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네 할게요. 피팅 모델
9.
사방에 걸려있는 옷을 찍은 사진, 그리고 공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다 못해 천장까지 닿을 듯하게 쌓아놓은 신발 박스들.
온라인 편집숍 'ON스트릿' 사무실이었다. 여러 개의 사무실 중, 꽤 넓은 회의실 안. ㄷ자 모양 회의실에서 회의가 한창이었다.
"웹 매거진 관련된 사항은 이 정도로 하고, 새로운 피팅모델 건 기획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말하자, 여러 직원 중 한 명이 잽싸게 대답했다.
"네, 대표님. 잠시 23페이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번 S/S 시즌에는 피팅 모델이 아니라, 유명한 얼짱 혹은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는 인물들 위주로 기획 중이며···"
대표라고 불린 남자는 깔끔한 블루계열 정장임에도 불구하고 튀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정장 재킷 위로 삐져나오는 셔츠 소매의 고급스러운 커프스 링크, 정장의 푸른 색조와 잘 어울리는 푸른색 패턴의 넥타이, 그리고 무난하지만 비싸 보이는 시계까지.
그 외 직원들도 모두 옷이 화려했다.
상석의 남자가 서류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얼짱이라···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옷 파는 사진에, 옷이 잘 보이게끔 하는 모델을 써야지, 얼굴 잘생긴 걸로 모델을 뽑는다는 게 맞아?"
"연예인과 일반인 그사이에 있는 얼짱의 팬덤은 생각보다 크고, 인터넷으로 화제가 되는 얼짱들이니만큼 온라인 마켓이 주력인 우리 회사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문 모델 혹은 여타 연예인들과 비교해 단가가 매우 저렴하며···"
한참을 얼짱 모델을 설명하는 직원.
그걸 계속 듣고 있는 대표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후보군 사진이나 좀 봅시다."
그러자 몇 개의 프로필 사진이 그의 책상으로 올라왔다.
대부분, 씨 월드 혹은 커뮤니티에서 긁어온 사진들이었다.
그런 사진들 대부분 '뽀샵'이라 불리는 보정이 많이 들어간 사진들이었고, 대표는 그런 빠르게 사진을 넘겼다.
"얼짱이라 하더니 생각보다 별론데?"
"일단 얼짱 중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거나, 타사이트 모델로 일하고 있는 인원은 제외한 명단이라···"
이미 이런 류의 시도는 다른 업계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이미 타 의류 쇼핑몰들은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얼짱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추세였다.
얼짱들, 그 중이 얼굴 말고는 다른 재능이 없어 메이저한 소속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장기를 활용하여 손쉽게 운영할 수 있는 업종이 의류 쇼핑몰이기도 했고.
계속해서 사진을 넘기는 대표.
그 사진 중, 특이한 사진을 집어 들었다.
분식집을 배경으로 한 사진, 웬 여학생과 함께 찍은 청년이었다. 딱 봐도 전혀 보정되어 있지 않은 사진이었다.
"이 남자도 얼짱이에요? 분식집 얼짱 뭐 그런 건가?'
"아! 이분. 그, 'ㅇㅇ여고 앞 분식남'이라고··· 씨 월드나 다른 커뮤니티를 전혀 안 하더라고요. 사진도 죄다 여고생이 찍은 도촬 사진뿐이고."
내츄럴한 헤어, 보정이 없음에도 깔끔하고 시원한 인상. 그리고 사진으로만 봐도 큰 키와 살짝 말라 보이는 몸.
전형적으로 옷 빨 이 잘 받는 몸이었다.
여타 다른 후보들이 이쁘게 생겼다와 보정 때문에 기괴하다 사이의 느낌이 들었다면 이 분식남의 사진에서는 탑 급 모델의 사진에서나 보일법한 존재감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대표가 말을 이었다.
"이 친구하고, 이 친구. 컨택 넣어봐요."
저 존재감이 우연의 산물일지 실재로도 그러할지 불러보면 알 터였다.
***
"이지우 씨 이거, 이부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지우야 올 때 단무지."
왜 이러는 걸까?
그래, 현주가 분식집에 있는 건 좋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까. 그런데 이수한 감독, 너는 왜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는 건데?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대본을 수정하기로 결정된 후, 촬영은 연기되었다. 기존 1시간 30분짜리 대본을 1시간으로 줄이고 현주가 쓴 [폭력의 사슬 : 석환]을 수정하여 이어 붙이기로 한 것이다.
대본 작업을 위해 현주와 이수한 감독의 만남을 주선해준 뒤, 나는 적당히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하려 했었는데···
거짓말을 할 능력도, 할 생각도 없는 현주는 저 대본 수정을 내 손으로 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이수한 감독에게 말했다.
그런 건 혼자 했다고 해도 되는데···.
그런 사정도 모른 채, 이수한 감독이 전화로 대본에 관해서 물어보는 걸 대답해 준 게 화근이었다.
몇 번 그렇게 통화하다 답답했든지 이수한 감독이 분식집으로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라면을 주문하고 현주를 부르는 이수한 감독.
그런 식으로 몇 번 분식집에서 작업하는 것에 맛들이더니···.
현주가 주문한 떡튀순 옆에 자연스럽게 펼쳐진 노트북과 대본들. 온종일 분식만 먹으면서 대본 작업하는 둘이었다.
좋은 점이라면 저렇게 작업하다가도, 눈치 빠른 두 사람은 손님이 몰릴 때 무급 아르바이트생으로 변한다는 점이다.
최근 부쩍 는 손님을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랄까. 촬영 때마다 분식집을 비워 혼자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를 쉬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영화 촬영이 모두 중지되고, 대본 작업을 다시 하는 것이 내 아이디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이수한 감독이 내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감독이라 하니 반기는 눈치고.
여러 사정이 겹쳐 모두가 만족하는 지우 분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띠리리리리'
포장 주문인가?
가게의 규모가 작기에, 배달은 하지 않지만 포장 주문이 가끔 있는 편이라 놓아둔 전화였다.
"사랑과 정성의 지우 분식입니다. 네 맞습니다. 네? 피팅모델이요?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누구야?"
피팅 모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쪼르르 달려오는 현주.
"어? 그 'ON스트릿' 이라는 사이트 알아?"
"응? 알지. 그 옷 파는 사이트 아냐?"
그러자 옆에서 설거지하던 이수한 감독이 거들었다.
"거기 엄청 유명해. 나도 알아!"
여전히 군밤 모자와 단벌 패딩으로 우리 가게 출근하는 이수한 감독이 'ON스트릿' 을 안다고 하자 신뢰감이 급격하게 오른다.
얼마나 유명하면 저 꼴로 사는 인간이 이 사이트를 알까···
"거기 원래 패션 웹진(웹 매거진)으로 시작한 곳이라서 내가 잘 알지."
"네? 형이 잘 안다고요?"
"이거 왜 이래. 내가 이래 봬도 충무로 패션피플인데."
오늘 단무지가 상했나··· 사랑과 정성의 지우 분식에 상한 음식이란 있을 수 없는데. 이상하네···
며칠 사이 격이 없어진 서로 간의 대화였다.
얼마 전까진 감독과 배우의 관계였다면, 이제는 친한 동네 형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ON스트릿'을 알고 있긴 하다. 정확하게는 미래의 'ON스트릿'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이 당시 나는 패션이나 브랜드에 관심 없었다. 그런 것보다 생활비 버는 것도 빠듯하여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만.
다만 20년 후의 'ON스트릿'은 년 매출 2조 원대의 초대형 의류 기업으로 성장한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 매장도 백화점마다 입점하게 되고. TV 광고까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회사가 된다. 상장직전 투자를 해볼까 생각하기도 했고.
현주와 이수한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은 그저 웹진과 패션 커뮤니티 기능이 합쳐진 규모가 좀 있는 온라인 편집숍 정도 인 듯했다.
어쨌든, 그 사이트에서 의상 모델 제안하기 위해 여기로 오겠단다.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 수 없어 할 수 없이 가게로 전화했다는 말에, 일단 알겠다고 했는데···
내 얼굴은 어떻게 안거지?
이런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ON스트릿' 직원이 와서 해결되었다.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고 가게가 한산해지는 늦은 오후.
가게로 들어 온 미묘하게 화려한 복장의 젊은 여자.
한눈에 'ON스트릿' 직원임을 알아봤다.
깔끔한 정장에 짧게 자른 숏컷. 그리고 여타 액세서리들로 포인트를 준 복장은 화려하진 않지만 센스가 넘쳤다. 20년 이후의 안목을 가진 내가 봐도 세련돼 보였다.
"안녕하세요.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기셨네요. 'ON스트릿' 마케팅팀장 김민정입니다."
명함을 주며 인사하는 모습이 퍽 쾌활하다. 내 기억에는 업계 공룡이지만, 지금은 조금 규모가 큰 온라인 편집숍에 불과하니 팀장이라도 젊을 만하다.
가게 한쪽 빈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했다. 간단한 인사 후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
"혹시 저희 ON스트릿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조금씩 규모를 키우고 있는 온라인 편집숍인데요. 저희가 자체 유통하는 브랜드로 코디하는 룩북 모델로 이지우 씨를 섭외했으면 싶어서요."
편집숍은 기본적으로 여러 업체의 다양한 브랜드를 모아 판매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모델을 따로 고용하기보다 기존 브랜드 사의 제품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와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ON스트릿'은 기존 이미지 대신 편집숍만의 장점인, 여러 브랜드로 코디를 해서 모델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피팅모델을 얼짱들을 섭외하여서 하겠다고 했다. 그 중 내가 포함되었고.
얼짱이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낯부끄러운 단어다.
죽기 전에는 사멸한 단어기도 하고. 전생의 나와는 인연이 없던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는 뭐, 얼짱이나 그런류랑 전혀 무관한데요. 괜찮을까요?"
살짝 눈이 커지며 웃는 김민정 팀장.
"아, 혹시 이거 모르세요?"
"네?"
나는 내가 뭘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이민정 팀장은 가방에서 한 묶음의 서류가 튀어나왔다.
그 서류뭉치는 '얼짱' 관련 인터넷 카페나, 커뮤니티에 올라가 있는 내 사진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분식남이랑 드디어 사진 찍음]
ㄴ 저기 어디임?
ㄴ 하루만 저 국자로 살았으면 좋겠다.
ㄴ 삼시세끼 떡볶이만 먹고 살아도 행복할듯.
ㄴ 아님. 저 얼굴이면 굶어도 행복함.
그 게시물들의 제목은 대부분 '분식남'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었고, 몇몇 사진은 몰래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요새 같이 사진 찍어달라는 여고생들이 늘었다. 걔 중에는 처음 보는 교복도 여럿 섞여 있더니만···.
니들은 계획이 다 있었구나.
아직 초상권이나, 개인정보에 관해 관심이 적은 시절이다. 그러다 보니 무분별하게 내 사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된 거고.
그런데 왜 모자이크는 니들 얼굴에만 했니···
어쨌든,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서는 화제가 된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도우려고 했던 분식집 일이 이런 식으로 나비효과를 일으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저 떡볶이 좀 팔았다고 일이 굴러들어오다니.
그녀가 꺼내놓은 여러개의 서류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획서. 그리고 거기에 적혀 있는 한 남자의 이름.
저 남자가 만약 내가 아는 그 남자라면 이 피팅모델 촬영은 꼭 해야 했다.
나를 위해서도, 영화를 위해서도.
"그럼 촬영 시기는 혹시···?"
위협을 발견한 미어캣처럼 고개를 확 트는 이수한 감독.
촬영이 늦어지는 데다가 출연료도 많이 주지 못하는 이수한 감독은 긴장할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촬영감독을 비롯한 다른 스텝과 배우들 날짜 맞추기도 빠듯하니. 바뀐 대본 3부의 주연배우라 할 수 있는 나까지 바빠지면 진짜 영화가 엎어질 수도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영화 찍을 거라고.
"계약서 서명하시면 금주 중으로 계획 잡아 연락드릴게요. 저희가 좀 급해서요."
이미 겨울이 끝나가는 시즌. 신학기에 맞춰서 S/S시즌을 준비하려면 많이 늦긴 했다.
이번 주는 어차피 대본 수정하기로 한 주였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네 할게요. 피팅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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