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7.
"와, 연기 잘하네. 어디서 좀 배웠냐?"
"네?"
촬영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주인공 역할을 하던 김범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까 뒤통수 때린 거 사과하려고 그러나? 내 기억으론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게다가 그 애드리브로 나는 주인공에 대한 열등감, 분노 등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거기에 연기하면서 있었던 일 가지고 감정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
촌스럽자나.
그런데···
왜 반말이니?
"와, 이렇게 보니까 또 다르네. 진짜 그냥 고등학생 같네."
"고등학교 졸업했는데."
나도 반말로 응수했다.
"어 알아. 감독이 너 졸업했다더라. 내가 두 살 많으니까 말 그냥 놓을게. 그래도 되지?"
"벌써 말 놓고 있는 거 같은데."
[폭력의 사슬]은 두 명의 스타를 배출한다.
감독 이수한과 배우 김범.
두 사람은 [폭력의 사슬]로 단번에 충무로에 자리 잡는다. 이후 스타 감독, 스타 배우로 계속 호흡을 맞추며 여러 편의 영화를 같이 찍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김범은 자연스럽게 이수한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김범은 그 이력이 특이하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김범의 캐스팅 비화가 있다. 이수한 감독과 사적으로 친해지고 나서 들은 이야기였다.
고구마 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하던 이수한 감독이 주연 캐스팅을 위해 한창 배우를 물색하던 와중이었다. 고구마 팔고 퇴근하는데 자신을 삥뜯으려는 김범을 보고 바로 캐스팅했다고 했다.
상상 속에 있던 양아치 캐릭터와 싱크로100% 였다나.
실제 카메라가 안 돌아가는 지금도 맡은 배역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양아치 같았다는 말이다.
"아니, 너 연기하는 거 보는데 존나 양아치 같아서 한 대 패주고 싶더라고."
역시, 연기와 실제가 구별이 안 되는 인간이다.
어떤 또라이가 연기하는 모습이 진짜 같다고 뒤통수를 때리나.
게다가 지금 누가 누구한테 양아치 같다고 하는 건지.
혹시 보고 있는 스텝이나 다른 배우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혹시, 이거 시비 거는 거야?"
내가 이래 봬도 코리아액션스쿨 수료한 몸이다 이 새끼야.
혹시나 김범이 옛 버릇을 못 고쳤나 싶어 몸소 고쳐주려는데 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연기 좀 가르쳐 주라. 너 지금 모습 보니까, 연기하던 모습이 상상이 안 가네. 아까 그거 연기 맞지? 나처럼 그··· 그쪽 아니지?"
"그쪽?"
"너 종식이 형님 아냐?"
"어??? 모르는데?"
오랜만이네. 이런 오해.
과거에는 족보 어디냐고 묻는 경우도 많았다. 꼭 조폭이나 양아치들은 누구 아냐고 물어보더라.
"근데 너 왜 반말이냐?"
내가 반말하는 게 띠꺼웠는지 말투에 시비를 붙인다.
"니가 반말하길래."
뭐지 이 근본 없는 대화는? 질문의 순서가 뒤죽박죽에, 주제가 수시로 바뀐다.
일단 악의가 없는 거로 보여 정리했다.
"잠시 정리 좀 합시다. 아까 뒤통수 때린 거 사과하러 온 거는 아닌 거 같고, 연기를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아니면 시비를 걸러 온거예요?"
"안 가르쳐 주면 시비를 걸려고 했지."
순서가 바뀐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
거절했으니 시비를 걸까 싶어서 재빨리 인사하고 도망치듯 나왔다.
배우 김범··· 연기 잘하긴 하지. 기본 베이스도 좋고 마스크도 개성 있다.
나중 일이지만 독특한 분위기로 자신만의 연기 스타일을 만든다.
그런데 내가 왜? 촬영 때문에 현주랑 만날 시간도 없는데.
***
"씬 넘버 52, 술집의 두 남자."
'탁'
조감독이 친 클래퍼보드, 스텝들이 못 버티고 한 명씩 빠지고 있다. 그래서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조감독이 할 수 없이 클래퍼보드까지 들게 됐다.
허름한 술집에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술을 마신다.
"좀 잘해라 새끼야. 그것도 제대로 못 해서 피곤하게 만드냐. 병신같은 새끼."
나이트 삐끼로 일하는 두 남자. 늦은 새벽 술 취한 남자의 호주머니를 뒤지다 경찰에 걸려 도망쳐 나왔다.
그 때문에 주인공 역할의 '진태'(김범)은 망을 보던 나를 타박하는 중이고.
너도 양아치고 나도 양아친데 왜 나를 무시하지?
내 어깨를 툭 치고 '진태'(김범)가 일어나며 말한다.
"화장실 갔다 올게 그만 일어나자, 계산해라."
조직폭력배의 말단으로 들어간 '진태'. 이후 무시와 괄시가 더 심해졌다.
내가 부여한 캐릭터의 서사에 감정을 담는다. 열등감, 두려움, 뭉개져 버린 자존심. 사사건건 나를 무시하는 '진태'.
일어선 '진태'의 얼굴이 로우 앵글로 클로즈 업 되고.
사건을 촉발하는 '진태'의 내리까는 눈빛.
나는 그 눈빛 저변에 깔린 경멸을 읽는다.
"눈 깔아라, 눈깔 뽑아 버릴라."
시발새끼 니가 나랑 다른 게 뭔데?
응어리졌던 감정이 폭발한다.
내가 따라 일어나서 소주병을 쥐고 '진태'의 멱살을 잡는다.
'쨍그랑'
내가 거칠게 일어나며 테이블에 올려진 그릇과 술병이 깨지며 파열음이 들렸다.
"너 뭐 좀 되는 거 같냐? 좀 친다고 니가 조폭이라도 된 거 같아? 칼받이 주제에."
"나대지 마라. 죽.는.다!"
극 중, '진태'가 위압감으로 나를 찍어 눌러야 하는 상황.
그런데, '진태' 역의 김범이 국어책 읽기로 여지없이 NG가 나버린다.
"하··· 김범 씨, 그... 좀 더 자연스럽게, 예전에 나 처음 만났을 때 그 느낌으로. 응? 알죠? 다시 한번 더 가볼게요. 하이-액션!"
***
김범은 모든 게 당황스러웠다.
'이거 연기 맞나?'
'그때 뒤통수 때린 것 때문에 화난 건가?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되나? 안 그러면 왜 저리 죽일 듯이 보는 건데?'
'대본에는 일어나 멱살을 잡는 거라고만 돼 있는데 저 소주병은 뭐지? 진짜 칠 것 같은데?'
평소대로 하라는 감독의 말이 그저 공허한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 김범에게는 '평소'라는 감각 자체가 낯설었다.
연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평소'처럼 연기한단 말인가?
현실에서도 이렇게 감정을 부딪치는 일은 없다. 김범도 조직의 용역 일을 몇 번이나 참여했었고 사람 패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깡패라지만 사람을 죽일 일이 있겠는가.
앞에 있는 이 녀석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몇 마디, 혹은 행동 그리고 눈빛으로 감정을 100% 전달된다.
그저 연기일 뿐일진대, 느껴져 오는 박력, 증오, 살의, 열등감 등의 감정이 실체화 되어 살갗에 닿는 기분이다.
촬영 중에는 진심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봐서 뜨끔하다가도 '컷'소리만 나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틈틈이 대본을 다시 봤지만, 대본 그 어디에서도 감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라는 코멘트는 없었다.
그저 '위압적인 말투로' 한마디 부연 되어 있었다.
감독의 연기지도는 언제나 '평소처럼'만 반복할 뿐이었고.
'이게 연기라는 건가?'
***
이수한 감독의 수차례 디렉션에도 불구하고 김범 때문에 여러 차례 NG가 났다.
"죄송합니다."
"하, 10분만 쉬었다 할게요."
한숨을 쉬며 말하곤, 바로 담배부터 무는 이수한 감독이었다. 속이 탈만 하지.
영화 끝까지 찍을 필름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김범의 NG는 이수한 감독의 속을 뒤집기 충분했다.
'힘들게 찍었다, 저렴하게, 알뜰하게 찍었다.'
이 영화는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필름은 이수한 감독이 다른 작품 조감독 할 때 꼬불쳐 놨던 걸 쓰는 중이고, 소품은 주로 감독이 쓰던 물건들··· 혹은 감독이 고물상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것이다. 장소 섭외는 담배 한 보루에 경비 아저씨와 쇼부쳐서 찍는다. 식당 주인에게 무릎 꿇고 새벽에 한 컷만 찍게 해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총제작비 7,500만 원.
이 금액으로 독립영화를 흥행시킨 이수한 감독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준비한 배우가 이런 식이라면 흥행이 힘들지 않을까?
나도 슬슬 걱정되는 중이었다.
예전에 봤던 [폭력의 사슬]의 김범의 연기가 아니었으니.
그 특유의 양아치틱한 연기가 전혀 프레임에 담기지 않았다. 이전까지의 연기는 마치 자기 모습 그대로를 투영하는듯한 연기였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기는 누가 봐도 '나 지금 연기하고 있소' 하는 꼴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올 리 있나.
할 수 없이 멀찌감치 담배 피며 대본을 보고 있는 김범에게 다가갔다.
"잘 안돼?"
흠칫, 놀라는 김범을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이 상황이 내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뭐, 왜? 바쁘다며, 꺼져."
여기저기서 안 좋은 소리 많이 들었는지 영 태도가 불량하다. 원래 불량한 건가?
"연기 가르쳐 달라며. 니가 영화 조져 놓는 꼴 못 보겠다."
실제로 김범의 연기는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된 건 어느 정도 내 책임도 있었다.
'조연의 연기에 주연이 잡아 먹혔다.'
주변 스태프들이 이런 이야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었으니, 연기에 신경 안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유난히 나와 투 샷이 많이 잡히는 배역이기도 하고.
나도 숱하게 겪었다. 나 같은 경우는 잡아 먹히는 주연이 아니라, 잡아먹는 조연 쪽이었지만.
"하···. 시바, 어떻게 하면 되는데."
생각보다 긍정적인 대답에 다소 안심했다. 이전과 달리 한계를 느끼고 받아드릴 준비는 된 것 같아서.
나도 이 영화가 흔들리면 내 계획이 늦어질 참이니 가벼운 조언 정도는 괜찮겠지.
"너 연기력으로 캐스팅됐냐?"
"어? 아니··· 삥 뜯다 캐스팅됐는데."
"그냥 연기하려 하지 말고 너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너는 아직 캐릭터에 너를 맞출 준비가 안 돼 있어. 그러니까 캐릭터를 생각하지 말고 가장 너답게 연기하라고. 지금 니 배역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하지 마. 니가 곧 캐릭터야."
말 몇 마디로 연기가 좋아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대본 해석 능력과 경험이 떨어지는 김범이 극적으로 좋아지기를 바라는 건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김범은 최소한 자기 모습을 연기가 아닌, 있는 그대로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
어떤 배역을 내면화를 통해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배우가 있고, 그 배역 자체가 되려 하는 메소드 연기 법이 있다.
나는 상황과 캐릭터, 감독의 성향까지 모두 고려해 그 두 가지를 취사선택하거나, 동시에 연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김범에게 그런걸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내 연기를 보고 의식해서 '연기'를 하려는 게 문제다. 그의 일상적인 모습을 끌어내기만 하면 된다. 다행스럽게도 '진태'라는 배역은 김범에게 딱 맞는 양아치 배역이고.
알듯 모를 듯 모호한 표정의 김범.
"너한테 연기력을 기대하는 게 아니야. 양아치 같은 너의 모습이 어떻게 하면 카메라에 잘 나올지 생각-"
"이지우 씨!"
조감독이 나를 큰 소리로 부르는 통에 내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저기 이지우 배우님, 잠시만 이리로 와봐요."
이수한 감독과 촬영감독 그리고 조감독이 뭔가를 한참을 이야기 중에 나를 불렀다.
"평소대로 '연기'한다 생각하지 말고, 평소대로 '행동'해."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이 정도의 말만 남겨두고 나를 부르는 스텝 들 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김범을 의식하는 세 명의 감독. 그리고 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뭔가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에서 나도 관련됐다는 감이 왔었고.
그들이 한참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원래 쉬기로 했던 10분을 한참 넘긴 상태다.
그들의 앞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먼저 조감독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말했다.
"그··· 우리끼리 의논 해봤는데 아무래도 이지우 씨 의견이 중요한 것 같아서요. 음··· 혹시 배역 바꿔 볼 생각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김범 쪽을 쳐다본다.
"네?"
"아니, 진태 역할이랑 지금 석환 역할이랑 바꿔서 연기할 생각 있냐고요."
역시··· 김범의 연기가 불안해 질 때부터 혹시나 이렇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걱정이 되던 일이 터졌다.
"아뇨. 그렇게는 안 되죠. 저는 지금 이 배역이 충분히 좋습니다."
이건 좋지 않다.
난감해하는 조감독과 이수한 감독.
무명 배우가 주연 자리를 거절할지는 상상도 못 했던 눈치다.
조감독이 뭐라고 부연하려 하기에 앞서 먼저 내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촬영 시작한 지 꽤 지났는데 이제 와서 배역을 바꾼다면 김범 씨한테도 못 할 짓 하는 거고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사실 내가 싫다. ‘진태’ 라는 배역은 주연인 데 반해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의 낙차가 적고, 평면적인 캐릭터다.
그에 반해 '석환'은 분량은 상대적으로 적어도 표현할만한 감정이 풍부한 캐릭터다. 연기하는 난이도도 훨씬 높고 입체적이다.
그렇기에 대중들의 관심은 김범에게 쏠렸지만, 오히려 영화 관계자나 평론가들의 관심은 '석환'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의미에 쏠렸다.
단순히 카메라에 많이 비춘다고, 혹은 주연이라고 좋은 배역이라 할 수 없다. 배우의 포텐셜을 터트릴 수 있는 캐릭터가 좋은 캐릭터다.
즉, 주·조연을 떠나 얼마나 존재감 있느냐.
그런 의미에서 몇 마디의 대사와 표정으로 감정의 변화를 세심하게 컨트롤 해서 보여줄 수 있는 '석환' 이라는 캐릭터는 내 존재감을 보여주기에 딱 맞는 배역이다.
거기에 이 작품은 내년까지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 걸려 상을 받는 영화다. 그만큼 한국 영화계에 화제성을 가지는 작품이고.
차기작에서 내가 원하는 배역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에게 내 연기력을 어필 하는데 이보다 좋은 캐릭터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석환'의 배역에 만족한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어려운 캐릭터를 김범 시킨다고?
진짜 영화 조질 일 있나.
"우리 필름도 모자라지 않나요?"
조감독과 이수한 감독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얘네들 진짜 아무 생각이 없네···.
"그··· 필름이야, 내가 며칠 노가다 뛰고 대출 좀 더 땡기면 해결되니까. 배우님은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연기만 잘해주시면···"
한참 뜸 들인 후에, 애써 답변하는 이수한 감독.
촬영할 때의 무게감은 어디로 갔는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그때 언뜻 현주가 준 대본이 생각났다. 그리고 연이어 이어지는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감독님.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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