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상할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15.
허름한 대폿집. 이수한 감독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감독과 술 한잔하는 중이었다.
"내일이 마지막씬이라고?"
"어."
마지막 촬영은 영화에서 가장 큰 액션 장면을 찍는 날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촬영감독이 다른 스케줄과 겹치면서 [폭력의 사슬] 촬영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촬영감독이 원래 고정으로 하던 촬영이 있었기에 [폭력의 사슬]이 후순위로 밀린 것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염두하고 부탁한 것이기에 불평할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고 로케이션과 다른 스텝과 배우의 스케줄을 모두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독립 영화를 찍는 선배에게 하루 헬퍼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셔 내일이 좀 피곤할 수 있겠지만, 이수한 감독은 술 한 잔에 하루 일을 도와주는 이태환 감독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찌 끝까지 찍기는 하네. 찍다가 엎어질 줄 알았더니. 어때? 첫 영화 끝내 본 소감이."
"첫 영화?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어."
이수한 감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크크큭,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
배우의 발연기로 필름이 모자라고, 그 때문에 원래 구상했던 각본도 엎었다. 그뿐이랴, 항상 모자란 스텝으로 감독 본인이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상황도 빈번했으니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은 무수히 많다.
이수한 감독, 자신의 역량을 벗어난 배우. 그의 덕분이긴 하지만.
"딱 하나 있더라. 좋은 배우가 있으니까 그래도 장면이 살더라고. 선배들이 비싼 배우 데려와 쓰는 것도 이해가 되고."
이태환 감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하지 않았냐? 언제부터 니가 좋은 배우 타령했다고."
이수한 감독이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영화는 감독의 예술 그렇게 믿을 때도 있었지.'
"글쎄, 이제 모르겠어. 이번 영화에 촬영했던 배우를 보니 꼭 그렇지마는 않은 것 같더라고."
"무슨 소리야?"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데··· 내 영화였어, 근데 다 찍고 나니 내 영화가 아니게 되더라고. 이건 그의 영화라 봐야 해."
이태환 감독이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수한 감독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했다.
"감독으로서 절망하고 영화인으로서 열광할만한 일이야. 내가 구상하고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배우가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하더라. 내가 추구했던 미장센, 구성, 연출, 그런 것들보다 훨씬 심도 있게 말이야. 이걸 내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너 깡패영화 찍는 거 아니였냐? 게다가 주연배우는 다 신인이라며. 니 영화 조연중에 그런 역할을 할만한 배역이 있었나?"
서로 각본을 주고받으며 감상평을 주고받는 사이이니만큼 서로의 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이태환 감독이 알기로는 [폭력의 사슬] 내용상 그 정도로 비중 있는 조연은 없었다. 그나마 처음부터 끝까지 비중이 있는 조연은 '석환' 정도였으니.
"신인? 그래 신인이지. 그런데 촬영장에서 보면 무슨 20년 차 배우 같은 신인."
"그 배우가 누군데? 나 다음 작품 들어가는 거 알고 있지? 이미지 맞는 역할 있을까? 시나리오는 너도 봐서 알잖아."
"그 방송사 협력으로 하는 거?"
"어, 그거. [민주를 기다리며]."
이태환 감독이 의자를 바싹 끌어당기며 말하자, 이수한 감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일 형이 촬영하면서 봐봐. 형이나, 나나 지금 아니면 캐스팅해 볼 급이 안될걸?"
***
[폭력의 사슬]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제까지는.
김범의 연기는 불안한 모습은 여전하지만, 그 특유의 맛이 살아났고, 나는 이전생 보다 훨씬 더 나은 연기를 했다.
나조차 놀랄 정도로. 다른 대본으로 연습 삼아 연기해봤지만 유독 현주의 손이 닿은 대본에 더욱 몰입되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폭력의 사슬]의 '석환'의 연기는 내가 봐도 흠잡을 때 없는 연기였다.
영화 촬영은 일반적으로 영화의 진행과 관계없이 현실적인 부분을 많이 고려하여 촬영된다.
오늘을 끝으로 촬영이 끝난다. 영화상으론 1부 끝부분에 들어가는 오토바이 스턴트가 들어가는 대규모 격투씬.
이수한 감독이 쓴 각본대로라면 영화의 끝을 장식할 장면이었지만, 시나리오가 수정되면서 1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바뀌었다.
꽤나 큰 격투씬이고 로케이션과 여러 배우와 스태프들의 제한을 모두 고려하여 미루고 미루다 보니 마지막에 촬영하게 된 것이다.
오늘 찍을 격투씬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 오토바이 스턴트 촬영만 남아 대기하고 있는데 오늘 촬영감독 땜빵으로 들어온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네? 네, 안녕하세요."
주변에 나 말고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주 인사했다.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저는 이태환이라고 합니다. 수한이 선배예요. 오늘 촬영 도와준다고 잠시 왔는데, 신인이시라고요?"
아! 이태환. 그제야 이수한 감독의 미니 홈피에서 봤던 그의 모습이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그가 앞으로 찍게 될 영화에 관해서도 떠올랐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공중파 단편영화 특집 또한 떠올랐다.
"네. 신인입니다. 오늘 카메라 감독님 대신 오신 분 맞으시죠?"
"맞습니다. 원래는 연출 전공이긴 한데··· 수한이 녀석이 하도 사람 없다고 징징대서요. 그렇게 됐네요. 혹시 초면에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매니저가 따로 있나요?"
유독 새로 온 촬영감독이 나를 신경 쓴다 싶었는데 이런 관심이면 환영이다.
"아뇨 따로 없습니다."
"아, 그럼 혹시··· 폭력의 사슬 끝나고 잡혀있는 작품 있나요?"
뻔한 의도의 질문.
이 시기에 이태환 감독이 찍는 작품이라면, 시기적으로 [민주를 기다리며]가 분명했다. [폭력의 사슬] 촬영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알아보려 했던 작품이 제 발로 찾아온 상황이었다.
"혹시 준비 중이신 작품이 있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러만 주십시오."
"네네, 아이고 그런데 제가 아직 명함이 없어서, 전화번호 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이태환 감독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있는데 촬조부(촬영+조명) 쪽에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중심에는 전화 통화를 하는 이수한 감독이 있었고.
"뭐? 하··· 많이 다쳤냐? 어디 병원인데?"
"아냐. 니가 미안할 게 뭐 있냐. 내가 미안하지. 그래그래 몸조리 잘하고. 나중에 연락할게."
대충 누가 다쳤고, 문제가 되는 상황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감독님,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스턴트 해주기로 한 동생이 다른 촬영장에서 다쳤다는데···. 하··· 씨."
"그 오토바이씬이요?"
"어···"
스턴트맨이 늦는다 싶더니 결국 일이 터졌다.
[폭력의 사슬]은 독립 영화지만,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로서 장르적 재미를 담는다. 액션 장르가 폭력이라는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중 오늘 진행될 오토바이를 던지면서 등장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싼(?) 장면이었고 스턴트맨(이수한 감독의 수상할 정도로 많은 후배 중 한 명) 까지, 대역으로 준비한 장면이기도 했다.
'진태'(김범)의 위기 상황, '석환'(이지우)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와주러 오는 씬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태'를 도와주지만, 복수에 눈이 뒤집힌 '진태'는 '석환'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람을 죽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석환'과 '진태'는 갈라지게 되고, '석환'은 상대 조직으로 스카우트 당하게 된다.
이미 오토바이를 띄우기 위한 점프대와 부상 방지를 위한 매트까지 다 세팅이 된 상태.
큰 촬영을 앞두고 삐걱대는 현장. 촬영감독은 땜빵으로 오고, 스턴트맨은 다치고.
상황이 정리되지 않아 모든 스텝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큰 결심을 한 듯 이수한 감독이 나섰다.
"하이바 줘봐. 내가 한다."
"아니 형님. 진짜 미쳤어요? 바퀴 달린 거 몰아본 건 군고구마 리어카 밖에 없는 사람이 무슨 오토바이를 타요. 뒤질라고."
이수한 감독을 말리는 조감독.
"놔봐. 영화 못 찍고 피 말려 죽나, 이 장면 찍다가 뒤지나, 어차피 뒤지는 거야. 빨리 하이바 줘봐. 연습해보게."
반쯤 눈이 뒤집힌 이수한 감독.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 장면이 중요한 장면인 건 맞다. 만약 재촬영한다면 빌린 장비며, 스텝들 일당이며 손해가 큰 것도 사실이고.
이수한 감독 입장에서 크게 맘먹고 기획한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으니 사니 하는 건 이해 안 가는 모습이었다.
저 인간 진짜 사채 썼나?
그런 의심은 둘째로 두고, 타본 적 없는 오토바이로 스턴트를 하겠다니. 스턴트가 장난인 줄 아나.
나도 오토바이 스턴트를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무명 시절 딱 한 번 오토바이 스턴트를 배운 적 있다.
그때도 스턴트 배우가 다치는 바람에 원동기 면허를 가진 내가 땜빵으로 들어가게 된 거였다. 그때는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한다고 했으니까.
메인 스턴트 주변에서 느리게 달리기만 했던 역할이었지만, 면허도 없는 이수한 감독보다야 잘하겠지.
실제 촬영이 들어가기 전 몇 시간 교육받기도 했고, 이전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배달 아르바이트하면서 많이 타기도 했었고. 사고도 몇 번이나 났었고.
스턴트라는 게 일부러 사고를 내는 것과 비슷한 것 아니겠나. 그런 느슨한 마음이 있었다.
이수한 감독이 사고가 나서 영화가 파토가 나는 상황, 혹은 내가 다쳐서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할 확률을 고민했다.
어차피 마지막 촬영. 추가 촬영이 필요할지는 미지수이겠지만, 이 촬영이 끝나면 공식적으로 더 이상 촬영은 계획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수한 감독은 편집이라는 중요한 업무가 남아있지 않나.
그래서,
"감독님 이거 그냥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사실 내가 고민했던 건 이걸 할까 말까 하는 것 보다, 어떻게 감독을 설득하느냐가 더 컸다.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스턴트가 장난인 줄 알아?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냐."
내가 보기엔 이수한 감독이 무모한 것 같은데. 이수한 감독이 여러 현장에서 많은 것을 경험해본 것은 알겠지만, 스턴트를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에이 솔직히 감독님이랑 나랑 키 차이가 10cm 넘게 나는데 감독님이 내 대역하는 게 더 안 맞죠."
실제로 준비된 의상은 한 벌 뿐. 만약 이 의상을 이수한 감독이 입는다면 짧게 잡히는 화면상에도 티가 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배우한테 스턴트를 시킨다는 게···"
"저 오토바이 잘 타요. 배달 알바 하도 많이 해서."
그렇게 말하고 오토바이의 시동을 켜고, 앞브레이크를 잡은 상태로 스로틀을 당겼다.
준비된 오토바이라고 해봐야 배달용 50cc짜리 스쿠터 두 대.
영화 배경 상 '석환'이 비싼 바이크를 모는 게 안 맞고, 돈 없이 찍는 이 영화의 한계로 마련된 작은 스쿠터였다.
엔진과 바퀴에서 커다란 소음을 내며 흰 연기가 바퀴와 배기구에서 동시에 나왔다. 앞바퀴는 제자리, 뒷바퀴는 회전하면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스쿠터가 회전하며 동그란 스키드 마크를 남겼다.
"이거 빨리 찍고 다음 씬 넘어가죠."
내가 한 건 사실 별것 아닌 거긴한데, 스탭들의 눈빛이 좀 이상하다.
수상할 정도로 연기 잘하고 오토바이도 잘타는 고삐리를 보는것 같았다.
고삐리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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