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러나 도통 의식이 잠들지 않았다.
손발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얕은 악몽을 꾸고 현실로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회귀 시점까지는 세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유안은 새벽의 고요함과 어둑함에 잠겨 다른 방에 있는 누나들을 생각했다.
'만약에 죽으면··· 누나들도 충격받을 텐데.'
윤슬이 워낙 어려서 그것만 생각하느라 가족들을 배려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일 것이다.
이유안을 자식처럼 키운 누나들이라면 더욱.
'여기에 있으면 안 되겠어. 아니, 애초에 본가에 오는 게 아니었어.'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유안은 누나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인기척을 줄인 채 집 밖으로 나갔다.
회귀 시점을 멀쩡히 흘려보낼 때까지는 혼자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근데 어디로 가지.'
중앙 카페 본점과 본가를 제외하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래도 이유안은 두려움에 잠긴 몸을 정처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인적 드문 곳이라면 다 괜찮았다.
걷다 보니 나온 곳은 역설적이게도 강남 던전 근처의 게이트 제한 구역이었다.
이제 지하로 철도가 다 이어져서 쉽게 다닐 수 있지만, 유안은 사람들이 마다하는 지상을 선택했다.
24시간 운영 중인 중앙 카페 강남점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즈음, 유안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
겨우 한 시간이다.
그것만 버티면 되는데··· 꽉 쥔 주먹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유안은 일부러 강남점을 빙 돌아서 뒤쪽으로 다가갔다.
새벽에도 왁자지껄 활기찬 강남점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지금은 거기에 낄 수 없었다.
'게이트.'
유안의 눈앞에 일렁이는 [늑대 숲의 미로] 던전 게이트가 있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생명선은 회복됐어. 그러니까, 저 던전에 들어가도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이유안은 자신이 안전하다는, 멀쩡히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계속 이렇게 불안할 바에는 차라리 던전 안에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일종의 충격요법인 셈이었다.
회귀 시점까지 이십 분 정도가 남았을 때, 이유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게이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 들어갔다 나오자. 이 던전은 입장 후 삼십 분 동안 게이트가 닫히지 않고 열려 있으니까.'
불길한 색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던전 게이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유안!"
화난 듯한 셀라의 음성이 유안의 고막을 때렸다.
[외전]악몽 없는 새벽
이유안은 뒤를 돌아봤다가 셀라의 너른 품에 그대로 감금당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 셀라."
"위험하잖아."
"아··· 그냥 산책?"
어린애가 들어도 티 날 만큼 대충 둘러대자 셀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의 그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유안, 던전 안 들어가겠다며. 나한테도 들어가지 말라며."
"···응, 그치."
"멀리서 보고 깜짝 놀랐어."
셀라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유안의 뒷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진정시켰다.
쉽게 놓아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시간···.'
그리고 이유안은 이 와중에도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셀라에게 붙잡힌 이상 던전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제 십 분 남았으니··· 그 안에 혼자 있을 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셀라, 나 잠시···."
"안 돼. 잠깐만 이러고 있어, 유안."
"······."
걱정을 많이 했는지 화난 티가 역력한 셀라는 낯설었다.
S급 헌터가 으르렁거리자 E급의 몸은 본능적으로 굳었다.
"그럼 오 분 만이야."
"아니,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지."
"···누가 와?"
"유안을 걱정하는 친구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이유안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셀라를 올려다봤다.
셀라는 그런 유안의 눈을 가리고 팔에 힘을 꽉 줬다.
정말 안 놔줄 심산인가 보다.
"아니, 셀라. 나 진짜 잠깐이면 되거든? 어디 멀리 안 갈게. 던전도 안 들어갈 거야."
유안은 회귀 전에 누나들에게 밥 먹듯 했던 말을 다시 하게 된 이 상황이 문득 웃겼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어쭈, 유안. 사고 쳐 놓고 웃음으로 넘기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안 되겠어. 키스 지옥에 빠져라."
"아, 야···! 진짜 하지 마."
언제나 그랬듯 셀라는 이유안의 말을 죽도록 안 들었다.
유안은 이마와 뺨 위로 쏟아지는 쪽쪽거림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포기하고 기다리면 끝나 있겠지 싶어서였다.
'이건 그냥 내가 윤슬이한테 하는 뽀뽀랑 비슷한 거니까··· 참자, 참아.'
이유안이 속으로 도를 닦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
윤슬을 떠올리자 정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유안이 셀라의 입술을 밀어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셀라에게 안긴 채로도 저 멀리에서 달려오는 어린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윤슬, 여기는 어떻게···."
아이가 깨어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윤슬의 뒤쪽으로 더 많은 사람이 보이기까지 했다.
중앙 카페 식구뿐 아니라 단골 손님들까지 함께 찾아온 것이다.
"다들··· 무슨 일이십니까?"
"아저씨이."
"응, 윤슬."
유안은 제게 매달리는 아이를 번쩍··· 들지는 못하고 그냥 안아줬다.
또래 중에서도 가장 큰 키를 자랑하는 이윤슬은 이제 쉽게 안을 만큼 가볍지가 않았다.
이유안은 제 가슴팍까지 오는 이윤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 무서운 꿈 꿨어?"
"아저씨가 집 나갔잖아!"
"아··· 정원 씨가 말 안 해줬어?"
"해줬는데··· 흐잉, 하루면 돌아올 줄 알았단 말이야."
이렇게 연락도 없이 오래 나와 있던 게 처음이기는 했다.
주변에 윤슬을 아끼는 어른들이 많으니 하루이틀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구나."
"으응, 이제 이렇게 오래 나가 있지 마아···.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도 윤슬이 보고 싶었어."
애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아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이다.
이제 회귀 시점까지는 오 분도 남지 않았다.
윤슬과 포옹하고 있는 유안의 곁으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프리 허그 타임인가요, 사장님?"
서정원이 살짝 짓궂게 물으며 윤슬 다음으로 유안을 끌어안았다.
"우아! 재밌겠다!"
아이도 박수를 짝짝 치며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다른 어른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겠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유안은 본점 직원들을 시작으로 십수 번이나 제 품을 내어줘야 했다.
"으, 음··· 저는 그냥··· 남들 따라하는 거니까요······."
"소라 씨 이런 거 부끄러워 하시나 봅니다."
"아, 아니거든요···!"
홍소라가 콧바람을 뿜으며 유안을 잠깐 껴안았다가 후다닥 빠져나왔다.
사람마다 포옹의 반응이 천차만별인 것이 재밌어서 이유안의 얼굴도 서서히 풀어졌다.
이제 시간 확인은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지막 순서로 기청해를 안아준 유안은 청해의 등을 대충 두드렸다.
평소에도 윤슬이 시켜서 종종 안아주곤 했으니 포옹쯤이야 익숙했다.
"상태창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좋아."
유안의 회귀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청해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유안은 기청해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비각성자한테 그런 조언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마침 회귀 시점이 지나갔다.
[당신의 생명선이 죽음의 흔적을 넘어 더 견고해집니다!]
안심하라는 듯 새로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유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죽지 않았고, 앞으로 더 잘 살아갈 것이다.
*
강남점이 근처에 있으니 다같이 이른 아침을 먹고 가기로 했다.
유안은 며칠간 악몽에 시달리고 떨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인지 사소한 일상의 걱정마저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아저씨, 이거랑··· 이거랑, 이것두 먹어! 다 먹어!"
"알았어."
이윤슬은 유안을 못 본 시간 동안 인벤토리에 쌓아뒀던 음식을 전부 꺼냈다.
한 사람이 다 먹기에 넘치는 양이라 다른 이들도 도와주기로 했다.
그리고 셀라는 강남점의 음식 여러 종류를 내어 왔다.
"기분 전환도 되고 좋네요."
서정원은 강남점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부터 웃고 있었다.
유안은 정원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음에 감사했다.
'게이트랑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거, 분명히 봤을 텐데.'
그리고 강남점과 본점의 매니저가 잠시 둘만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셀라가 유안을 잘 감시하라며 이야기를 전했을 텐데, 정원은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아마 서정원의 방식대로 부드럽게 지켜볼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이제 괜찮은 거 맞죠···?"
"예?"
질문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인벤토리에서 포춘 쿠키를 꺼내던 홍소라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유안에게 물었다.
"사, 사장님 요즘··· 기분 별로였잖아요······."
"···제가요."
"네, 네에···."
"······이번주에 버터 핫 초콜릿을 한 잔도 안 드셨습니다."
방재이가 홍소라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 음료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는 유안도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라 깜짝 놀랐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고요."
서정원이 이유안의 눈 아래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다고?'
숨긴다고 열심히 숨겼는데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다.
이유안은 민망함을 느끼며 방재이가 건네는 버터 핫 초콜릿을 마셨다.
이렇게 맛있는 걸 일주일이나 안 마시다니, 정신이 제대로 빠져 있기는 했나 보다.
"나한테는 아픈 곳 있거나 고민 있으면 다 말하라고 했으면서 아저씨는 왜 비밀로 해?"
윤슬이 결정타를 날렸다.
아이는 무척이나 억울한 표정이었다.
자신도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해서 속상한 것 같기도 했다.
"음, 윤슬이는 어린이고 나는 어른이잖아. 그러니까···."
"어른은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나 어른 안 할래."
"······."
그건 아니긴 한데.
유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는 신호였는데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안은 드디어 깨달았다.
자신이 집을 나가 연락도 제대로 받지 않아서··· 다들 심각한 수준으로 삐쳤다는 것을.
"에, 에휴··· 이, 이거나 열어보세요······."
홍소라가 선심 쓴다는 듯 포춘 쿠키 하나를 내밀었다.
일단 윤슬의 시선도 쿠키로 옮겨가서 더 강도 높은 추궁을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었다.
뽀각.
이유안이 손에 힘을 주어 포춘 쿠키를 부수자 안에서 작은 종이가 나왔다.
[앞으로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주변에 바로 알리고 위로 받겠습니다. 이 말을 지키지 않을 시 전재산을 홍소라 씨에게···]
깨알 같은 글씨를 읽던 유안이 종이를 다시 돌돌 말았다.
"어, 어··· 안 돼요···! 사장님, 얼른, 얼른 읽으세요···!"
"이런 운세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쨌든··· 까, 깠으면 읽어야죠···!"
"다른 걸로 하겠습니다."
"···뭐어, 그러세요······."
생각보다 미적지근하게 허락해주는 게 이상했다.
유안이 근처의 다른 포춘 쿠키를 열었다.
[앞으로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앞서 깐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내용의 운세 쪽지가 나왔다.
다른 포춘 쿠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홍소라가 꾸민 거대한 음모였다.
"흐, 흐흐··· 다 열어보셨으니까··· 이제 진짜 읽으세요······."
"빨리이, 아저씨!"
"얼른요, 사장님."
"······."
모두 한통속이었다.
유안은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쪽지 내용을 읽었다.
"앞으로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주변에 바로 알리고 위로 받겠습니다. 이 말을 지키지 않을 시 전재산을 홍소라 씨에게··· 증여하겠습니다."
이유안의 선서에 다들 기뻐했다.
특히 홍소라는 기립박수까지 치려다가 유안이 째려보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
다함께 본점에 도착하자 유안은 더 이상 졸음을 숨길 수 없었다.
새벽 내내 밖을 돌아다니느라 쌓인 피로가 안정적인 공간을 만나며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난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윤슬은 거의 졸면서 걸었다.
"윤슬이 데리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사장님."
"···정원 씨는 안 피곤하십니까?"
"네. 사장님만 안전하게 잘 계시면 제가 피곤할 일은 없어요."
"······앞으로 진짜 안 그러겠습니다."
쪽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서정원이었을 테니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미안해진 유안은 정원을 또 한 번 안아주었다.
"아저씨이··· 나두우······."
사랑 많은 어린이가 팔을 벌렸다.
유안은 남은 힘을 긁어모아 이윤슬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증축 공사가 많이 진행된 본점은 어린이의 강력한 주장으로 다락방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점처럼 돔 형식으로 뚜껑이 열리는 다락방은 윤슬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이유안은 품 안에서 이미 잠든 어린이를 다락방에 눕혔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잘 수 있게 바닥 전체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어서 어디에 누워도 푹신했다.
"지금 자면 점심에나 일어나겠어."
베이비 시터가 아이의 수면 시간을 예측했다.
다락방까지 올라온 것은 기청해뿐만이 아니었다.
피곤하지 않다고 말하던 서정원도, 서로의 몸에 기댄 채 흐물흐물하게 걷던 홍소라와 방재이도, 공방을 후다닥 정리한 김주현도.
중앙 카페 식구들은 물론이고 유안이 걱정되어 찾아온 단골 손님들까지, 그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다락방으로 쭐래쭐래 따라왔다.
"하암···."
너나할 것 없이 피곤한 새벽을 보냈기 때문에 전염성 짙은 하품이 퍼졌다.
어차피 건물 최상층 전체를 다락방으로 쓰고 있어서 잠자리는 넉넉했다.
"매, 매니저님··· 알람··· 맞춰주세요······."
"알았어요, 소라 씨."
홍소라가 오픈 시간 전까지만 자겠다며 매트리스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렇게 하나 둘 기절하듯 잠들고 나서 유안은 맨 마지막으로 윤슬의 옆자리에 누웠다.
아이가 꼬물꼬물 움직여 품 안으로 들어온다.
"윤슬, 좋은 꿈 꿔."
"우웅···."
이유안은 윤슬의 귓가에 속삭이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근처에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여럿이라 그런지, 오늘은 악몽 같은 건 꾸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