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프로필 사진
10.
'ON스트릿'과 계약을 한 후, 바로 삼일 뒤 촬영이 잡혔다.
피팅 모델을 하기 위해 도착한 경기도 외곽의 한 스튜디오.
그곳에는 옷의 코디를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와 마케팅팀장, 그리고 몇몇 직원들이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촬영을 준비한 다른 모델이 의상을 갈아입고 촬영을 시작했다.
나도 의상을 갈아입고 촬영을 기다리는데 익숙한 얼굴의 사진작가가 들어왔다.
인연이란 게 참···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거대한 사진기를 든 남자. 커다란 근육질 몸에 얼굴에는 구레나룻부터 이어진 수염이 인중과 턱에 수북하다.
"다시, 표정 좀 풀고. 다리 살짝 앞으로."
"다시. 턱 당기고, 표정 좀··· 하 이게 아닌데."
"다시요."
"다시!!"
처음부터 삐그덕 대는 모델과 사진작가.
첫 시안도 통과하지 못한 채, 찍기를 반복하더니 사진작가가 외쳤다.
"모델님은 지금 대학생이라구요. 오늘 처음 대학교에 와서 수업을 들어요. 새로운 것들도 많고, 얼마나 신기해요. 궁금하고, 흥분되고, 긴장되고. 네? 뭐라고요? 대학 안 나왔다고요? 아니 시발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거칠기는 하지만 굉장히 디테일한 요구사항. 사진사가 저 정도로 요구사항을 구체화해서 말해주면 엄청 친절한 편이다.
다만, 저 험악한 인상과 불친절한 말투. 거기에 모델을 옷을 부각시키는 도구쯤으로 보는듯한 태도까지.
실력이 없는 모델을 만나면 가차 없이 독설을 퍼부어버리는 그의 성격은, 한편으로 그의 능력을 대변한다.
저런 성격을 감수하고 고용할 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방증이니까.
그런데 저러다 또 싸우겠는걸.
나와 같이 발탁된 모델과 말싸움에 이어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사진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옛 생각이 났다.
저 인간 여전하구나. 아니, 원래 저 모양이었구나.
배우들은 필연적으로 사진 촬영을 많이 하게 된다. 광고 촬영은 물론이고 영화 제작에 들어가면 포스터 촬영, 스틸컷 촬영 등.
인기에 비례하는 것이 스케줄이고, 수없이 많은 촬영을 하면서 기억나는 몇몇 스텝들이 있다.
능력이 출중하거나.
성격이 이상하거나.
그는 둘 다에 해당한다.
싸우는 포토그래퍼 강진호.
짧게 자른 머리와 커다란 덩치.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코와 턱에 수북하게 기른 수염은 20년 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수염의 색이 흰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뀐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10년 후, 대한민국에서 개봉하는 영화 포스터의 절반을 찍게 되고 20년 뒤에는 세계가 인정하는 사진작가가 되는 남자.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모델과 싸우는 것도 불사하는 남자.
저 웃기는 수식어가 생긴 비화가 있다. 배우의 '침착한 분노' 사진에 담기 위해 촬영 중 끊임없이 배우를 도발하고, 촬영 후에 주먹다짐했다지.
근데,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시발, 나 안 해!"
포토그래퍼와 몇 번의 마찰 후, 씩씩거리며 나가버리는 모델.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떠받들어줄 텐데 여기서 이런 취급 당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잘생긴 얼굴 말고는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청년은 그렇게 촬영장을 나가 버렸다.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강진호의 요구사항이 버거울 순 있겠지. 그는 모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으니.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는 듯, 포토그래퍼 강진호는 마케팅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 모델분이랑 좀 안 맞는데, 혹시 다른 모델분이 괜찮으시면 그분이 다른 코디까지 다 소화하는 게 어떨까요?"
바로 전에까지 모델과 죽이니 살리니 하며 싸우던 것과 대조적인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마케팅팀장과 대화하는 강진호.
모델에게는 혹독하게 굴다가도, 돈을 지불하는 클라이언트에게 유독 사근히 구는 모습은 한편으로 웃음이 나온다.
이게 이 사람의 강점이기도 했다.
예술 뽕 없이 제작사가 원하는 시안을 정확하게 구현해 낸다. 거기에 더해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완벽하다. 성격이 조금 지랄 맞아도 결과물을 항상 뽑아내니 그를 찾을 수밖에.
10년 동안 상업 사진을 찍고, 원하는 예술사진 찍으러 갈 거라던 강진호의 젊은 모습이 유독 반갑게 느껴진다.
이런 걸 어떻게 아냐고?
그때 싸웠던 배우가 나다.
이제 막, 대학 생활과 연극무대를 끝내고 영화판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그는 이미 영화 포스터 촬영하는 사진작가로서 최정상에 있었을 때였고.
사진 촬영을 어색해하는 나에게 '찍히는 법'을 알려 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 방법이 과격하긴 했지만.
그가 업계를 등지기 직전. 한바탕 싸우고 어찌어찌 촬영을 끝낸 다음. 소주 한 잔 사주면서 미안했다고, 작품이 잘되면 이런 것들도 추억이 되지 않겠냐며 나를 다독이던 그였다.
내가 크게 성공한 뒤에 그는 이미 상업 사진은 때려치우고 본인이 좋아하는 예술사진을 찍기 위해 영화판을 떠났다.
그렇기에 이후에 인연이 없어 참 아쉬웠는데, 이런 식으로 보게 되다니.
마케팅팀장은 곱창 난 촬영장을 보고 한숨을 쉬며 내게 다가왔다.
"상황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혹시 다른 모델의 시안까지 소화 가능할까요? 페이는 방금 나간 그 모델 몫까지 드릴게요."
"네··· 대신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어떤 거요? 말씀하세요."
사진작가 강진호라면 그냥 피팅 모델만 하기에는 아쉽지.
실력은 확실하니까.
"찍는 사진 중 괜찮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써도 될까요? 제가 곧 프로필을 돌려야 되는데 아직 프로필 사진이 없어서요."
"네? 아 참, 영화도 찍으신다 그랬죠? 음··· 상표가 나오지 않는 옷이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한데···."
온라인 편집숍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는 하나, 아직은 창업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회사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요청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 부분은 문제 없도록 하겠습니다."
"음··· 다만, 모델님 프로필 사진을 찍어달라고 저희가 작가님한테 어떻게 요구할 수 없는 부분이라 직접 말씀하시고 강진호 작가님이 오케이 하시면 저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는 말로 이해했다.
내가 강진호 작가를 설득해서 찍는다면 문제로 삼지 않겠다는 거다.
사실 'ON스트릿' 입장에서 장비 대여와 스튜디오까지 다 섭외했는데, 사진 몇 컷 더 찍는 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그런 거로 모델이 의욕이 생겨 결과물만 잘 나오면 그만이겠지.
'ON스트릿'에서 나온 스타일리스트가 세팅해준 옷을 입고 촬영장에 걸어 들어갔다.
딱, 대학 입학한 신입생의 패션.
온라인 마켓의 주된 타겟은 20~30대 젊은 소비자를 겨냥한다.
오늘 촬영하는 의상도 스트릿 브랜드 중 비교적 단정한 복장 위주였고, 신학기를 맞이한 대학생들을 주 타겟으로 한 복장이었다.
"이번 모델님은 대학 나오셨나 몰라?"
지나가는 나에게 들으라는 듯 혼잣말하는 강진호 작가.
"안 나왔는데요."
말하면서도 좀 웃겼다. 앞선 모델의 트롤링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강진호도, 대답하는 나도. 멋쩍은 상황이었으니.
그도 내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던 듯 '피식'웃으며 말했다.
"허헛, 좋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좋네요. 느낌만 잘 살려주세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주변 스텝들도 시작부터 삐걱대는 촬영에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촬영.
"좀 더 신입생 느낌으로, 웃어봐요. 네, 좋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밝게. 좋다. 고개 좀 더 아래로 그렇지···."
사진 모델이라는 게 절대로 쉽지 않다.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그 어려움만은 충분히 알고 있다.
배우로서 사진 촬영은 많이 했으니.
시각과 청각을 모두 사용하여 시간을 두고 관객을 설득하는 배우와는 또 다른 표현법.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기에 배우에 비교하여 모델의 연기가 더 쉽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한테 사진을 찍히는 방법을 알려준 게 그다.
몸을 어떻게 써야 멋진 사진이 나오는가.
그의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캐치하여 표현하는 건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강진호는 현재의 강진호보다 10년쯤 더 발전한 포토그래퍼였기에 지금의 그의 요구사항 이상을 보여 줄 수 있다.
클라이언트라 할 수 있는 'ON스트릿'의 의도, 사진작가의 요구, 상업 사진으로서의 세일링 포인트를 강조하는 법 등.
거기에 더해 내 특기라 할 수 있는 감정연기까지.
그 모든 것을 구체화하여 내 신체, 이성과 감성으로 표현한다.
"오케이, 다음 시안 갈게요."
주변의 우려와 달리 첫 시안부터 몇 컷 찍지 않고 오케이 사인이 났다.
모델이 한 명 비는 바람에 촬영이 지연되고, 혹여나 일정이 늦어질까 걱정하던 'ON스트릿' 관계자들의 표정이 풀린다.
계속되는 오케이 사인.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캬··· 버릴 게 없네. 바로 다음 시안 들어갈게요."
거기에 신이 난 사진작가까지.
원래 두 명의 모델이 옷을 갈아입으며 교대로 촬영하기로 했던 일정. 하지만 혼자서 찍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두 세 컷 만에 OK 사인이 나버리니 사진 찍는 시간보다 옷을 갈아입는 데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될 지경이었다.
"오, 방금 그거 한 번 더, 오케이. 잠시 쉬었다가 다음 시안 갈게요."
강진호가 크게 외치곤 다가와 말을 걸었다.
"원래 모델 일 하시던 분이세요?"
마케팅 담당자에게 보이던 사근사근한 모습이다. 저 덩치, 저 얼굴로 친절한 모습이라니. 부담스럽다.
"네? 아니요. 피팅모델은 처음이에요."
"네? 처음이요?"
강진호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영화 촬영은 하고 있긴 한데 피팅 모델은 처음이에요."
"아, 배우셨구나. 그냥 이쪽 일 쭉 하셔도 될 거 같은데. 아쉽네요. 내가 전문 모델들이랑도 많이 촬영해봤는데 이지우 씨만큼 표현력 좋은 사람은 처음 봐서요."
"아··· 네···"
원래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
"솔직히 잠깐잠깐, 결과물 확인하는데 내가 찍은 게 맞나 싶더라니까요. 평소 찍는 실력의 120%가 발휘되는 느낌?"
그야 당연히 10년쯤 더 경력이 쌓인 당신이 나를 가르쳤으니까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그 오늘 촬영 끝나면 몇 컷만 테스트하죠?"
"네? 무슨 테스트요?"
"요새 계속 상품 사진만 찍다 보니, 감이 좀 떨어진 거 같아서. 인물이랑 감정 중심으로 몇 컷만 찍자고요."
원래 사진에 열정이 많았던 그다웠다.
아무래도 내가 표현하는 것들이 10년쯤 숙성된 강진호가 생각할법한 것들이라 그런지, 그도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인물 중심 사진이면··· 프로필 사진 아니냐?
"아, 그러면 저도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혹시 영화 포스터 찍어보실 생각 없으세요?"
"눼?"
프로필 받고, 포스터.
쫄리면 뒈지시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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