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4화 (15/121)

14. 시너지

14.

촬영간 김범의 트롤링으로 날려 먹은 분량. 그리고 원래 스토리를 옴니버스식으로 다시 각색한 스토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는 필름이 모자란 상태였었다.

이전 촬영 간에 이수한 감독이 필름 가지고 배우들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이게 아닌데··· 싶은 테이크도 그냥 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이수한 감독이 의기양양하게 돈을 구해왔다며 영화를 찍자고 사람을 모았다.

어디서 신체 포기각서라도 쓰고 온 것 아닌가 불안하다.

나중에 김범한테 했던 그것처럼 이수한 감독 손잡고 동사무소와 법무사 투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

어쨌건 개강을 하면서 기존 스텝 중 대학생인 사람들이 대거 빠지면서 모인 스텝은 5명이 되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배우고 나발이고 없다. 촬영하기 위해 모인 인원이 다 움직여야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이 끝나니까.

나도 마찬가지였었다.

여기 있는 스텝들 경력 다 합쳐봐야 나랑 비슷할까?

스태프로 참여한 건 아니지만 내가 다녀본 촬영장이 몇 갠데.

그저 힘쓰는 일뿐만 아니라 조명이며 기구며 몇몇 어설픈 스텝들 보다는 내가 나을 정도였다.

적은 인원으로 애를 쓰지만 여기저기 구멍이 나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그 꼴을 보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고. 촬영이 시작되기 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거 누가 치운 거야?"

"이지우 씨가··· 카메라 워킹할때 방해된다고 치우라고···"

이수한 감독의 말에 한 스텝이 기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했어."

언제 인상을 썼느냐는 듯 스텝의 어깨 한번 툭 치고 다른 일을 보러 가는 이수한 감독.

감독이 이런 식이니 다른 스텝들도 나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분식집에서 일주일을 같이 보내며 이수한 감독은 내 연출적 지식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나를 믿는 거였다.

게다가 스텝들은 이전 촬영간 그들은 내 연기를 봤으니까. 지금까지 남아있는 스텝들은 이 돈 안 되는 일에 모든 것을 걸 정도로 열정적인 스텝들이다. 그런 스텝들 눈에 테이크도 짧게 가지고 가는데다 연기도 잘하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스텝들은 나를 '고삐리 배우'가 아니라, '수상할 정도로 연기 잘하는 고삐리 배우' 쯤으로 격상시킨 상태랄까.

"바뀐 시나리오 봤어?"

"어. 이지우가 후반부 원톱 주연이던데? 바뀐 시나리오도 이지우가 주장한 거라며?"

"그렇다더라고. 훨씬 좋더라. 처음에는 분량 더 뽑아 달라고 강짜 부리는 줄 알았는데, 이전보다 스토리가 더 좋던데?"

"그러게. 김범보다 연기도 잘하고. 차라리 김범 대신 이지우 원톱 주연이 좋지 않나?"

"조감독이 그러던데, 원래 그렇게 해보지 않겠냐고 이지우한테 권유했었데. 이지우 원톱 주연으로 가자고. 그런데 이지우가 그럴 바에 옴니버스 스토리로 가자고 했다더라고."

"하기야 김범이 '진태' 역에는 잘 어울리기는 하지."

"에이, 아무리 잘 어울려도 이지우는 연기가 되잖아."

"그만하고 일이나 하자, 김범 듣겠다."

이런 주변의 말에 유치하게 반응해서 콧대 높게 건방 떨 생각은 없다.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내가 평판이나, 인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아닌데, 내 기억에 여기 있는 스텝 중 일부는 나중에 자기 분야에서 대성하는 사람도 섞여 있다.

지금 좋은 인상을 남겨 놓으면 나중에 좋지 않을까 하는 전략적인 생각도 있었다.

김범도 주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나서서 장비를 옮기자 거드는 중이었고.

촬영장에서 한창 노가다를 하는 와중, 의외의 인물이 촬영장으로 왔다.

포토그래퍼 강진호였다.

사진기를 들어 올리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지우 씨, 오? 이거 찍어도 돼요? 지금 일하는 모습."

뭐라는 거야.

바쁜데 지금 사진을 찍을 시간이 어디 있나. 다른 스텝들 분주한데, 지금 사진 찍느라 포즈잡고 사진 찍고 하면 욕먹기에 십상이다.

도와주는 척하며 논다고.

"강 씨, 시끄럽고 이거나 날라요."

강진호가 정식으로 포스터 사진 촬영 및 포스터 제작까지 맡게 됐다고 했다.

그는 내가 든 짐을 받아 들더니 말했다.

"이번에 영화 포스터는 처음이라 장비 대여료만 받고 하기로 했어요. 보니까 영화판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

사실 별로 없다기보다 몇 명에게 편중되는 경향이 심하다.

영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진 한 장으로 영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포스터를 뽑아내는 것.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그게 가능한 몇 명에게만 일이 몰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시나리오 나온 거, 이전 것 다 읽어봤는데 확 떠오르는 데 없더라고. 그래서 정확한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촬영장에서 같이 다니려고요."

이게 강진호 스타일이긴 하다.

상업사진을 찍을 때 제작사가 시안을 내려주면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지만, 반대로 정확한 시안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그리고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 사진을 찍는다.

반응은 강진호의 해석을 덧붙인 사진 쪽이 좋았고. 아무래도 상업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던 양반이니까. 뭘 해야 팔리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이수한 감독 스타일상, 영화 찍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잘 찍어 주세요' 하고 계약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제작사가 없는 상황. 게다가 상업적인 감은 이수한 감독보다 강진호가 훨씬 좋다.

최종적으로 제작자(?)이자 감독인 이수한 감독에게 컨펌은 받겠지만, 그전까지는 강진호에게 맡기는데 결과는 좋을 것이다.

강진호까지 합류해서 대략 맴버가 갖추어진 느낌이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만약 지금 촬영장에 모인 사람들을 20년 후로 데려가 제작사 하나 붙이면, 블록버스터급 영화 한 편 뚝딱이다.

천만 영화를 두 편이나 찍은 이수한 감독에, 김범에, 나까지. 거기에 여기 단역으로 출연하는 몇몇 배우들은 향 후 주·조연 급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

촬영감독은 지금도 베테랑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나를 원톱 주연으로 세우려 했던 조감독은 나중에 제작자로 이름을 날릴 만큼 보는 눈이 좋고.

유일한 홍보 수단이라 할 수 있는 포스터를 강진호가 찍으니 이 정도 라인업이면 독립영화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됐다.

이전 역사에서 [폭력의 사슬] 관객 스코어는 10만.

독립영화치고는 유례없는 성공이긴 하지만, 내심 저 스코어에 두 배는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연기를 하잖나.

거기에 각본도 예전에 비해서 나아졌고, 연출과 관련해서는 이미 각본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수한 감독에게 내 생각을 알려줬다.

정확히 내 생각이라고 하기보다, 앞으로 영화제나 평단이 호평할만한 연출기법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촬영을 준비와 리허설을 끝내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촬영이 중단되기 전의 촬영분은 옴니버스 1부로 줄여 편집하기로 했다. 주로 김범이 연기하는 '진태'와 '진태'의 복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촬영은 주로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진태'와 내가 연기하는 '석환'의 갈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옴니버스의 2부부터는 현주가 쓴 [폭력의 사슬 : 석환]의 스토리가 메인이다. 그렇기에  '석환'의 입장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본격적으로 내가 주연으로 연기하기로 한 분량이다.

'씬 72, 하나 둘 셋.'

'탁'

클래퍼보드가 경쾌한 소리를 내고, 스텝이 재빠르게 프레임 밖으로 빠진다.

수십 개의 리어카가 모여있는 창고. 조직에서 자릿세를 받는 노상 상인들이 이용하는 창고였다. 어두운 조명으로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분간이 되는 곳에 '석환'이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진태' 결국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태' 경찰에 잡혀가고 '석환'은 도망친다. 그 과정에서 경찰 대신 죽은 조폭의 조직에 '석환'이 잡힌 상황이었다.

여러 명이 비켜서고 그 사이에서 한 명이 불쑥 튀어나온다.

묘하게 무게감 있는 분위기. 그리고 중년의 모습은 오랜 시간 험한 일을 겪어낸 듯한 강인한 인상이었다. 척 봐도 말단 조직원은 아닌 듯 고급스러운 옷과 금색으로 번쩍이는 두꺼운 반지가 보였다.

"얘가 걔야?"

주변의 한 조폭이 부하라도 되는지 "예, 맞습니다."를 과장된 동작으로 말한다.

"좀 치던데. 운동 좀 했냐?"

"..."

'쫙'

대답하지 않는 '석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다.

"운동 좀 했냐고."

"아니요."

"명현이 담근 애가 진태? 맞냐? 하여튼, 그놈은 삼두근 파 막내라더만, 너도 그쪽이냐?"

"...아닙니다. 저는 그냥 진태 친굽니다."

"그러면 너 우리 쪽에서 일 좀 배워라."

"아재요, 내 친구가 그쪽 한 명 담갔는데 나보고 밑에서 일하라는 게 말이 됩니까?"

"니가 진태 친구라고 했지?"

"...네."

"니가 내 밑에서 일하면 니 친구 살려줄게."

"..."

폭력배의 두목 역할을 하는 조연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잇는다.

"아니면 여기서 니가 그 새끼 대신 죽을래? 니 친구 때문에 우리가 손실 봤으니까 니 친구를 죽여서 셈을 맞추던가, 니가 일해서 셈을 맞추던가 해야 하지 않겠어? 이도 저도 싫다면 니가 여기서 죽던가."

스토리의 가장 큰 변곡점이 되는 장면이다.

현주가 쓴 [폭력의 사슬 : 석환]은 석환이 왜 '진태'를 죽였고, 죽인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대본을 이수한 감독과 함께 수정하면서 '석환'에게 부여된 새로운 서사.

이왕 2부에서 '석환'이 '진태'를 죽일 거라면 확실한 이유를 만들어주자. 그런 발상에서 수정했다.

내가 해석한 '석환'은 열등감과 불우한 가정환경, 그리고 '진태'의 무시와 폭력에 의해 진태를 죽인다.

하지만 이러한 '석환'의 행동은 주제 의식을 대변하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있지는 못했다. '진태'에게 집중하느라 '석환'의 서사가 많이 생략된 탓이다. 현주가 쓴 대본은 그런 점을 파고들었다.

마냥 밉기만 했다면 석환이 진태와 같이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를 하면서도 이전 대본으로는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던 내용이기도 했다.

'칙, 칙-'

중년의 조폭이 담배를 물자, 옆의 부하쯤 되어 보이는 조폭이 라이터를 가져다 댄다.

하지만 부싯돌이 불량인지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

이수한 감독이 '컷' 사인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현주가 만든 새로운 대본에 내 해석을 덧씌운다.

어쩌면 불우한 가정환경, 소외당하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친구 대접 해줬던 것은 '진태'가 아니었을까.

그 순간,

20여 년 연기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일체감이 느껴졌다.

현주의 생각과 사고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스윽'

내가 일어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치익-'

연기는 계속된다.

놀라는 듯했던 조연들의 모습은, '석환'이 의외의 행동을 하자 놀라게 되는 모습처럼 담길 테지. 오히려 자연스럽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함과 친구를 구하기 위함. 그 사이를 연기한다.

담배에 불이 붙으며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는 중년의 조폭. 그가 내 어깨를 슬쩍 두드리며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그 순간 분명히 '석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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