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소
12.
일단 현주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가게 앞으로 오니 이수한 감독과 김범은 근처 막걸릿집에서 소주를 먹고 있었다.
"하···시발. 어떻게 하면 되나요?"
"..."
술 취한 김범이 가게 앞을 찾아왔을 때는 놀랐다.
아니 의외였다고나 할까.
김범? 니가? 왜?
감독과 배우가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그건 술자리든 촬영장이든, 분식집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 감독과 배우들은 그럴 것이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침범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작품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 없다.
최소한 내가 아는 영화인들은 다 그랬다.
그런데 김범은 그 이력이 특이하지 않은가.
영화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깡패라고 하기에는 또 열심히 한다.
그렇기에 작품과 연기에 대해 조언받고 싶다고 감독을 찾았다기에 의외였다.
그 자리에 내가 함께해도 좋다는 소릴 들었을 때는, '혹시 수정된 대본 때문에 해코지라도 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든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확실히 배우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 또한 그의 특이한 이력을 알기에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던 대로 하라니까."
"아니, 연기를 어떻게 하면 되냐니까 왜 감독님은 맨날 하던 대로, 평소대로 하라 하는 건데요."
"네 역할이 양아치니까 양아치답게 하라는 건데 이걸 뭘 어떻게 설명하냐."
"그러니까 양아치 연기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내가 도착한 지 꽤 됐는데 마치 뫼비우스 띠와 같이 대화가 맴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현주를 데려다줄 동안 둘 다 꽤 마신 것 같은데.
결국 참지 못한 김범이 터졌다. 꽤 큰 소리로 이수한 감독에게 소리쳤다.
"왜 나는 쟤처럼 연기하면 안 되는 건데. 시발! 당신이 감독이면 연기 지도 똑바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맨날 평소대로, 평소대로 내가 진짜 평소에 어떤지 당신이 알아?"
얘 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왕 내가 거론된 김에 내가 말해주기로 했다.
"그야 니가 연기를 못하니까."
"뭐?"
촬영장에서 감독이 하는 연기 지도는 연기력 향상을 위한 수업이 아니다. 감독이 구상한 세계와 배우가 구상한 세계의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지.
"진태, 니가 만들었냐?"
"뭐?"
뜬금없는 질문에 김범의 표정이 멍청하게 바뀐다.
"아니면, 폭력의 사슬 시나리오를 니가 쓰기라도 했어?"
"아니, 시발. 지금 연기 지도 이야기하는데 누가 만들었고 하는 소리가 왜 나와?"
"왜냐면, 중요하니까. 배우는 해석하는 사람이자 표현하는 사람이야. 해석은 작가, 감독이 만든 세계를 해석하는 걸 의미하고, 표현하는 건 이성과 감성과 신체로 보여주는 것이고."
앞에 있던 소주잔을 들에 입에 쏟아 넣었다.
다시 태어난 뒤 처음으로 마시는 술. 여전히 쓰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싫어하지만, 술을 먹으면 남자들은 다 심각해지기 마련이니까. 이거 한 잔 먹는다고 취하진 않겠지만···
"대본을 읽고 해석하는 게 지금 가능해? 니가? 안돼, 넌."
슬쩍 이수한 감독을 봤다. 그도 그저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감독이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또한 입봉작. 아직 배우를 다루는 것에는 서투를 수밖에 없었고,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막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표현할 만한 많은 경험이 많나? 그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너를 표현하라는 거야. 너 생양아치 새끼 맞잖아. 진태라는 캐릭터도 양아치고. 딱 맞네. 진태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려 들지 말고 니가 진태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게 평소대로야."
전에 촬영장에서 미쳐 다 하지 못한 말을 쏟아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는 것은 성미에 맞질 않지만, 이대로 영화가 개봉된다면 내가 김범이 가져야 할 것들을 훔치는 것이 된다.
원 역사에서는 이 영화를 계기로 김범은 충무로의 주목을 받게 된다. 양아치 역할을 너무 양아치처럼 소화해 내기 때문이다. 이 시기쯤 쏟아져 나오는 조폭류 영화에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게 된다.
헌대, 내 연기를 보고 그의 연기가 변했다.
내가 극장에서 봤던 자연스럽던 연기는 온데간데없고 연기와 캐릭터를 의식한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한다.
그리고 나의 개입으로 영화 전체 스토리가 변했다. 원래 김범 원 톱 주연에서 나까지 투 톱 체제로 변했고.
스토리에 손을 대건, 절대로 내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좀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했던 일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한 점 부끄럼이 없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김범의 비중은 줄었고, 그의 연기는 망가졌다.
이대로 영화가 개봉한다면 영화에서 김범의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을까?
두 명의 주인공을 내세웠다 하더라도, 연기력 차이가 극명하기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일종의 심리적 부채감이 있었다.
거기에 망가진 그의 연기로 영화의 완성도까지 떨어졌다. 오죽했으면 감독이 배역을 바꿔서 다시 찍자는 말을 했을까.
"..."
김범이 반박할 말을 찾기 위해 입을 몇 번 움직이다가 결국 눈앞의 술잔만 비운다.
본인이 생각해도 딱히 틀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
내가 말없이 그의 술잔을 채워 줬다.
그에게 했던 말의 내용은 그에게 날카롭게 들렸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최대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나는 김범의 성공을 알고 있다. 아마 내 도움이 없어도 성공할지도 모르지.
비록 깡패, 양아치 전문 배우라는 그다지 명예스럽지 않은 이명 또한 멋지게 극복하는 배우니까.
하지만 그것도 연기를 계속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김범에게 이수한 감독 같은 별종과 우연한 만남이 또 있지 않는다면 높은 확률로 다시는 영화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하, 시발."
김범의 욕을 끝으로, 세 남자가 말이 없어진 지 몇 초.
"자자, 그러지 말고 다 같이 한잔하자."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이수한 감독이 우리에게 술을 따라 준다.
"크, 우리 이 배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연기하는 줄 몰랐네."
민망했는지 술잔을 부딪치며, 이수한 감독이 너스레를 떤다.
후, 이수한 감독. 당신 나한테 빚졌어. 이런 걸 시키고.
다시, 몇 번의 술잔이 돌고, [폭력의 사슬]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 이어졌다. 의외로 대화가 영화 위주로 흘러가도 김범은 소외되지 않았다.
김범도 액션 영화, 홍콩영화 쪽에 조예가 깊었다. 홍콩식 누아르 영화에는 안 본 영화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 그 정도의 베이스가 있으니 배우를 해볼 생각을 했겠지.
술이 몇 순배 더 돌자, 이미 취해서 여기로 온 김범은 취기를 못 이기고 앉은 채로 졸았다.
김범의 머리가 테이블에 닿을락 말락 위태롭게 꾸벅댔다. 그렇게 몇 번의 주제가 바뀔 때까지 김범은 대화에 끼질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김범의 연기를 처음 봤을 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김범을 캐스팅 한 건가요? 삥뜯기다가 캐스팅했다? 그것도 주인공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농담으로 자신의 마지막 영화라 말하는 [폭력의 사슬]. 그만큼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신인, 그것도 연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던가? 흐음."
"스텝들 사이에서 말이 돌더라고요. 형님이 김범한테 주연 자리 삥뜯긴거라고."
웃자고 한 소리였지만, 실제로 김범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오디션도 봤고, 촬영장에서 연기력을 입증했지만, 김범은 오디션도 없었고 그렇다고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지도 못했으니.
이수한 감독은 자신의 앞에 있는 소주잔을 비우며 잠시 그때를 기억해내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크··· 그냥 절박해 보였어. 내가 리어카를 끌고 집에 가고 있는데, 칼이나 몽둥이도 아니고 벽돌을 들고 협박하더라고."
"벽돌이요?"
"어. 공사장에서 쓰는 벽돌. 아무 생각 없이 할머니 병원비가 필요하니 벽돌을 주워 뛰쳐나왔다고 하더라고. 그러다 만난 게 나고."
그가 이미 깨끗해져 버린 안주 접시의 부스러기를 꼼꼼히 주워 입에 넣는다.
"김범? 양아치 같긴 하지.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었어. 묘하게 슬퍼 보이고, 간절해 보였어. 어려 보이는 애가 칼이나 몽둥이도 준비 못하고 왜 벽돌을 들고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뭐랄까··· 소년성? 그런 걸 느꼈다고 해야 하나?"
"소년성이요?"
애새끼가 생각 없고 성격이 급하다는 말을 굉장히 고급스럽게 하네.
까는 거야, 칭찬하는 거야?
"어 소년성. 지금도 봐. 감독한테 연기 지도 해달라고 때 쓰는 거. 방법은 서툴지만 순수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때 그 벽돌 보고."
"그냥 벽돌 보고 쫄아서 그런 거 같은데."
내가 농담을 건네자 그도 피식 웃는다.
"어, 크크. 사실 벽돌은 좀 쫄리드라. 어쨌든, 그때는 김범을 보고 진태라는 캐릭터랑 딱 맞다 생각이 들었어··· 상식적으로 영화 속 진태 같은 상황이면 일단 경찰에 신고하지, 어떤 미친놈이 사시미들고 조폭이랑 싸울 생각을 하냐."
"그 말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 소년성이 영화의 개연성이 되더라고. 저 녀석이라면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뭐 그런 느낌?"
이수한 감독의 말을 듣고 보니 알 것 같았다. 김범의 철없는 모습이 ‘진태’라는 캐릭터와 만나 화학작용을 하는듯한 모습. 내가 알던 이전 [폭력의 사슬]의 '진태' 말이다.
할머니의 병원비가 필요해 벽돌을 들고 강도질하는 김범과, 형의 복수를 위해 조폭과 싸움하는 '진태'.
캐릭터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배우의 개성 때문에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 느낌이랄까.
잠시간의 침묵 후, 이수한 감독의 '가자'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는 일어났다.
"김범 어떻게 하죠?"
여전히 술을 못 깨고 정신을 못 차리는 김범.
"하, 속 썩이네··· 나 좀 있다가 일하러 가야 하는데."
"할 수 없죠. 제가 데려다줄게요. 오늘은 어디 가십니까?"
"오늘은 골프장."
이미 늦은 새벽이다. 거기에 이수한 감독은 몇 시간 뒤 골프장 신축 현장에 노가다 뛰러 가야하고.
그런 그에게 차마 김범까지 맡길 순 없었다.
"미안하다. 부탁 좀 하자."
이수한 감독이 몇 번을 미안하다고 말하고 떠났다. 김범의 품을 뒤져 신분증에 있는 주소를 찾은 다음 택시를 탔다. 술이 깨지 못하고 비몽사몽 하는 그에게 몇 번이나 집을 확인했다.
서울의 외곽. 택시를 내리고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판잣집. 편의점 알 바와 지나가는 경찰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집은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벽돌과 시멘트로 얼기설기 지어진 담벼락과 군데군데 녹이 슨 허름한 철문.
초인종도 없어 대문을 쿵쿵 두드리자 안쪽에서 불이 켜지며 인기척이 들렸다.
"범이가?"
시끄러운 마찰음이 들리며 녹슨 대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늙은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하이고야, 범아 무신 술을 이래 묵었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할머니가 김범의 등을 두들기며 우리를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방 한 칸에 김범을 눕히고 나서려는데 할머니가 나를 잡았다.
"감사합니데이. 범이가 무신 영화 찍는다 카드마는, 같이 일하시는 분인갑네요. 인물이 훤하다 훤해. 드릴껀 없고 잠시 와서 꿀물 한잔하시고 가세요."
"네? 아닙니다. 너무 늦어서요. 할머니도 얼른 쉬셔야죠."
그렇게 나가려 했다.
"고마 그카지말고 꿀물 한잔만 하고 가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할머니가 내 옷깃을 살풋 잡는데, 너무나도 가냘픈 힘이라 오히려 내칠 수가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방 한편에 앉아 잠시간 기다렸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벽지. 해진 이불과 낡은 가구들이 보였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가난은 냄새가 나는 법이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있는 벽지. 습기를 머금어 한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싱크대. 온기가 없는 바닥.
너무나도 익숙한 이 모습이 불편했다. 집의 모습과 술에 취해 누워있는 김범의 모습이 20여 년 전 내 모습 보는 것 같아서.
한 묶음의 약봉지, 그 옆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대본집.
[폭력의 사슬]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몇 장 넘겨보니 붉은 글씨로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감정의 흐름, 촬영의 순서, 감독의 디렉션 까지. 이런걸 왜? 싶은 사소한 내용까지 적혀있었다.
불필요한 내용도 많고, 방향이 엇나간 부분도 있었지만 서투른 솜씨로 애쓴 흔적이 가득했다.
그가 쓴 글을 훑어보는데 익숙한 글이 보였다.
'그냥 연기하려 하지 말고 너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너는 아직 캐릭터에 너를 맞출 준비가 안 돼 있어. 그러니까 캐릭터를 생각하지 말고 가장 너답게 연기하라고. 지금 네 배역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하지 마. 니가 곧 캐릭터야.'
촬영이 중지되기 직전.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이게 네 평소 모습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열정과 노력을 무시하고 평소대로 하라 말했으니. 김범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범이 원했던건 양아치 역할을 하는 배우 김범이였지, 양아치 김범이 아니었을테니.
때마침, 김범의 할머니가 꿀물을 타서 내게 건넸다.
"이거 한 잔 마시고 가요. 고맙습니더. 진짜로 고맙습니더. 우리 범이 좀 잘 봐주이소."
"아닙니다. 저도 김범 씨랑 같이 일하는 배우입니다. 제가 뭘 도울 입장이···"
김범의 할머니가 내 손에 들려있는 대본집을 보더니 말했다.
"우리 범이가 영화 찍는다고 집에만 오면 그 책을 수십 번을 읽었어요. 맨날 비디오 돌려보고."
"아, 네···"
그러자 할머니가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우리 범이가 그런 애가 아니라예. 원래 착하고 똑똑했는데, 우리 아범이 빚을 남기고 죽은 바람에··· 범이가 지금 사채업자 따라댕기면서 돈 갚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내까지 이래 아파뿌가지고···"
김범의 할머니가 하는 이야기는 말없이 들었다.
빚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호적에 없는 어머니. 독촉하는 사채업자를 따라 나가 만난 조폭. 아픈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들. 할머니의 한풀이를 가만히 들었다.
이수한 감독의 절박해 보였다는 말이 그대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대략적인 김범의 상황을 알 수 있었고.
"우리 범이 잘 부탁드릴게요."
술에 취해 누워 있는 김범의 모습에서 나의 20대가 오버랩 되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김범, 잘할 겁니다."
잘하지 못하면 잘하게끔 뜯어고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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