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만 찍죠
11.
"예? 영화 포스터요?"
"네. 제가 요새 찍는 영화가 있는데 아직 포스터가 준비 안 돼서요."
이제 막 영화판에서는 포스터에 힘을 주기 시작하는 시기다. 2000년대 중반부터 포스터 디자인 전문회사가 생겨나고, 여러 고급인력이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니까.
지금까지 국내에 전문 업체에 포스터를 맡길 정도로 포스터에 신경을 쓰는 곳은 대형 제작사가 전부이다.
하물며 독립영화인 [폭력의 사슬]은 이런 쪽의 준비는 되어있지 않은 상태고.
아마 이수한 감독이 영화 촬영 막바지쯤 사진 잘 찍는 동생이라며 또 누군가를 잡아 오지 않을까?
이 영화가 흥행한 것을 알기에 그런 참사를 막고 싶었다.
몇 개의 영화제에 걸리고, 수상도 할 텐데 예전의 그 촌스러운 포스터는 못 봐줄 정도였으니까.
내 말이 조금 뜬금없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좀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글쎄요···"
"시간이 문제이신가요? 제가 뭘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은 아마 우리 쪽에서 맞춰드릴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주연 배우들 이 영화 끝나면 실직자 직행이니까. 강진호 쪽에 시간맞추는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 하고 질렀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미 강진호는 광고와, 상업사진에서 꽤 알아주는 작가였다.
"그게 아니라,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응, 잘해. 10년 후면 한국 영화 절반은 네 손으로 포스터 찍어.
"오늘 찍는 거 보니 잘 찍으시던데요."
"그게 아니라, 영화 포스터는 아무래도 인물 위주의 사진으로 구성되다 보니···"
"아···"
"일단 오늘 촬영 끝나고 이야기해도 될까요?"
"네. 뭐, 그러시죠. 마지막에 찍는 사진은 혹시 제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을까요?"
“네. 뭐 그러세요.”
그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보니 의외다. 원하는 순간 원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배우들을 닦달하던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처음 본 20대 모델이 대뜸 영화 포스터 찍어달라면 주저할 만했다. 그는 아직 영화판에 발을 들이지 않은 상태니.
그리고 페이라던가, 시간은 내가 아니라 이수한 감독과 조율해야 할 문제니까. 내가 강권하긴 애매했다.
흐음··· 강진호의 포스터를 포기하긴 아쉬운데.
강진호가 물러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ON스트릿' 마케팅팀장이 다가왔다.
"이야기가 잘 끝났나 보네요."
아마도 그녀는 강진호와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강진호가 자기 일을 찾아 이동하고 나서 타이밍 좋게 내게 말을 걸었다.
"네. 다행히 촬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날 것 같아서요. 사진작가님도 해주신다고 하더라고요."
촬영은 모델 한 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몇 개의 코디만 소화하면 끝날 참이니.
"모델 관련해서 배우신적 있으셨어요?"
"네? 음··· 입시학원에서 준비해 주는 프로필 사진 찍으면서 조금 배웠고, 여기 오기 전에 조금 연습했어요."
응 안 했어, 어제 밤늦게까지 떡볶이 팔았어.
그녀 입장에서는 사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반인을 모델로 쓰면 생각보다 그림이 살지 않는다.
사진을 찍힌다는 그 특유에 생각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상업 사진을 찍기 위해 커다란 장비와 조명, 거기에 여러 스텝이 보고 있는 경우에는 분위기에 눌리기에 십상이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상한 자세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결과물로 뽑혀 나오는 사진들의 퀄리티는 큰돈 주고 모셔 와야 하는 모델들이 작업한 결과물과 차이가 없었다.
강진호의 촬영 기술이 그만큼 뛰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스튜디오 내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면 먼저 촬영했던 모델이 쌍욕 하며 나갈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 것 치고 되게 자연스러운데."
연습이나 공부 좀 했다고 해서 이 정도 그림이 나온다면, 피와 살을 깎아 가며 연습하는 모델들이 봤을 때는 혈압 오를 일이지.
그렇다고 20년 짬의 배우라서 자연스럽게 찍었다고 할 수는 없고.
게다가 나는 내 능력을 숨길 생각이 없다.
회귀했다고 이야기했다가는 마케팅팀장의 명함 대신 정신과 병원 전화번호를 받을 수도 있기에, 회귀했다는 사실은 숨기겠지만.
능력을 왜 숨김?
빨리 자리 잡아서 현주랑 결혼도 해야 하고, 어머니 좋은데 모셔서 바디프랜즈 같은 것도 놔드리고 해야지. 아? 아직 출시 안 했나? 아무튼.
"어쨌든 고마워요. 모델 한 명이 빠져서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지우 씨 덕분에 촬영 잘 끝날 것 같네요. 여기 명함."
첫 만남에서는 회사 번호를 주고 갔던 그녀가 뜬금없이 명함을 내민다.
"또 봐요. 우리. 오늘은 회사에 일이 있어서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그런 말을 남기고, 그녀는 현장을 둘러보며 다른 스텝 들에게 각종 주의사항을 남기고 떠났다.
아마도 다음 시즌이나 다른 브랜드 모델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떠나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촬영.
어찌 보면 사진작가와 모델 둘 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상황이다.
나는 프로필 사진을 얻기 위해. 강진호 사진작가는 인물 사진의 포트폴리오를 추가하기 위해 빠르게 촬영을 끝마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남는 스튜디오 대여 시간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테니.
그 결과,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프로필 촬영.
"자, 이제 의상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으로. 찍어보죠."
사실 나도 20살의 모습으로 프로필 촬영하는 것이 설레긴 하다.
20대에 나는 대학 생활과 극단생활을 하느라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본격적으로 프로필을 돌리고 영화와 드라마에 나온 것은 30대 초반. 그리고 연기력을 인정받고 커리어 하이를 찍은 게 40대 초반이다.
그나마 30대 초반에 맡았던 배역은 대부분 일부러 살을 찌우고 찍은 조폭이나 형사 역할이 대부분.
그렇기에 20대에 할 수 있는 배역은 다 놓친 셈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신입사원 등등.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더라도 연기력을 인정 받았을 때는 이미 나이가 들어서는 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20살의 내가 사진을 찍어 돌리게 될 프로필.
20대 청춘.
대학생들이 입을만한 옷.
그리고 알맹이는 40대 중반의 남자.
미래에서 왔고 과거를 현재처럼 산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나는 배우다.
한참을 침묵하던 카메라가 셔터음을 내뱉었다.
'찰칵'
짧은 정적을 깨는 셔터 소리.
"아···"
그리고 순간적으로 집중된 시선들이 느껴졌다.
***
강진호가 앵글을 잡고, 뷰파인더로 이지우를 보는 순간, 뭔가가 변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상품에 맞는 대학생 모습을 연기하던 조금 전 그 모델이 아니었다.
그 풋풋하던 신입생은 어디로 갔는지, 어딘지 모를 중후함을 느꼈다.
강진호는 문득, 프로 사진작가의 촬영 보조로 나섰던 과거가 생각났다.
대배우를 뷰파인더에 담았던 촬영장.
사진기 대신 조명을 들고 있었지만, 여실히 느껴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때 처음 사람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존재감을 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마치 대배우와 같은 존재감을 보여주는 모델을 만났다.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눈빛.
강진호가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울리지 않는 셔터 소리.
촬영장 모든 스텝의 시선이 강진호에게로, 다시 이지우에게로 가고 자연스레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잠시 모두의 숨소리도 마저 잦아들 정도로 조용해진 스튜디오.
그리고 울리는 셔터음 한 번.
계획된 촬영이 끝났다.
강진호는 문득 이 모델을 계속 찍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
한방에 오케이라니. 강진호의 예상 밖의 오케이 사인에 어안이 벙벙하다.
저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었는데.
"더 촬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그만 찍죠.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크게 외치고 스태프들에게 정리해도 좋다는 사인을 남긴 그가 내게로 다가왔다.
"사진은 일단 원본 바로 보내드릴게요. 보정 끝나는 대로 수정본도 보내드리고요. 그리고, 포스터 건도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뇨, 아뇨,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서요. 전화번호 주시면 감독님한테 전화하라고 하겠습니다."
"네. 꼭 좀 전화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비용은 최소한으로 맞춰드린다고 전해주시고요."
뭔가 분위기가 바뀐 듯한 강진호였다.
촬영장을 정리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내가 스튜디오를 나서려 하자, 따라 나와 배웅했다.
그렇게 스튜디오를 나서서 '지우분식'으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의 바쁜 시간은 지나고 현주와 이수한 감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고 완성됐어."
분식집에 도착하고 외투를 벗기도 전에 현주가 내게 노트북을 들이밀었다.
현주를 앞세우다니. 비겁하다! 이수한 감독.
반대로 이만큼 신뢰를 받고 있기에 강진호 사진작가에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던 거다.
분식집에서 온종일 같이 붙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영화에 대한 이해나 연출 관련된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실제로 지금 당장 비교해봐도 나와 이수한 감독이 본 영화 편수의 앞자리가 다르다.
대본과 시놉시스를 따지면 뒤에 0을 하나 더 붙여야 할 테고.
게다가 나는 앞으로 20년간 유행하는 영화 기법은 물론이고 앞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받는 영화들의 감상 포인트를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수한 감독은 매번 이야기할 때마다 내 영화적 식견에 감탄하면서도 많은 부분에서 조언을 구했다.
"오, 좋네요. 형님 그럼 우리 촬영은 언제 하나요?"
"휴··· 그건 이제 준비해야지. 스텝들 준비하고."
내가 좋다고 하자 이수한 감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오늘 촬영장에서 사진작가님이 사진을 잘 찍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혹시 우리 포스터 촬영 계획된 거 없죠?"
"없긴 왜 없어. 내가 아는 후배 중에-"
"포스터 우리 제대로 찍죠. 혹시 압니까? 우리 영화 대박 터질지. 이분 진짜 잘 찍어요."
이럴 줄 알았다. 무슨 후배들을 포켓몬처럼 부리냐.
나와라 조명몬, 나와라 음향몬, 나와라 사진몬.
그래봐야 아마추어 수준이다. 촬영과 편집에 관련된 건 영화판에서 오래 구른 이수한 감독이 있기에 어찌어찌 돌아간다지만, 사진 촬영은 별개의 분야였다.
노트북을 들어 USB를 연결하고, 오늘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보정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여타 배우들을 다 씹어먹을 비주얼···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내가 봐도 잘 나오긴 했다. 거기에 더해 사진의 분위기 구도 조명등 기술적인 부분이 완벽했다.
그 사진을 꼼꼼하게 체크하며, 강진호의 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을 불식시켜줬다.
확실히 이 사람은 상품 사진 보다 인물사진이 잘 맞다.
"사진 잘 나왔네. 나도 전문가 쓰면 사진 잘 나오는 건 알지. 돈이 문제지."
"일단 연락처 받아왔으니까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이분도 영화 포스터 작업은 처음이라고 비용은 최소한으로 맞춰준다고 하더라구요."
"일단 연락은 해볼게."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고 가게를 정리하려는데 이수한 감독의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살짝 심각해진 분위기로 통화하더니, 나를 슬쩍 한번 보고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럼, 일단 여기로 와볼래?"
이수한 감독의 통화가 끝나자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누구예요? 누가 와요?"
"어··· 너 오늘 저녁 시간 되냐?
그리고 이수한 감독이 부른 인물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김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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