국'은 형을 홀린 그녀를 이단이라 말하며 욕을 했다.
그런데 어쩌겠나. '대한'이 봤을 때는 '인국'이 다니는 종교가 사이비 다단계로 보였다.
'인국'은 '대한'에게 종교 가입을 권했고, '대한'은 '인국'을 사이비 종교에 빼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고, 몇 달간의 지루한 싸움 끝은 동생과의 절연으로 끝맺음 됐다.
'인국'은 '인국'대로 살길을··· '대한'은 '대한'대로 살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고.
'대한'은 오늘, 이 빌어먹을 보육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아들은 대학을 진학하면 보육원에서 연장 보육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인제 와서 이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난폭한 원장과 불성실한 직원들. 지속되는 아동학대를 퇴소한 원생들이 고발했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 보육원의 실상이 까발려졌다.
담당 구청의 아동·청소년 복지 부서의 직원과 검찰 관계자들이 시찰을 와서 보육원을 뒤집어놓은 게 불과 며칠 전이니까.
뚱뚱했던 검찰관계자와 유난히 키가 작았던 구청 관계자. 그 앞에서 쩔쩔매던 보육원장의 모습이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런 사정으로 어차피 망하게 될 보육원, '대한'은 제 발로 나가기로 했다.
'대한'의 짐이라곤 작은 백 팩 하나가 전부.
인사 없이 나가려는데 우연히 눈에 띈 보육원장이 '대한'을 불러세웠다.
"대한아, 어디 가냐?"
무시하고 가려는 '대한'을 끝끝내 잡아 세우는 보육원장.
"길에서 우연히라도 눈에 띄지 마라."
'대한'은 주먹을 꽉 쥐어 보지만, 나가지 못한다.
장애가 있는 몸이 한스럽다. 애써 참는다.
벙 쩌버린 보육원장을 뒤로하고 빌어먹을 보육원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8시 15분이었다.
그녀와 만나기 위한 약속도 없이 나온 참이다.
하지만 그녀 또한 '대한'을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419번 버스. 그 종착점에 '대한'과 그녀가 자주 가는 다방이 있었다.
한참을 버스를 타고 도착한 다방. 하지만 그녀는 없었다. 아쉬워하진 않았다. 기다리면 그녀가 올 테니까.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그녀를 기다렸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5:16
"저기요. 이렇게 오래 계실 거면 더 시키셔야 하는데요."
"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얼마나 앉아계시는 거예요?"
다방이 문을 열기가 무섭게 들어와서 오후 5시가 넘도록 앉아 있었다.
그녀가 올지도 모르는 이 카페를 떠날 수 없기에 하는 수 없이 한 잔을 더 시킨다.
피 같은 돈이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녀만 만날 수 있다면 그깟 돈이 문제겠는가. 아무 말 없이 건넨 카드.
카드를 건네기 무섭게 결제 문자가 날아왔다.
[20XX. 10.26 05:18
XX 다방 아메리카노 1,500원 결제
잔액 12,12원]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얼마나 기다려야 오는 걸까.
생각해보지만, 이미 늦은 저녁이 되도록 그녀는 소식이 없다. 마감하는 종업원의 눈살을 못 이겨 가게를 나섰다.
이른 겨울의 추위가 매섭게 품 안을 들춘다.
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며 담배만 찾는다.
어찌나 태웠던지 이미 담뱃갑이 비어있었다.
짧은 고민을 하고 근처 슈퍼에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현금을 꺼내어 주며,
"88 한 갑이요."
잠시간의 쾌락. 그나마도 너무 많이 피워대서 정신이 몽롱하다.
그렇게 '대한'은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린다.
시기를 맞추지 못한 너무 이른 눈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녹아 사라진다.
수북이 쌓인 꽁초.
'대한'은 사라지고 없었다.
"컷-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내 두 번째 영화가 끝났다.
"역시. 이게 좋네요."
내 아이디어로 바꾼 마지막 엔딩 컷을 말하는 것이리라.
일단 시간이 넉넉했기에 원본과 내 아이디어가 들어간 장면 모두 찍었다. 편집 간에 어떤 장면을 사용 할지 결정하기로 했고.
그런데 이태환 감독은 이미 열린 결말 쪽으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다.
영화를 찍을때 찍히는 사람도 느낌이 온다.
치밀하게 짜여진 미장센. 완벽하게 계산 된 카메라 워크와 구도. 그리고 감독의 숨겨둔 의도까지.
그리고 현주가 손을 보탠 시나리오.
느낌이 온다. 좋은쪽, 나쁜쪽 모두에게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이거 공중파에 방영 되도 되나 몰라.
에라 모르겠다. 뭐 이태환이 알아서 하겠지.
아무튼 나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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