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래도 연기하라
2.
얼떨떨하다.
정말 회귀라도 한 걸까? 아니면 긴 꿈을 꾼 걸까?
회귀라기에는 너무 영화 같은 일이고, 꿈이라기엔 기억과 감정이 너무 선명하다.
며칠 전까지 40대 중반이었는데 눈 떠보니 20살, 2000년대 중반이라니···
수능이 끝나고 이제 막 20살이 된 상황. 다행스럽게도 고민할 시간은 많았다.
이제 막 늦은 사춘기가 온 것처럼 고민했다. 으레 이 또래가 할만한 자아 성찰이다. 한데 속 알맹이는 40대 중후반의 자살한 배우가 들어있으니 그 무게가 '성찰'에 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정신과에 가봐야 하나 고민했었다. 아니면 무당이나 이쪽 계열이 더 맞으려나?
우습게도 정신과든 무당이든 찾아가지 못한 것은 돈 때문이었다.
"사장님 갑자기 이렇게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다음 달부터 그렇게 드릴게요."
"네네, 들어가세요."
얇은 석고 벽면에 한기가 스미듯 어머니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분식집인가··· 아니면 이 좁아터진 집의 월세를 올려 달라는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지금은 나는, 아니 우리 집은 먹고 죽으래도 돈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덧 통화가 끝났는지, 어머니가 방과 부엌을 구분하는 문을 열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
몇 번을 반복했던 대화였다.
"너 진짜 대학 안 갈 거야?"
"네. 어머니."
저 평범함을 위장한 얼굴이 도리어 마음 아프다. 어머니는 듣지 않길 바랐겠지만, 다 들리는걸.
전화 통화를 엿듣지 않아도 지금의 집안 형편은 충분히 알고 있다.
"왜? 돈 때문이야?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대학도 다 붙었는데 아깝게 왜 안가?"
"그런 거 아니에요. 대학 안 가도 충분해요."
난 이미 연영과 Big 5중 2곳에 합격한 상황이었다.
과거에는 이 좁아터지고 허름한 집이 너무 싫어서 대학을 가고, 기숙사를 신청했었다.
학자금과 동시에 생활비까지 최대한으로 대출을 당겨쓰고, 어머니의 등골을 착취해가며 다녔던 대학이다. 그런데 지금 나보고 그 짓을 또 하라고?
비용도 비용이지만, 교수로 가는 거면 몰라도 학생으로 간다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연기 관련해서 강의도 몇 번 했었다. 강의뿐이랴. 유명 대학의 교수직도 여러 번 권유받았지만 고사했다.
그런 나한테 애들이랑 연기를 배우라니, 맙소사.
배울 것도 없는 대학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다. 전생에서 사생활은 가루가 되도록 까여도 연기만큼은 욕 먹은 적이 없는 몸이니.
"대학 안 가고 뭐할 건데?"
"음··· 연기?"
"어휴, 철이 든 건지, 들다 말은 건 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출근을 준비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한숨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지난 1년간 입시 전문 연기학원에 쓴 돈이 얼만데. 없는 살림을 쥐어짜고, 나는 주말 알바까지 해서 비용을 충당했다.
그런데 합격해 놓고 대학을 안 간다는 건 어머니 입장에서는 황당할 노릇이겠지.
20대의 나라면 대학을 가서 연기를 배우는 게 맞겠지.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겉모습은 20대의 나이지만 속 알맹이는 20년 차 배우가 아닌가. 지금 내 나이보다 내 연기경력이 많다. 이런 상황에 대학에서 연기를 배울 필요가 없다. 구차한 인맥에 기댈 필요도 없고.
대학 안 간다고 연기 못하나? 그건 아니거든.
거기에, 20년간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고스란히 가진 채다.
커리어는 사라졌어도 클래스는 남는다.
지금 와서 커리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전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있는 커리어를 쌓을 수 있을 텐데.
자신감 과잉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역시 아니다.
배우는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오는 희로애락. 그 감정의 자산을 표현하고 발산하는 것이 배우라는 직업이다.
오랜 무명 시절을 버티면서 느꼈던 삶의 단편들이 모두 내 연기의 자산이 되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최정상까지 올라가면서 몸에 새겨진 모든 감정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재료가 된다.
하물며 지금은 삶의 마지막까지 겪었던 몸이다. 그 감정의 깊이와 재료의 풍성함은 그 어떤 배우가 와도 비교 불가능이다.
그렇기에 다시, '배우'다.
***
'지우 분식' 내 이름을 딴 분식집이다. 어렸을 때는 저게 부끄러워 가게로 밥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말씀도 듣지 않고 가지 않았다.
작고 보잘것없는 저 분식집이 부끄러웠다. 사춘기 때문이었을까. 저 초라한 '지우 분식'이라는 간판이 마치 내 이름표 같아 불편했다.
'너 분식집 아들이라며?' 친구들이 이런 소리를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학교에서 집까지 빙 둘러 가야 함에도 피해 갔었다.
지우 없는 지우 분식이랄까.
아마 스스로가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나약함을 저 분식집에 투영했던 것 같다.
진짜 가난한 사람한테 '거지새끼야' 하면 욕이 되고, 부유한 사람에게 '거지새끼야' 하면 농담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진짜 약점을 후벼 파듯이 말하게 되면 그건 욕이 된다.
예전의 나라면 '니가 분식집 아들내미라며?' 이런 질문을 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고, 이때 겪었던 희로애락이 내 감정적 자산이 됨을 알고 있다.
'지우 분식'
이제는 이름값을 하고 있었다.
예전 어머니가 고생하는 걸 뻔히 알고도 쪽팔린다는 이유로 한 번도 도와드리지 않은 분식집 일. 지금은 만류하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돕는 중이다.
'탁탁탁탁'
이제 칼질이 꽤 익숙하다.
"네, 순대 1인분이랑 떡볶이 2인분이요. 달걀 두 개 서비스 넣었어요."
접객도 많이 익숙해졌다.
이전 생에도, 지금도 아들을 남부럽게 키우고 싶어 했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일을 도우라 하신 적이 없었다.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어디 쉽던가. 나도 해봐서 안다. 아이를 키우는 것, 그리고 제대로 키우는 것이 얼마나 희생이 필요한 일인지 말이다.
전생에 아무리 돈을 써도 마음처럼 되지 않던 게 자식 농사다. 그걸 여자의 몸으로 수십 년을 하셨으니 다소 억척스러운 듯한 그녀의 성격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성정을 대변하듯, 어머니는 장사 도울 생각하지 말고 꿈을 크게 키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했었다.
그때는 이게 왜 부끄러웠던 건지.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하나 있는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분식집으로 출근하는 것을 영 못마땅해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분식집 일을 돕고 난 뒤부터는 꽤 매출이 오르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여고생들이다. 예전과 다르게 근처 여고생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늘고 있었다. 그 소문의 원인이 '맛'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이긴 하지만.
"오빠 얼굴에 김 묻었어요, 잘생김!"
가끔 이런 실 없는 농담도 받아주고···.
"오빠 폰 번호 뭐에요?"
내가 전생에 너만 한 애...는 아니고 하여튼 있었다···
"아이고, 김 사장 아들, 훤칠하니 잘생겼네."
"수능 끝나고 도우러 왔나 보네. 효자다, 효자야. 김 사장은 좋겠네."
주변 상인들의 흘리듯 던지는 덕담이 그녀가 마음에 영향을 끼친 탓일까. 아니면 매출이 올려서일까. 함께 출근한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잔소리가 그쳤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영업을 마치고, 간판 불을 끄고 청소를 시작했다.
"놔둬요. 어머니. 나 혼자 마감 칠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됐어, 같이하면 금방 끝나는데 뭐 하러 그러니. 그래도 아들이 같이 도와주니 좋네."
슬쩍 웃는 어머니의 모습이 좋다. 전생에서는 못 봤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웃는 어머니의 모습도.
"아들, 대학 못 간 거 아쉽지 않아?"
서로 간에 말없이 정리하던 와 중, 무심히 등진 채 설거지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아쉽긴, 어머니랑 같이 있어서 너무 좋은데?"
달그락거리던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미안해, 아들. 흡··· 흑···"
나지막이 울리는 그녀의 울음이 들렸다.
다시 살아도 가난은 무섭구나.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아들은 어머니에게 또 다른 슬픔이구나. 참은 숨을 내뱉듯, 참지 못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조용히 뒤로 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무나 작은 어깨였다.
한참을 흐느끼는 어머니를 진정시켰다. 오늘은 아들 부탁 들어준다 생각하고 먼저 퇴근하시라 했다. 마감은 나 혼자 충분하다.
주문한 식자재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마감까지. 조그마한 분식집에 무슨 일이 이리도 많은지. 성인 남자가 한참을 해도 일이 끝나질 않는다.
이대로 어머니와 분식집을 함께 하는 것도 좋겠지만, 욕심이 난다.
돈에 대한 욕심? 아니다.
전생에 쓰지도 못할 돈을 벌기만 하다 죽었다.
그런 내가 돈에 욕심이 날 리가 있나.
돈이야 연기만 열심히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다.
내가 욕심나는 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다. 더 급한 건 몇 년 뒤 어머니의 병이 발병하지 않도록 안정된 삶을 마련한 것이다.
돈은 그 수단이고.
그리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
전생에도 받았고, 거절했던 그 전화다.
-지우야, 잘 지내지? 요즘 뭐해?
"네, 선생님. 저야 뭐··· 놀고 있습니다."
내 연기학원 원장 선생님이었다. 영화판에서 수년간 조연급으로 활동하다 은퇴한 배우. 오히려 요즘이 배우 할 때보다 더 잘 나간단다.
-그래, 수능도 끝났겠다. 한창 놀 때지. 근데 지우야 뭐 좀 물어보자. 너 이번에 S대학이랑 C대학 합격했다고 그랬지?
"네, 선생님."
-오케이, 학원 홍보물이랑 플래카드에 니 이름 올라갈 거야 괜찮지?
"네 물론이죠."
매년 연말이면 학원 앞에 붙는' ○○○ 어디 대학교 합격'과 같은 플래카드 설치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합격한 대학 두 곳 모두 연극영화과 중 가장 경쟁률이 높은 곳이었다. 학원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홍보 수단은 역시 합격자 배출 아니겠는가.
그리고 분명 기억이 맞다면 '그 영화'의 출연을 권유할 것이다. 이전 생에서는 대학 입학으로 하지 못했었으나,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성공했던 영화 말이다.
그런 영화를 소개해 주는데 이름 좀 쓰는 게 뭐 대수랴.
-잘 됐다. 내가 아는 감독이 이번에 작품하나 들어가는데 거기 배역이 하나 빵꾸가 났거든, 어차피 주인공 친구 배역이고 분량이 막 있지는 않은데 해볼래?
"혹시··· 감독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이수한 감독이라고, 이번에 입봉작이라 모를 거야.
모르긴 뭘 몰라. 앞으로 그 양반 미래를 당사자보다 잘 아는데.
역시나, 그 감독이 연출하는 그 배역이다.
"네! 물론이죠.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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