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7화 (18/121)

17. 이제 투자자님이라고 부르세요

17.

이태환 감독은 다리가 불편한 나를 위해 우리 집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였던 카페에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무척이나 마른 모습. 동그란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한참 후에나 유행하는 저 안경이 마른 얼굴과 썩 잘 어울렸다.

"여기 대본. 일단 읽어보고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읽기 전에 이야기를 먼저 할까요? 할 이야기가 많은데. 현주 양의 말대로면 이 정도면 지우 씨도 충분히 좋다고 할 거라던데."

"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 앞에 대본을 꺼내놓는 이태환 감독. 그러면서 씩 웃는다.

현주? 여기서 현주가 왜 나와?

그런 의문을 가진 채 주는 대본을 받아들었다.

아직 제본을 끝내지 않은 A4용지로 만든 대본이었고, 그 중앙에는 큰 글씨로 [민주를 기다리며]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공동 집필자로 올라가 있는 현주와 이수한 감독.

음··· 이거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이게 뭐죠? 박현주? 이수한? 제가 아는 그 박현주, 이수한 맞죠?"

"개인적으로 대본을 먼저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현주 양이나 수한이 때문에 지우 씨가 원하지 않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면 안 되니까요."

감독의 저자세가 의아하다.

지금의 난 그저 신인 배우일 뿐이니까.

나로서는 출연시켜만 준다면 감사히 하겠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이미 내용을 알고 공중파에 방영이 되는 것도 아는 작품이니까.

거기에 더해 나중에 칸과 베니스 경쟁 부문을 밥 먹듯이 올라가는 이태환 감독의 작품 아닌가.

내가 죽기 전까지도 예술 영화를 꾸준히 찍었던 감독이다.

다만, 예술 영화만을 찍는 그의 영화는 관객 스코어가 많이 떨어지기에 상업영화를 주로 찍었던 전생의 나와는 인연이 없었을 뿐이다.

거기에 더해 오디션 제안이 아닌 직접적으로 배역을 제안하는 것이 더 놀라웠다. 솔직한 말로 필모그라피에 개봉 예정인 독립영화 달랑 있는 내 처지에서는 오디션을 보게만 해줘도 감지덕지니까.

"죄송한데 설명이 필요 할 것 같습니다."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일단 촬영장에서 이지우 씨를 보고 나서 충격이었습니다. 흠 잡을 때 없는 연기, 연기에 대한 집념 등··· 특히 장면 잘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기절하는 모습을 봤을 때··· 감동적이기 까지 하더군요."

끝도 없는 칭찬에 민망하다. 왜 나를 캐스팅했는지도 알겠고. 밥은 굶어도 예술영화를 찍어야하는 이태환 감독이 내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럴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설명이 부족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동 각본가에 아는 이름들이 있네요?"

"이지우 씨가 다쳤을 때 캐스팅을 포기하기보다 각본을 수정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래서···"

이어지는 그의 말은 놀라웠다. 내가 입원해 있던 한 달간, 이태환 감독은 기존의 [민주를 기다리며]를 각색했다고 했다.

오로지 나를 캐스팅하기 위해서.

멀쩡했던 주인공을 다리에 장애를 주고, 관련한 스토리를 발전시키는 작업.

이수한 감독은 일주일 전까지 그 각본작업을 자기 일처럼 도왔다고 했다. 이수한 감독과 연락이 닿은 현주까지 합세하여 [민주를 기다리며] 각본작업을 도왔고.

현주가 매일 병원에 와서 피곤하다고 내 침대를 뺏었던 이유가 있었구만···

이후 이태환 감독은 바뀐 각본을 들고 일주일 동안 제작사를 설득했다고 한다.

낯선 감각이었다.

내가 무명이었을 때, 이토록 나를 챙겨 줬던 사람이 있었던가.

반대로 유명해졌을 때는?

역시 없었다.

매니저와 회사는 철저히 상업적인 관점에서 나를 다뤘고, 나는 그런 회사에 빅엿을 먹이면서 다른 회사로 옮겼었다.

"일단 이 영화는 개봉을 목표로 찍는 영화는 아닙니다. 방송국과 계약했거든요."

"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르는 체하며 반문했다.

"KBC에서 단편 영화 특선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 단막극 아시죠? 한 시간짜리 매주 금요일에 하는 거.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두 편은 심사 봐서 뽑고, 두 편은 방송국 지원으로 제작하고요. 우리 영화는 방송국 지원으로 만듭니다."

단막극 대신 단편 영화를 틀어보면 어떨까 하는 실험적인 기획. 시청자 반응이 별로였는지 이때 방영된 4편 이후, 추가로 기획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 네··· 그럼 한번 읽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천천히 읽어보세요."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영화 자체가 도발적이고, 실험적이다. 아마 방송국 드라마국 PD들이 보면 놀라 자빠지겠지. 그리고 원래 각본보다 좋아졌다.

원래 각본에서는 대학생으로 나오는 주인공. 하지만 나를 염두에 둔 이 각본은 다리에 장애가 있는 대학생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원래 있던 주제가 살아남은 물론이고, 주제 의식이 영화를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다. 아마 이건 현주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원래의 각본을 본 적 없지만, 영화로 봤을 때는 주제 의식은 명확한데 캐릭터가 죽는 느낌이었으니까.

"어떤가요?"

"네?"

대본을 끝까지 읽고 덮자 이태환 감독이 물었다. 질문의 뉘앙스가 미묘하다.

"좋네요. 이런 멋진 배역에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하네요. 꼭 하고 싶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작품이었고, 작품 자체도 좋았으니.

"끝인가요?"

"네?"

"허헛, 아닙니다. 수한이가 그러더라고요. 이지우 씨한테 조언 많이 들으라고요.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이태환 감독이 쓴 각본에 이수한 감독과 현주가 달라붙어 수정한 각본이다. 조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개봉 안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좋네요.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잘해주시리 믿습니다."

세부 사항은 제작사와 협의 후 계약하기로 한 뒤 헤어지려는데 이태환 감독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수한이랑 연락되나요?"

"아뇨. 그러고 보니 일주일쯤 연락이 안 오긴 하던데요."

병원에 있을 때는 간간히 병문안도 오고, 작품 관련해서도 연락을 주고받았던 이수한 감독이 연락이 오지 않은 게 일주일이 지났다.

"각본작업 도와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안 돼서요···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애도 아니고."

"네··· 그렇겠죠?"

애가 아니긴 한데. 영화에 관련된 것 빼고는 애새끼랑 다른 게 없는 것 같기도 하고···

***

이수한 감독이 소개해줬던 손해사정사가 유능하긴 한가 보다.

처음 입금됐던 영화에 걸려있던 보험에서 나온 1,000만 원. 그 이후에 내 앞으로 있던 보험에서까지 후유장애 보상금 명목으로 차례로 입금됐다.

다 합치면 약 1,500만 원가량이 나왔다. 이미 병원비로 지급한 실비 보험의 진단비와 치료비를 합치면 2000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당장 생활비는 모델을 했을 때 벌었던 돈과 영화 촬영하며 벌어둔 돈, 그리고 [민주를 기다리며]를 계약한 금액까지 있기에 문제가 없었다.

완전한 여윳돈 1,500만 원이 생긴 셈이다.

자연스레 투자를 알아보려는데 마땅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었다.

미래지식을 알고 있으니 애플이나, 삼성 같은 곳에 투자하면 되지 않겠냐 하겠지만, 그 주식들이 오르는 것은 알아도 언제 오르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당장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은 나로서는 애매하기도 했다.

주식이 아무리 올라도 몇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올라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렇기에 1,500만 원이라는 금액은 어중간한 금액 일수 밖에 없었다. 분명 20살인 내게는 큰돈이 분명하지만, 이 돈으로 무언가를 크게 하기에는 적은 금액이었다.

그렇게 며칠 고민하고 애플과 삼성전자 등에 투자하려고 마음먹고 증권계좌를 개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 후인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곧 애플이 스마트폰을 개발하지 않겠나. 그런 단순한 발상이었다.

투자는 투자고, 돈은 연기로 벌어야지.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다리가 불편하기에 큰맘 먹고 은행을 가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02로 시작되는 모르는 번호. 스팸 전화라 생각하고 받지 않아도 됐었지만, 이상하게 받고 싶어지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수신자 부담 전화입니다. 받으시길 원하시면 아무 버튼을 눌러주세요. 연결됩니다. 삐-

-지우야 나 이수한 이야! 이수한 감독.

아니, 이 양반은 휴대폰은 또 어쩌고 수신자 번호로 전화를 하는 건지. 키패드의 버튼을 누르자 연결이 되었다.

"형 어떻게 된 거에요?"

-후아, 미안하다 지우야. 지금 당장 전화번호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고. 잠시 분식집으로 가도 되냐?

"네?"

은행이야 이수한 감독을 만나고 가도 되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손해사정사를 소개해준 것도 그였고, 이수한 감독이 영화에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여윳돈을 은행에 맡길 일도 없었을 테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죠. 분식집으로 오세요."

점심시간을 살짝 지난 분식집은 한산했다.

그리고 거기서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수한 감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병문안을 왔을 때였으니 한 삼 주쯤 지났나? 그런데 지금의 그는 몰라보게 수척해 보였다. 행색은 노숙자와 일반인의 그 어딘가였고.

"형 무슨 일 있어요?"

연신 입구 쪽을 쳐다보는 이수한 감독.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불안해 보이는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네고, 이수한 감독에게 묻지도 않고 어머니에게 라면과 김밥을 부탁했다.

원래는 좀 제대로 한턱 쏘고 싶었지만 이수한 감독의 몰골이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보이기에 일단 먹였다.

음식을 나오고,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기다린 후, 그가 좀 정신을 챙길 때쯤 물어봤다.

"형, 편집은 잘 돼 가요?"

"어? 어··· 뭐 그렇지."

무슨 일이 있는지 묻기 전에, 그의 자존심을 배려한 내 물음이었다.

문제가 생겨서 20살짜리 동생을 찾아왔음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내가 직접 물어봐 이수한 감독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솔직하지 못했다. 지금의 행색과 분위기는 전혀 아닌 것 같았으니.

"휴··· 솔직하게 말해봐요. 무슨 일인지."

"아냐, 걱정하지 마. 별일 아니야."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영화도 이수한 감독도. 이미 이태환 감독에게 각본 수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냥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필름 어딨어요?"

"창고에 있어 걱정하지 마."

"그럼 편집 안 하고 있다는 거네요."

"아? 어? 곧 할 거야, 지금 편집실 잡기가 빡세네."

유도신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 간단한 물음조차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이수한 감독. 그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미 편집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형 사채 썼죠?"

"하···"

이 상황에 왜 사채까지 끌어다 썼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영화가, 필름이 중요한 거니까.

"휴··· 일단 편집부터 하죠. 필름 가지고 와서···"

내가 필름을 가지러 갈듯이 일어나니, 이수한 감독이 깜짝 놀란듯이 나를 붙잡았다.

"안돼··· 내가 군고구마 리어카 맡기는 곳 알지? 내 짐 맡겨 놓은 곳."

"네 알죠. 우리 거기서 촬영도 했잖아요."

"그 사장이 사채꾼인데··· 본업이 조폭이야. 자판 상인들 상대로 자릿세 받는. 필름이 거기에 있어."

이수한 감독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군고구마 리어카를 빌려주고 자릿세 받는 그 사채꾼이 처음엔 친절했다고 했다.

손수 장사할 자리도 알아봐 주고, 이수한 개인 짐도 창고에 두게 해주고, 영화 촬영까지 허가해주는 등.

그런데 [폭력의 사슬] 촬영이 연기되자 촬영 비용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후반부 작업을 위해 그 사채꾼에게 돈을 빌리게 되었고 갚지 못 한 체 몇 달이 지나자 쫓기게 된 것이다.

영화 촬영이 연기 된 게 문제였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김범이 문제없이 연기를 했을 것이고, 시나리오가 바뀌지 않았을 것이며, 영화도 정해진 예산안에서 끝났겠지.

나비효과라 할까. 나의 개입으로 영화의 미래가 뒤틀려버렸다.

"원래는 일해서 갚으려 했는데···"

이수한 감독을 탓하려다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천천히 먹어요···"

이 멍청한 양반아··· 그런 상황에서 이태환 감독 각본을 수정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나를 도우려 한 그의 마음은 십분 이해가 갔다. 내가 다리를 다친 것이 맘에 걸렸든, 내가 새로운 영화를 찍기를 바랐든, [폭력의 사슬]이 극장에 거는 걸 우선으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이수한 감독에게 고마움과 답답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내가 불러온 나비효과로 인해 영화가 극장 근처도 못 가보고 엎어지게 생겼다.

어차피 벌어진 일. 지금 잘못을 탓하기에는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빚이 얼마예요?"

"천오백."

천오백만 원. 마치 원래 이러기로 안배돼있던 것과 같은 금액이다.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수한 개인에게 빌려주는 게 아니라, 영화에 투자한다면? 내 지분은 약 15%가 좀 안 된다.

만약 전생만큼만 [폭력의 사슬]이 성공한다면.

대충 계산해도 7억 5천의 매출. 거기에 세금, 영화발전기금, 극장 수익 빼고 순수 제작사가 가져가는 금액을 계산하면.

약 4억.

거기에 내 지분 15%를 계산하면 나오는 금액이 6,000만 원.

정확한 금액은 아니지만, 원금의 4배 이상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1년 안에. 확신 없는 주식보다야 훨씬 믿음직한 돈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이상 성공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형, 우리 이렇게 합시다."

"뭐?"

"그 돈 제가 줄게요. 1,500만 원."

"뭐? 빌려준다고?"

아무리 이수한 감독한테 고마워도 그건 무리다.

"아뇨. 이제 투자자님이라고 부르세요."

이수한 감독의 눈이 커졌다.

"내가 우리 영화에 투자하겠다고요. 천오백."

이수한도 살고, 나도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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