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8화 (19/121)

18. 내가 널 어쩌면 좋니

18.

"투자자? 영화에 투자하겠다고?"

"네!'

"말은 고마운데 그건 안 되겠다."

의외였다. 덥석 물 줄 알았는데.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가? 이수한 감독이 전 재산을 꼬라박고, 밤낮없이 일해서 찍은 영화가 아닌가.

이수한 감독이 보기보다 지분에 민감한가? 수익이 줄어드는 게 아쉬운가? 하고 의아하던 차에 이수한 감독이 말했다.

"아마 수익이 나기는커녕, 손익분기점을 넘기도 어려울 거야. 니가 독립영화판을 잘 몰라서 그런가 본데 독립영화는 수익이 나는 구조가 아니야. 그러지 말고 내가 꼭 갚을 테니까 차용증 쓰자."

아, 나는 이 영화가 성공하리라 확신하지만, 감독인 그로서는 확신이 없었으리라. 동생의 돈을 빌린 후 떼먹을까 걱정하는 투였다.

개인에게 빌려주면 갚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화에 투자하게 되면 영화가 망했을 시 투자금액은 투자자에게 고스란히 손실이 되는 것이니까.

"그럼 영화 망하면 형이 나 좀 챙겨줘요. 형 아는 감독들 많잖아요."

"너 정도 연기하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지. 내 소개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

"진짜 그거면 돼요. 그리고 필모하나 없는 나를 누가 데려다 쓰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투자하는 돈 받고 편집 잘해서 내 데뷔 필모를 형이 멋지게 만들어주면 되겠네."

그렇게 몇 번을 튕기던 이수한 감독.

결국 이수한 감독은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진짜 고마워. 내가 이거 영화가 망해도 꼭 갚을게. 다리 다 나으면 내가 아는 형과 누나 동생 싹 전화 돌려서 알아봐 줄게."

그리 말하며, 마지못해 수긍하는 그였다.

이미 이태환 감독을 소개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다른 감독들을 소개해달라는 말은, 그저 투자받지 않으려는 이수한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였다. 그래도 혹시 또 모르니까.

흘려들으라 한 소리였지만 이수한 감독의 눈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뭐, 오디션 자리라도 알아 와준다면 나야 좋지.

***

제작사 ‘흥미유발’. 한 사무실에서 분주히 자리를 세팅하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 이태환 감독이 앉아있었다.

오늘 있을 [민주를 기다리며] 대본 리딩 준비로 바쁜 와중이었다.

대충 주변이 정리되고 자리 세팅이 끝나자 이태환 감독은 스태프 들을 불러 모았다.

이태환 감독을 중심으로 모든 스태프가 모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이태환 감독이 말했다.

"배우 캐스팅에서 말이 많이 나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작 단편 영화고 무명 감독이라 기대가 떨어지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잘 돼야 본전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스태프 들이 저 감독이 왜 저러나 눈알을 굴린다.

제작사 측에서 돈 안 되는 단편 영화 주연은 연계된 소속사의 배우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태환 감독의 고집으로 각본을 뜯어고쳐 가며 원하는 배우를 앉혔다.

이런 이태환 감독을 제작사 측에서는 좋게 볼 리 없다. 그 영향은 고스란히 제작사 측 직원인 스태프에게까지 갔고.

감독은 제작사 입장에서 그저 단기 고용 프리랜서에 불과하고, 여기모인 스태프 들은 제작사의 직원이니까.

거기에 이태환 감독은 영향력이 없는 무명감독.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배우 캐스팅으로 잡음이 나오고, 그 영향이 스태프들 까지 끼치자 감독 눈에는 불편했으리라.

"이 영화에 딱 맞는 완벽한 배우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는 건데 외압이나 사심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배우가 잘했는데 영화가 별로라면 그건 우리 스테프 들 잘못이겠죠. 아니면 저의 안목과 판단 미스이거나요."

그러더니 꾸벅 허리를 크게 접어 인사한다.

"모두 감사합니다. 프로의식을 발휘해 주세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문제의 그 배우가 들어왔다.

[민주를 기다리며]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다.

내용은 글쎄. 재밌다고 하긴 좀 뭐하지만, 영화의 배경과 방송사, 그리고 이태환 감독의 배경을 알고 보면 이런 코미디도 없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되었기에 나는 그 배경 스토리를 알고 있다. 아마 이거 방영되면 KBC 드라마 국장은 머리 꽤 아플 것이다.

그리고 [민주를 기다리며]의 방영 시기는 아직 넉넉잡아 4개월 정도 남았기에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막말로 단편 독립영화 한편 찍는 게 얼마나 걸리겠는가. 맘먹고 찍으면 일주일 만에 찍는 게 단편 독립영화인데.

내용상 제대로 대사가 있는 배우는 몇 되지 않았다.

원톱 주연. 그것도 대부분의 대사가 주인공의 나래이션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주인공의 감정연기만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연기의 난이도가 미친 듯이 높다 이 말이다.

연출 난이도도 높고.

대화문이 전혀 없는 만화책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대화문이 전혀 없는데 재미있는 만화책을 상상해보라.

상상이 잘 안될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화 없이 상황과 주제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난이도가 엄청나게 높다.

이런 영화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성영화가 있겠지만,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에 지금 이런 시도를 한다는 건 영화적 자살에 가깝다.

그런데 그 어려운 것을 이태환 감독이 해낸다.

딱 연출로 보여줄 수 있는 것까지만.

원래 배우가 했던 연기는 20살의 애송이 이지우가 봤을 때도 별로였다.

그때 그 배우가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그 배우도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듯했다.

이태환 감독이 다리 다친 나를 위해 대본까지 고쳐가며 출연시키려는 이유이다.

지금 20대 배우 중 이 연기가 가능한 사람은 단연코 나밖에 없을 테니까.

거기에 비용의 압박까지 극심한 단편 독립영화. 연차 높고 커리어 좋은 30대 동안 배우를 캐스팅할 여력도 없을 것이고. 제작사도 최소한의 수익을 남기기 위해서 비싼 배우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본 리딩에 참여하기 위해 [민주를 기다리며] 제작사를 방문했다.

제작사는 크지 않은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한 직원의 안내로 한 사무실에 들어갔다.

몇 없는 배우들과 스텝들이 모여 있고 그 중앙 이태환 감독이 앉아있었다.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 가볍게 인사하고 내 이름이 적혀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한껏 고무된 이태환 감독의 모습과는 달리 뭔가 탐탁지 않아 하는 다른 스태프들.

이거 데자뷰인가?

뭔가 [폭력의 사슬] 첫 촬영과 같은 기분인데.

그때는 도중에 참여하느라, 대본 리딩에는 참여도 하지 못했었다. 갑자기 참여한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민주를 기다리며] 대본 리딩장에 오니 여기도 내 참여를 그리 반기지 않는 눈치다.

대사가 별로 없는 영화. 대부분 내 나래이션으로 진행되었고, 별다른 일 없이 리딩이 끝났다.

이 영화의 어려운 점이다.

대사를 치는 연기가 없다. 나레이션과 대사 없는 감정 연기 그리고 연출에 모든 것을 건 영화.

리딩이 끝나고, 여러 스태프들과 배우 몇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다친 다리 때문에 느린 내가 먼저 빠져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까 싶어 일부터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

나를 보고 다가온 이태환 감독.

"이지우 씨, 잘 부탁합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유난히 비장한 모습의 이태환 감독. 평소 점잖고 예의 바르던 사람이다. 영화판에 도는 소문으로는 서울 법대를 중퇴하고 예술영화 찍는다는 별종. 그런 사람이 웃음기 싹 빼고 말하는데 부담스럽잖아.

그래 내가 잘 부탁해야지. 내가 연기를 실패할 리는 없으니까 연출 잘 부탁해야지.

***

대본 리딩을 끝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 이수한 감독이 전화가 왔다.

-오늘 리딩날 맞지? 태환이 형이 잘해주냐?

"네 형. 신경 써주시네요. 편집은 잘 돼 가요?"

-어 덕분에 잘하고 있다. 한 달이면 끝날 것 같아. 그것보다 너 시간 되냐?

"시간이야 항상 있죠. 촬영 없으면. 다리 다쳐서 어머니 못 도와 드리고 있어서요."

-그래? 그러면 같이 밥이나 먹자. 생각해보니 마지막 촬영 때 원래 회식하기로 했는데 너 다치는 바람에 다 같이 식사도 못 했더라고.

"네. 좋죠! 어디서 먹어요?"

"너 몸도 안 좋은데 어디 가지 말고 지우분식에서 먹자. 어머니 얼굴도 좀 보고, 마감 하시는 거 도와드리게."

틈틈이 가게가 끝날 시간에 놀러 와서 다친 나 대신 마감을 도와주는 이수한 감독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아는 그였다. 내가 다친 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편집하다가도 가끔 마감 시간에 들러서 마감을 도와줬다. 내가 마음이라도 편히 쉬게끔 돕는 것이었다.

"네, 저야 멀리 안 가면 좋죠."

-현주도 부르고. 오늘은 내가 쏜다.

"그거 제 돈 아니에요? 크크크. 투자자로서 횡령이 의심되는데?"

-얌마, 나 오늘 지하철 공사 뛰어서 번 돈이야!

"농담입니다. 저도 같이 먹으니까 이번만 봐 드릴게요."

-무슨 말이 그래? 농담이라는 거야? 봐준다는 거야? 어쨌든, 한 시간? 그 정도면 되나? 그때 보자.

"네 형."

낮에는 지하철 공사, 밤에는 [폭력의 사슬]의 편집. 이수한 감독을 보면 내 20대가 생각날 정도다.

예전 삶의 20대.

공사장에서, 촬영장까지 갈 차비가 없어서 밤새 걸어갔던 적도 있다. 몇 마디 안 되는 대사를 밤새 반복하며 말이다.

그런 열정이 미래의 그를 만든 거겠지.

내가 그랬듯이.

분식집에 도착하니 이수한 감독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어머니를 도와 가게 마감을 하고 있었다.

"아, 형. 대파 썰어놓은 건 냉장이 아니라 냉동이라고."

"응? 언제 왔냐. 대파 냉동이야?"

"네. 대파 썰어놓은 거 냉장고 넣으면 흐물흐물해져요. 파 향도 다 날아가고. 냉동시켰다가 필요할 때 써야지."

군말 없이 다시 꺼내 냉동고로 옮긴다.

다리를 다친 난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홀 정리만 좀 끄적거렸다. 어느덧 어머니와 이수한 감독이 마감을 끝낸다.

집에 갈 채비를 끝내고 주방에서 나오는 어머니.

"수한이 너도 술 작작 마시고. 지우 넌 다리 다 나을 때까지 술은 안 돼! 알았지?"

"아이고~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절대 지우 이놈 술 못 먹게 하겠습니다."

이수한 감독이 넉살 좋게 어머니의 말을 받는다. 대본 수정한다고 분식집에 눌러앉았을 때 친해진 건 이수한 감독과, 현주 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차별이 없으셨다.

'촥 촥'

"어휴 너나 좀 작작 먹어라. 너 오늘도 마셨지?"

차별 없는 등짝 스매싱에 이수한 감독이 온몸을 비튼다. 술을 먹고 가게에서 마감을 도와준 게 몇 번 있었던 모양이다.

손으로 입을막고 ‘후후’ 불며 냄새를 맡는다.

"티나요? 현장 형님들이 하도 먹으라고 해서···"

"어휴··· 둘 다 언제 철들 런지. 재밌게 놀고. 홀 깨끗이 치워놔. 난 간다."

그렇게 어머니가 가셨다. 말은 저렇게 하셔도 나와 이수한 감독을 응원하신다. 주방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몇가지 안주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수한 감독이 일주일 넘게 분식집에서 죽치고 앉아 있을 때도 눈치 한 번 준 적 없으셨다.

"뭐 먹을래?"

"피자 족발 뭐, 그런 거 시키죠?"

"오케이, 너 하와이안 피자 같은 거 좋아하는 이상한 애는 아니지?"

"하와이안은 선 넘었죠. 고구마 피자 갑시다."

"고구마? 현주 싫어하지 않냐?"

"네?"

현주가 고구마 싫어한다고? 뭘 모르시네. 무명 시절부터 같이 먹은 고구마가 몇 박스는 될 텐데.

"현주 작은아버진가? 하는 분이 고구마 농사짓는다고 어렸을 때 너무 많이 먹어서 싫다던데"

"그게 무슨···"

“현주 뭐 좋아하는데?”

가슴이 철렁한다.

그랬었나? 식비조차 넉넉지 않았던 무명 시절 꾸준히 나왔던 고구마. 그리고 성공하고 난 뒤 체중조절 할 때도 자주 먹었던 고구마였다.

얼핏 친척 중 누군가에게 얻어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싫어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뭘 모르는 건 내가 아닐까?

나를 위해 현주가 맞춰 왔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고구마를 좋아했던건 나지, 그녀가 아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현주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가 있더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 형 좋아하는 거 시키죠. 아무거나요."

"그래? 알았다."

가장 최근 이수한 감독에게 고구마를 사서 줬을 때도 내 앞에서는 잘만 먹던 그녀였다. 그리고 그게 사주는 내가 민망할까봐 잘 먹는 척 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현주는 언제 오니?"

"동아리 활동 끝나고 온대요."

현주 생각으로 정신없는 와중 스몰토크가 이어졌다.

"원래는 현주 오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너 [민주를 기다리며] 끝나고 할 거 없지?"

"네, 뭐 있어요?

"형이 작품 잡아 왔다. 아는 후배 독립영화 하나 들어간다는데 생각 있냐? 조연이야, 단편이고. 40분짜리."

"네? 저야 좋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주가 분식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우야! 이 누님이 일 가지고 왔다!"

"응?"

현주는 테이블에 앉지도 않고 내게 다가와 말을 쏟아냈다.

"우리 동아리 졸업 선배가 이번에 작품 들어가는데 배우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내 남자친구가 영화 두 편이나 찍었다니까 글쎄, 소개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다른 작품 하고 있다니까···"

제 일 마냥 기뻐하며 말하는 현주.

하··· 내가 널 어쩌면 좋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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