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난의 사슬
13.
음식을 파는 일이라 하면 당연히 음식 만드는 일이 제일 많을 것 같지만, 이는 오해다.
실제로 식당에서는 대부분 '준비'와 '청소'에 가장 많은 시간이 쓰인다.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서 말이다.
반대로 청소와 준비만 잘해놔도 하루 장사가 편하다.
영화 촬영이나 어제처럼 모델 일 때문에 가게를 비울 때면 일찍 분식집에 나와서 분식점 일을 다 해놓고 가는 이유다. 어머니 좀 편하시라고.
10시 반 가게를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대충 일을 끝내고, 어머니가 출근하는 시간에 교대했다. 오늘 할 일이 많았다.
어제 김범을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부채감? 그런 건 크게 중요치 않다. 앞으로 많은 작품을 할 텐데, 그때마다 나 때문에 떨어진 배우들을 걱정해야 하나? 그건 아니거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일부러 연기 수준을 낮춰서 하는 것은 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회귀했다고 해서 능력을 숨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상대가 초등학생이라도.
어차피 수정된 대본 기준으로도 김범의 분량은 상당하다. 내가 기억하는 [폭력의 사슬]의 화제성을 생각하면 이 영화로 김범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김범의 능력 부족이 맞다. 하물며 연기력이 부족해서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김범의 탓이고.
그런데 어제 김범의 사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김범의 불우한 삶이 김범 탓일까.
나의 가난이 내 탓이 아니듯이 그의 잘못이 아니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나의 20대에 누군가가 내게 현명하게 살 수 있는 조언 정도를 해줬다면, 가난이란 트라우마로 가정과 삶을 통째로 망가뜨리는 그런 일이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를 위해서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범이 나보다 나이가 2살 많다고 해도, 실제로는 내가 2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으니까.
"일어나."
기억을 더듬어 그의 집에 찾아왔다. 불과 몇 시간 전 왔던 내 얼굴을 할머니가 기억하고,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줬고.
아직 술이 덜 깼는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그를 다시 한번 깨웠다.
"일어나 오늘 바빠."
"응? 어? 뭐야, 니가 여기 왜 있어?"
"일단, 잔말 말고 바쁘니까 주민등록증만 챙겨서 나와."
정신 못 차리는 그를 깨워 나왔다.
그리고 주변 동사무소(현 행정복지센터)에 가 복지 담당 공무원 앞에 그를 앉혔다.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하러 왔습니다. 죄송한데 이 친구가 좀 모자라서··· 잘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담당 공무원한테 그렇게 말하자 그도 알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김범에게 현 상태를 물었다. 직장의 유무, 할머니의 상태 등. 그리고 김범은 술이 덜 깨서였을까? 아니면 잠이 모자랄 수도 있겠지. 얼떨결에 대답을 꼬박꼬박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공무원과 상담할수록 진지해져 가고 성실하게 답변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나는 민원 대기용으로 마련된 의자로 가 기다렸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애가 할머니 병원비 때문에 강도질을 하는 게 말이 되나. 김범은 할머니의 부양의무자가 아님에도 세대 분리가 돼 있지 않아 생긴 일이라 생각됐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각종 복지 혜택 중 생활비나, 의료비 지원 등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김범은 국세청에 잡히는 소득이 없는 상태라 할머니가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되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상태였고.
김범 주변에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김범이 뭐라도 하고 있으니 안될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거겠지. 주변의 어른이라 해봐야 대부분 깡패 새끼들일 테고, 깡패 새끼들이 이런 걸 알려줄 리도 없을 테니.
그렇다고 20대 초반, 반쯤은 깡패나 다름없는 애가 이런 걸 깊게 파고들어 알아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지 대학을 졸업하고 싶어서 기초생활 수급이며, 국비 장학금 등을 기를 쓰고 알아봤었다.
연기를 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어제 김범의 할머니와의 대화로 대략 상황 파악이 됐던 거다.
김범은 얼빠진 모습으로 '네네' 거리면서 담당자가 말해주는 서류를 받아적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래 걸릴 것 같아 대본을 펼쳤다.
아직 [폭력의 사슬] 최종본이 나오질 않아 연습용으로 출력해 둔 해외 영화의 영어 대본이었다.
나이를 먹고 아무리 공부해도 마음대로 펼쳐지지 않았던 영어 연기를 좀 일찍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한 영어 공부였다.
사실 영어는 꽤 잘하는 편이다.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 꾸준히 영어 과외를 하면서 익혔으니까.
문법이나, 토익, 토플, 등을 목표로 한 공부가 아니었고 철저히 회화 중심으로 공부했었기에 꽤 성과는 있었다.
영어로 일상생활 대화정도는 가능한 수준이었다.
다만 영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영어로 연기하는 것에는 하늘과 땅 차일 정도로 괴리가 있었다. 더듬더듬 말하고 뜻이 통하는 대화를 하는 것과 영어로 연기하는 것은 그만큼 큰 차이었다.
어조와 억양의 차이에서 오는 미묘한 뉘앙스. 그리고 제스처를 적절히 섞은 몸짓과 대사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기술. 그리고 정확한 딕션까지. 한국어로는 자연스럽게 되는 것들이 영어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기에 이번 생에는 일찍 시작했다.
내가 한국말을 쓰고, 한국어로 연기를 연습하는데 쏟아 부었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또 그 정도의 연기를 하기 위해서 봤던 수많은 영화를 본 시간은 얼마나 되고.
이미 그 모든 것을 다해본 내가 그 시간에 오직 영어를 파고든다면, 전생에 해보지 못했던 영어 연기를 해볼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처럼, 어떤 배역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어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런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한 영어 공부였다.
"뭐해?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그러면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하고 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동안 집중했는지 김범이 상담을 끝내고 오는지도 모르고 대본을 보고 있었다.
"아, 끝났냐? 따라와. 또 갈곳 있어."
힐끔 쳐다보는 김범을 무시하고 대본을 집어넣고, 일어섰다.
그렇게 김범을 데리고 무료 상담이 가능한 법무가, 요양병원 등을 다녔다. '이번에는 또 어디 가냐?'라고 토 달던 김범도, 마지막쯤 됐을 때는 잠자코 따라왔다.
만약 처음 데리고 동사무소에 갔을 때 이게 뭐냐, 니가뭔데?, 남자가 가오가 있지.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갈 길을 갔을 것이다.
내게 남았던 일말의 죄책감을 훌훌 털어버릴 좋은 기회이지 않나.
영화가 [폭력의 사슬]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영화가 잘 안되더라도 내게는 수십 년 쌓아온 연기에 대한 경험이 있고 그걸 표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단번에 주·조연으로 발탁될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흥행할 작품이기에 [폭력의 사슬]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 내가 [폭력의 사슬]을 선택한 거다. 배우로서 성공은 무조건 할 건데, 다만 빠른 길이 이 길이었기에 선택한 거다.
폭력의 사슬이 내가 가진 으뜸 패이긴 하지만, 이것 말고 배우를 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단역부터 시작해서 다시 연기하더라도 아마 전생의 절반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서 전생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갈 자신이 있다.
그렇기에 김범의 태도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면 미련 없이 손절하려 했었고.
다만 김범은 이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양지에서 일을 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기회를 주고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관공서와 병원 원무과가 운영 되는 5시까지 어찌어찌 일을 마무리 지었다.
더 보충이 필요한 서류는 꼼꼼하게 체크해서 처리하라 당부했고.
"밥 사줄게. 가자."
그렇게 헤어지려는데, 꼴에 형이라고 앞서서 식당을 찾는다. 김범을 위해 하루를 꼬박 투자했는데, 밥 정도는 대접 받아지. 하는 생각으로 주변 국밥집에 들어왔다.
와, 국밥 5000원. 싼가격에 잠시 놀랐다. 생각해보면 나의 20대때에는 저것도 비싸서 외식한다는 기분으로 사먹곤 했는데.
김범과 이야기 할 거리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으니 다시 대본집을 꺼냈다.
한국어만큼의 속독이 되지 않기에, 그리고 다른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천천히 곱씹으면 '왜이런 대사를 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읽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고 대본을 내려놓자 김범이 말했다.
"영어 대본은 왜보냐?'
"해외진출."
"미친 새끼."
저게 보통사람의 반응이긴 하다. 데뷔 조차 하지 않은 지망생이 해외진출을 염두해서 영어 대본을 공부한다니.
"준비해서 나쁠건 없지. 국내 작품 중 영어를 써야하는 배역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굳이 설명을 더 할 필요를 못느꼈다.
그렇게 잠시간 말이 없던 그가 한마디 더 보탰다.
"어제 할머니랑, 아니다··· 오늘 고마웠다."
어제? 어쩐지. 오늘 순순히 따라오더라. 어제 내가 할머니랑 이야기 했던걸 들은 모양이다.
"고마우면 손 씻어. 보니까 빚 때문에 똘마니 짓하는것 같더만."
법무사에게 상담했던 내용이 주로 이런거였다. 법정한도 이율을 초과분에 대해서 이미 갚았던 금액을 제외하고나니 금액이 대폭 줄었었다.
과거, 김범이 [폭력의 사슬]이 끝나고 난 직 후, 커리어 관리를 하지 않고 조폭, 양아치 역할을 주구장창 했던것도 빚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됐다.
그리고 빚만 해결되면 똘마니짓을 그만해도 되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법무사 말 대로 빚 정리 되는거 봐서 말해봐야지. 그런데 너는 이런거 어떻게 해서 잘 아냐? 기초생활 수급자, 법무사··· 이런것들."
"왜 알겠냐. 나도 힘들어서 알아봤으니 알지."
혹시나 했던 예상이 역시나였다는 듯한 그의 표정.
그리고 이어지는 김범의 물음과 내 대답을 들은 그의 표정이 더욱 안좋아졌다.
"그것보다, 영어 대본을 보는게 진짜 해외 진출을 하고 싶어서 하는거냐?"
"어."
"하, 씨."
이후 밥을 먹는데 고민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런 눈 빛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많이 알고있다.
어찌해볼 수 없는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
나이 차이는 고작 두살 밖에 나지 않으니까. 그런 나에게 도움을 받는것도 모자라, 연기나 생각의 깊이에서 오는 차이를 그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발품팔아 그를 돕는 이유도 궁극적으로 영화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것이고.
두살 어린 동생, 그것도 자신과 별반 차이가 없는 환경을 극복한 나라는 존재가 신경 쓰이겠지.
아마도 가장 크게 신경쓰이는건 꿈의 크기에서 오는 차이 아니었을까?
연기를 좀 더 잘하기 위해 애쓰는 그와는 달리 잘하는것을 넘어 꿈의 스케일 자체가 다른 것이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듯 했다.
"너는 할 수 있을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솔직한 반응이었다.
'띠링'
그때 나와 김범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직감했다.
이수한 감독이 준비를 끝냈구나 하는 생각말이다.
준비는 끝났다. 나도 김범도.
이제 영화를 찍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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