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6화 (17/121)

16. 재충전

16.

오토바이 스턴트를 배울 때 딱 한 가지만 기억이 난다.

'넘어질 것 같으면 빠르게 오토바이를 버려라.'

나를 담당했던 스턴트맨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이다.

오늘 있는 오토바이 액션씬도 같은 맥락이다.

타이밍 좋게 오토바이를 버리는 것.

가볍게 몸을 풀고 준비했다.

의외로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이수한 감독이 쉽게 허락했다.

배달 많이 해봤다고 오토바이 스턴트를 허락한다?

아마 그런 건 이수한 감독 머릿속에 없을 것이다. 사고가 난다는 생각조차 안 할 수도 있다.

대충 궁예질 해보자면, 오토바이를 잘 못 다루는 자신보다, 내가 타면 그림이 더 잘빠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을 테지.

촬영장에 노동법이 정착되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감독의 결정에 토를 달만 한 문화가 형성되지도 않았고.

시기적으로 그랬다.

어찌 보면 야만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다.

원하는 속도를 위한 거리를 재기 위해 점프대 앞까지 몇 번 왕복하며 예행연습을 했다.

스텝들이 제 위치로 가고, 스탠바이 사인이 들어왔다. 나는 스쿠터에 앉은 채로 준비하고 있었고.

이수한 감독이 가까이 다가와 긴장을 풀어 준답시고 말을 걸었다.

"긴장하지 말고, 속도 너무 올리지 마. 한 30킬로? 그 정도만 땡기고 바로 오토바이 던져버려. 나머지는 편집으로 어떻게든 할게."

"긴장 안 해요."

"긴장 좀 해라. 너 다치면 촬영 나가리 되는거 알지?"

"뭐 어때요.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촬영장 스텝들과는 거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감독이 배우의 연기를 디랙팅 하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상은 나보다 더 긴장한 이수한 감독을 내가 진정시키는 모양새지만.

"형, 우리 이거 잘 되면 토크쇼나 인터뷰 같은 데서 촬영장 비하인드 스토리라면서 이 썰 풀 날이 오지 않을까?"

"뭐? 뭔 소리야."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형은 그때 칠 멘트나 고민하고 있으라고. 감독인 형이 나보다 더 긴장하면 어쩌자는 거야."

"너랑 이야기하다 보면 20살짜리랑 이야기하는 건지 20년 위 선배랑 이야기하는 건지 헷갈린다 임마. 조심해."

단순히 20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한, 말장난이었겠지만, 뜨끔 했다.

'진태'(김범)를 때리는 깡패들 사이로 오토바이가 날아가고, 그들 사이에서 '진태'를 구해 내는 씬.

실제 촬영은 오토바이 스턴트를 찍는 촬영과 깡패들 사이로 날아가는 오토바이 씬이 따로 찍힌다.

그렇기에 오토바이 스턴트를 총 두 번 해야 하는 셈이다.

먼저 깡패들 사이로 날아가는 장면을 찍었다.

'위이이잉'

짧은 거리를 가속하며 점프대까지 단숨에 달렸다.

대략 시속 30km 정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오토바이를 점프대까지 올린다음,

'부우웅'

마찰음이 사라지며 마치 엔진이 공회전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잠시 부유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바이크의 손잡이를 놓고 뛰었다.

'콰콰콰광'

박살이 나며 미끄러져 날아가는 스쿠터.

첫 점프는 다행히도 성공. 깡패 역할을 하는 조연들 사이로 정확하게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나도 매트 위에 안전하게 떨어져서 무사했고.

그리고 바로 두 번째 점프를 준비했다.

두 번째는 나와 스쿠터가 공중에 뜨는 모습을 찍어야 했기에, 카메라의 위치를 옮기고 점프대와 매트 등의 위치를 옮겼다.

스텝들이 부산이 움직이며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이수한 감독과 함께 방금 찍은 장면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잘 나왔다. 뛰는 폼도 어색하지 않았고, 구도도 잘빠졌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전을 위해 풀 커버 헬멧을 쓰다 보니 얼굴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어차피 처음 뛴 장면은 오토바이가 날아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찍은 거니 상관없지만.

첫 번째 스턴트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좀 진정이 되자 욕심이 났다. 생각보다 할 만하다는 느낌?

"감독님. 이번에는 헬멧 벗고 뛰어도 되나요?"

"안 돼! 위험해."

"방금 뛰는 거 안 보셨어요? 괜찮을 것 같은데? 이왕 제가 뛰는 거 얼굴 안 나오면 아쉽잖아요."

이게 나도 어쩔 수 없는 배우인 게, 배우로서 위험한 장면을 대역 없이 찍는데 얼굴이 안 나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스턴트를 하게 됐지만 이건 못 참는다.

"감독님. 이거 제가 아무리 신인이지만, 제가 스턴트까지 하는데 얼굴까지 안 나오면 너무 억울하죠. 정 안되면 풀 커버 헬멧 말고 얼굴이 보이는 헬멧 주시던가요."

처음에 강경하게 안 된다고 말하던 이수한 감독이 고민하는 눈치다. 그동안 내 말을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하던 이수한 감독이었다. 그런데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걸 보니, 그도 고민이 되는 모양.

하지만 이건 나한테도 중요한 문제다.

내가 스턴트맨으로 여기 온 게 아니잖은가.

절대로 내가 과민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주요한 액션을 대역 없이 찍는데 제대로 얼굴이 안 나온다면 모든 배우가 항의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작품 설정상 ‘석환’이 스쿠터 타면서 이 비싼 풀 커버 헬멧 쓰는 게 말이 됩니까?"

"하··· 미친 새끼."

그러더니 가까이 와서 귓속말로 말했다.

"현주한테는 내가 시켰다고 하지 마라. 이거 걸리면 나 현주한테 맞아 죽는다."

"어휴, 걱정하지 마세요. 현주 걔, 제가 했다고 하면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맨날 잡혀 사는 주제에 말은···"

일주일을 넘게 분식집에서 각본을 같이 썼다. 아무래도 이수한 감독 입장에서는 현주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잡혀 살아도, 이건 일이지 않은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 아마도?

촬영 준비가 끝나고 헬멧을 벗은 채로 오토바이를 탔다. 이전 부서진 것과 다른 새 스쿠터였다.

아까보다 넓어진 시야. 크게 심호흡하고 스로틀을 당겼다.

점프대를 뛰어오르고, 오토바이를 버리는 것까지는 똑같았다.

'덜컹'

발목에 무언가 걸리는 감각과 동시에 공중에서 멈추는듯한 느낌.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매트 위로 떨어졌다.

"으윽···"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오른 발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머, 어떻게!"

"이거 빨리 치우고, 119 불러!"

오토바이가 부츠에 걸려 날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발목을 찍어누른 체 떨어진 듯했다.

몇몇 남자 스텝들이 오토바이를 들어 치웠다.

그나마 바닥의 매트 덕분에 다른 곳은 괜찮았지만, 발목의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주변의 스텝과 배우들이 놀라 나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 인파를 헤치고, 이수한 감독이 튀어나왔다.

"야야, 괜찮아? 이거 몇 개로 보여."

내 어깨를 붙잡고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는 이수한 감독.

"감독님, 장면 잘 나왔어요? 오토바이 날아가다 말았는데."

"미친 새끼, 그게 지금 중요하냐!"

아니, 지금 발목이 아작나면서 뛰었는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냐고.

"잘 뽑혔냐고요!"

내가 흔드는 손가락을 거칠게 잡으며 목소리를 크게 말했다.

"잘 나왔어, 잘 나왔다고! 걱정하지 말고, 이거 몇 개로 보···"

세 개··· 이수한 감독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기절했다.

***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석고 판넬의 천장. 주변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병원이 분명한데.

문득 아무도 없는 병실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혹시 내가 긴 꿈을 꿨던 건 아닐까.

번개탄을 피웠던 그 날, 재수 없이 누군가가 나를 구해 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아무도 없는 그때로 돌아와 버린 것은 아닐까?

심장이 빨리 뛰며 모든 모공이 열리는 듯 싸한 느낌이 들었다.

거울을 봐야 한다. 그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얼른 확인해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침대 밖을 나가려는 순간, 바닥을 딛지 못하고 고꾸라져 버렸다.

그제야 다리를 칭칭 감은 붕대가 보였다.

"하··· 하하하하."

안도의 한숨 뒤에 허탈한 웃음이 뒤따랐다.

바보같이··· 이불 한번 들춰볼 생각 못 하고···

그리고 뒤이어 내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머니와 현주가 허둥지둥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우야, 괜찮아?"

"어머머, 아들 왜 그래? 많이 아파?"

양쪽에 어머니와 현주가 붙어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찔끔 나온 눈물을 닦고 놀란 듯한 두 사람을 봤다.

"괜찮아, 진짜 괜찮아."

내가 놀라 넘어진 건 다리를 다쳐서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 나니 뒤따라온 이수한 감독과 이태환 감독이 보였다.

아마도 다른 환자들과 잠든 내게 불편을 끼칠까 봐 밖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듯했다.

"미안하다. 내가 말렸어야 하는데."

심각한 얼굴로 사과하는 이수한 감독.

"아니에요, 제가 한다고 했는걸요."

"그래도··· 갑자기 기절하길래 머리 다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이게 뭐 이수한 감독 탓이겠는가. 일하다 보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거다. 거기에 헬멧을 안 쓴 건 내가 주장한 것이기도 하고.

"그보다 장면은 잘 나왔어요?"

"네, 지우 씨 덕에 기가 막히게 뽑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이수한 감독 대신 뒤쪽에 있던 이태환 감독이 말했다. 사고가 날 때 끝까지 카메라를 잡고 있었던 그였다.

오토바이가 떨어지면서 발목을 짓눌렀고 뼈가 부러졌다.

다행히 기절한 건 머리를 다쳐서가 아니라 통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다리를 제외한 다른 곳은 큰 문제가 없었다.

부러진 다리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큰 후유증이 남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 수술비랑 병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촬영장 보험 들어 놨으니까. 걱정 없을 거예요. 제가 아는 손해사정사도 있으니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아이고, 잘 부탁한다 수한아..."

"아닙니다. 지우 다친 거 전부 제 잘못입니다. 죄송하네요."

이수한 감독이 어머니에게 크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대략적이 상황 파악과 정리가 끝난 뒤, 이수한 감독을 따라온 이태환 감독이 자리를 뜨기 전,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내가 조만간 연락해줄게요."

몸조리 잘하라고 몇 번을 말하면서 떠났던 이태환 감독.

사실 이태환 감독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작품 제작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다리가 다 나으려면 최소 3개월은 걸리지 않을까?

그 기간을 신인배우를 위해 기다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가 나를 아무리 좋게 봤더라도 이태환 감독 또한 아직 감독으로는 신인이다. 제작사를 설득할 만한 영향력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민주를 기다리며]는 아쉬운 작품이지만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겼다.

며칠 후, 다리에 철심 박는 수술을 했다.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지나 퇴원했다.

먼저 보험처리부터 했다. 수술비와 병원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기에.

이수한 감독이 잘 안 다는 손해사정사를 소개해줬다. 업계 특성상 다치는 사람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 동료들을 소개해주다 안면을 트게 되었다고 했다.

그답다고나 할까. 그의 수상할 정도의 많은 인맥은 그의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투박하지만 주변을 세심히 챙기는 이런 이수한 감독의 모습 때문에 이 정도 비용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거겠지. 다친 동생들 걱정하며 여기저기 발로 뛰고, 보험사정사를 알아보고, 없는 돈 쥐어 짜내어 보험까지 가입해놓고.

생각해보면 현주와 어머니를 빼면 이수한 감독이 병문안을 가장 많이 왔었다.

수술비와 입원비 정산을 위해 손해사정사와 몇 번의 만남을 가지고 병원도 새로 알아본 뒤, 여러 검사를 추가로 받았다.

삼복사골절에 신경 및 근육 손상으로 보험금을 청구했다.

그래, 작품 끝나면 한두 달은 쉬어야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폭력의 사슬]은 몸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촬영이었으니, 재충전할 기회라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서 대본분석과 영어 공부, 그리고 못 봤던 영화나 보면서 며칠을 뒹굴었다.

'띠링'

'띠링'

두 개의 문자가 동시에 왔다.

백수나 다름없는 내게 누가 문자보낸거지?

현주는 개강하고 많이 바쁠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보험금 입금 문자였다.

그런데 금액이 좀 이상하다?

입금 된 금액이 병원비보다 훨신 많았다.

이미 내 앞으로 들어놓은 실비 보험으로 병원비를 다해결했는데도 불구하고 약 1000만원 정도가 더 입금 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른 문자는 이태환 감독의 문자였다.

[시나리오를 다리가 아픈 청년으로 수정 했습니다. 잠시 만났으면 하는데 불편하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연락주세요.]

이태환 감독이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재충전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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