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8화 (9/121)

8. 이 대본을 쓴 작가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8.

답도 없는 영화 바보들.

잘 빠진 장면 하나를 위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천지들.

조금 더 나은 장면을 위해 이미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 배우들의 역할까지 바꾸자고 하는 미친놈들.

뭐 사실 나도 이런 영화에 미친놈들이 싫지는 않다.

근데 배역을 바꾸는 건 선 넘었지.

'석환' 역할을 김범에게 맡기는 건 영화가 나락 가는 일이다.

오늘 촬영을 끝나자마자 이수한 감독과 조감독 그리고 촬영감독을 모아 근처 카페로 왔다.

'툭!'

4명의 남자가 모인 테이블. 그 중앙에 한 뭉치의 종이를 던졌다.

"읽어보세요. 다 읽으신 다음 이야기해보죠."

그들 앞에 놓인 건 현주가 쓴 습작의 수정본이었다.

현주가 쓴 습작 [폭력의 사슬 : 석환]에 내가 일일이 코멘트를 달고, 그 코멘트를 바탕으로 다시 현주가 수정한 대본이다.

현주가 작가로서 자립하도록 도우려고, 그리고 내가 캐릭터 분석에 참고할 겸 말 그대로 연습 삼아 써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활용하게 될 줄이야.

"이게 뭔가요?"

대본을 들고 날카롭게 날이 선 표정으로 묻는 이수한 감독.

"음···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제 여자친구가 작가 지망생인데, 제가 대사 연습할 때 대사를 받아 줬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본을 읽었고, 작가 지망생답게 제 배역을 기준으로 글을 썼네요."

"아니 뜬금없이 이렇게 대본을 들이밀면 어쩌자는 겁니까? 인제 와서 새로 영화를 찍자는 겁니까?"

[폭력의 사슬]은 이수한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쓰고 전 재산을 털어 넣어 연출한 작품이다. 그로서는 충분히 불편 할만한 상황이었다.

"감독님, 불쾌하신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새로 찍자거나, 감독님의 연출이나 각본에 개입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혹시나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마음에 안 드시면 그때 다시 배역에 대해서 고민하겠습니다."

살짝 풀릴 듯 말 듯 한 이수한 감독의 표정. 거기에 쐐기를 박아본다.

"제 여자친구가 그러더군요. [폭력의 사슬] 작품이 너무 좋아서 창작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고요. 그러니 팬픽 읽는다 생각하시고 읽어봐 주세요."

"하··· 일단 읽어는 보겠습니다."

됐다. 일단 읽기 시작했으면 절반은 성공한 거다.

왜냐면, 글이 잘 뽑혔거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주는 습득이 빨랐다. 내 코멘트의 의도를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하고 수정했다.

그렇게 나온 대본은 과거 수천 편의 대본을 검토했던 내 눈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다 읽고, 이야기하죠."

현주가 쓴 [폭력의 사슬 : 석환]은 [폭력의 사슬]의 이후의 이야기이다.

복수를 갚고 죽은 '진태' 그리고 '진태' 죽인 계기로 출세한 '석환'. 그리고 [폭력의 사슬 :석환]은 '석환'의 이후의 삶과 죽음이 주된 내용이다.

러닝타임 30분 정도의 짧은 대본이었고, 길지 않은 시간에 이수한 감독과 조감독, 촬영감독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모호한 표정의 세 사람.

읽기는 읽었는데 이걸 어쩌라는 건지 하는 표정이었다.

"예, 각본은 재밌네요. 이 배우가 제 작품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셔서 고맙긴 한데, 우리가 스핀오프나 후속작을 염두 할 만큼 사정이 되질 않아서-"

이수한 감독이 이제 20살 먹은 니가 영화판에 대해 뭘 알겠어! 하는 표정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하지만, 포인트를 잘못 짚었다. 내가 원하는 건 스핀오프나 후속편이 아니다. 여자친구 각본이 어떤지 감상평을 해달라고 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 끝까지 듣지 않고 그의 말을 끊고 내 생각을 전했다.

"아뇨, 지금 문제는 각본이나 연출이 아니라 배우죠."

"...김범이 문제긴 하죠."

"네. 결국 원인은 배우죠. 만약 재촬영한다 쳐도 이제까지 찍은 촬영분 중 얼마나 건지겠습니까. 그렇다고 촬영분 다 버리고, 감독님 또 노가다 판에 필름 값 벌러 갈 겁니까? 이제 곧 개강하면 일 도와주는 대학생 형들 다 빠질 텐데 그전까지 주요 장면은 다 찍어야죠. 맞죠?"

말없이 끄덕이는 조감독과 촬영감독. 그 모습에 탄력받아,

"게다가 지금 촬영 스케줄 보면 촬영 감독님 쉬는 날 몰아 찍다 보니 날짜도 안 나오는데, 거기에 감독님 노가다 하는 날짜까지 빠지면 이거 절대로 끝까지 못 찍습니다."

이런 식으로 엎어지는 독립영화가 한둘이 아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먹을 터였다.

"음··· 이 배우가 말하고 싶은 바가 뭐죠? 이 대본을 보여주는 의도를 잘 모르겠는데."

조감독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세 사람은 최소한 영화판에서 수년은 구른 사람들이다. 각본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갖췄다는 말이다. 대본이 좋으니 인제야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제작사나 투자자가 껴있는 작품이라면 절대 못 했을 말을 꺼냈다.

"폭력의 사슬, 이거 옴니버스 3부작으로 갑시다."

"네??"

"옴니버스?"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촬영감독을 제외한 조감독과 이수한 감독이 큰소리로 반문한다.

"네, 옴니버스요. 각기 다른 주인공이 보여주는 이어지는 이야기. 제목에도 들어가는 '사슬'이라는 이미지와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고민하는듯한 두 명의 감독과 여전히 별 의견이 없어 보이는 촬영감독.

애써 거절할 답을 찾는 듯했다. 그들이 순순히 여기까지 따라와서 저 대본을 읽은 것은, 나에게 배역을 협상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수한 감독도 내게 배역을 맡기기 위해 불쾌한 말들을 참으면서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 것일 테고.

그들이 생각해낸 답이 나와 김범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라면, 그건 틀렸다.

원 역사를 알고 있는 나라서 내릴 수 있는 답이다.

이수한 감독의 안목은 정확하다. 원래라면 김범은 '진태'의 역할에 신인 같지 않은 양아치 연기를 보여주고, 영화도 성공하니까.

덕분에 김범은 앞으로 몇 년간 깡패, 양아치 역할만 줄기차게 하게 되지만, 그건 걔 사정이고.

그건 나라는 변수가 등장하기 전의 이야기다.

감독들을 설득할 필요가 느껴졌다.

"1부는 '진태와 진태의 복수 이야기', 2부는 '진태와 석환의 이야기', 3부는 '석환과 석환의 죽음의 이야기'로 하는 겁니다. 이러면 추가 촬영 없이 편집만으로 2부까지 갈 수 있죠. 지금까지 찍은 촬영본 다 살릴 수도 있고요. 그리고-"

"주제가 살아나네···"

뭔가를 캐치한듯, 홀린 듯이 말하는 이수한 감독.

역시 이수한 감독. 대본의 가치와 내가 말하는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제작사나 투자자를 끼지 않은 이수한 감독 개인의 영화다.

반대로 이수한 감독만 설득하면 된다는 것이다.

영화 전체적인 연출을 구상하고 각본을 쓰는 이수한 감독이지만 단점이 없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추가된 대본은 기존의 주제 의식을 확실히 계승하면서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세심한 캐릭터 조형이 부각된다. 이런 점은 오히려 이수한 감독의 단점을 보완해줬다.

"네. 가해자가 곧 피해자가 되는 모습, 그리고 그 폭력의 연환이라는걸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죠."

"그럼 여태 찍은 구도가 일그러질 텐데···"

조용히 듣고만 있던 촬영감독이 말했다.

"아니죠. 지금 화면 좌측에 가해자, 우측에 피해자를 놓고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3부에서만 바꾸면 됩니다. 이미 찍은 분량에서는 변동사항 없을 거고요."

자주 등장했던 진태와 석환의 투 샷. 가해자인 진태는 항상 왼쪽, 피해자인 석환은 항상 오른쪽에 배치하여 대립 구도를 보여줬다.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실제로는 간단한 이야기였다. 1시간 30분짜리 영화를 삼십 분짜리 두 편으로 나누고 거기에 30분짜리 영화를 덧붙이는 작업이다.

이미 촬영의 50% 이상 진행되었으니 '진태'와 '석환'의 분량을 통째로 들어내고 다시 찍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제안이다.

"확실히 이러면 김범의 분량은 줄어들고, 이지우 씨 분량이 늘어나긴 하겠네요."

애당초 배역을 바꾸자는 말을 제일 처음으로 했던 게 조감독이었다. 저 말에 부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김범의 분량이 줄고, 내 분량이 늘어난 것을 기꺼워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제가 지금 분량 욕심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닙니다. 배역을 바꾸자는 제안을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거죠."

"아,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설마 내가 분량 욕심에 제안했을까 봐··· 분량이 욕심났으면 영화가 어찌 되든 그냥 배역을 바꾸면 될 일이다. 이 제안은 죽어가는 영화의 산소호흡기라도 달아주려는 거다.

내가 아무리 열연을 펼쳐도 극장에 안 걸리면 도로 아미타불이 될 테니.

아까 전 홀린 듯이 '주제가 살아나네···' 이 한마디 하곤, 줄곧 고민하던 이수한 감독이 입을 열었다.

***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지우 배우를 설득하고자 카페에 왔었다. 이수한 감독은 어차피 마지막으로 연출하는 작품이라 생각했으니까. 대신 영화를 찍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영화를 찍고 길거리에 나앉은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이 작품만은 마음껏 찍고 싶었다. 어차피 자기 돈으로 찍는 영화니.

그런데 대뜸 이지우가 내미는 대본.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생각했다. 새로운 영화를 찍을 형편이 아니니. 스핀오프나, 후속작을 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대본을 끝까지 읽으면 배역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는 이지우의 말에 할 수 없이 받아든 대본.

'그래 읽어나 보자.'

대본을 받으며 거절할 말을 생각했고, 읽기 직전 설득할 말을 생각했다.

김범이든, 이지우든 둘 다 신인 배우인 것은 마찬가지다. 시간을 가지고 설득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대본을 읽는 순간,

그런 잡다한 생각은 사라졌다.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 [폭력의 사슬]. 그 작품은 원래 '석환'이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순간 끝이 나는 작품이다.

'석환'이 '진태'를 칼로 찌르는 장면.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복수를 통해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진태'

그런 '진태'를 찌르며 영화 전반에서 피해자였던 '석환'이 가해자가 되는 장면.

오로지 그 마지막 장면, 폭력이 이어지는 그 순간을 구상해, 살을 덧붙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지우에게 받은 대본을 끝까지 읽는 순간. '석환'이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밀려나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리고 그 '석환'의 배역의 얼굴이 배우 이지우의 얼굴로 덧씌워지는 순간.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폭력의 연쇄, 연환. 하나였던 고리가 여러 개로 늘어나며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부각 된다.

읽었던 대본이 그림으로, 영상으로 바뀌어 이수한 감독의 머릿속을 스친다.

'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번 작품이 처음이라 그랬지··· 그래 충무로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갓 20살 먹은 배우 아닌가. 영화판 돌아가는 사정을 몰라서 그랬으려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청년이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내민 대본이라 생각했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의 불쾌감은 어느덧 없어진 상태였다. 어린 배우가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제안한 것이니까. 이수한 감독은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 할 수 있었다.

"예, 각본은 재밌네요. 이 배우가 제 작품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한데, 우리가 스핀오프나 후속작을 염두 할 만큼 사정이 되질 않아서-"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고, 세상은 열정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이수한 감독이었다.

대화를 들으며 배우 교체에 대해 설득할 말을 고르는데,

"폭력의 사슬, 이거 옴니버스 3부작으로 갑시다."

말로 머리를 때리는 기분이다. 왜 생각 못했지, 하는 자책도 순간이었다.

옴니버스 구성으로 각각의 한편 한편이 하나의 고리가 되고 영화 한 편이 사슬이 된다.

재촬영 없이 영화 전체의 구성이 살아나면서 주제 의식이 두드러진다.

"주제가 살아나네···."

연기를 봤을 때 배역과 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생각은 했지만, 각본과 연출을 도맡아 했던 감독 본인을 뛰어넘을 줄은 몰랐다.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 애착이 갔던 '석환'이란 배역. 그만큼 애착이 갔기에 오랜 시간 공들여 배우를 구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의 말대로라면 3부에서는 '석환'의 입체적인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그걸 연기하는 것은 자신보다 영화를 깊게 이해하는 이지우이고.

'후회하지 않을 작품을 하자.'

첫 장면을 찍을 때의 마음.

이수한 감독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폭력의 사슬 : 석환]을 보며 스스로 되물었다.

'이걸 안 찍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한참을 숙고하던 이수한 감독은 힘겹게, 그리고 확실하게 말했다.

"이 대본을 쓴 작가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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