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눈 많이 오면 같이 눈사람 만들자."
"응! 우리집보다 크게 만들래!"
"그래."
주변에 있는 눈이란 눈은 죄다 끌어 모아야겠다.
유안은 윤슬의 손을 잡고 약속하며 본점으로 걸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고 나와 있던 서정원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오셨네요, 사장님. 윤슬이도 안녕. 재밌게 놀고 왔어?"
"응!"
"정원 씨··· 언제 이렇게 꾸민 겁니까?"
"저는 별거 안 했어요."
그럼 누가 도와준 건지 물어보려는 때에 류민희가 불쑥 튀어나왔다.
방금까지 페인트칠을 하다 왔는지 셔츠와 바지 곳곳이 얼룩덜룩했다.
"이 사장님!"
"민희 씨, 오랜만입니다."
"저도 오랜만이에요, 유안 씨."
"아, 뭐야··· 류지우 씨도 오셨습니까?"
쌍둥이 아니랄까 봐 류지우도 손에 페인트 롤러를 들고 있었다.
중앙 카페를 성탄절 느낌으로 리모델링한 주범은 두 사람인 듯했다.
"왜 민희만 반겨주고 저한테는 시큰둥하게 구세요?"
"민희 씨는 중앙 카페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고, 류지우 씨는 그냥 헌터 협회장이니까?"
"허···, 카페 승인 내준 거 누구였는지 잊었나 봐요."
류지우가 실실 웃으며 농담을 걸어왔다.
유안도 오랜만에 만난 지우가 반가워 살갑게 장난으로 되받아쳤다.
"다시 무르지도 못하면서."
"원칙적으로는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할 겁니까?"
"······."
의미 없는 말싸움의 승자는 이유안이었다.
지우는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유안에게 롤러를 내밀었다.
"유안 씨도 일하세요."
"어디 칠하면 되는데요?"
"뒷마당 내벽 조금 비어 있어요. 저쪽."
안 그래도 페인트 칠하는 게 재미있어 보이기는 했다.
류지우의 뒤를 따라가니 아직 흰색으로 남은 벽이 보였다.
'음··· 그림을 그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김주현의 설명에 의하면 던전 부산물로 만든 페인트라서 며칠 후에 자연스럽게 증발한단다.
그러니 비교적 자유롭게 벽을 망쳐도 되는 것이다.
"나도! 나두 할래애!"
"그럼 윤슬, 붓 들고 와서 그림 그릴까?"
"응! 아저씨랑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랑 다아~ 그려야지!"
아이가 신이 나서 달려갔다.
잠시 후, 뒷마당 내벽에 어린이 화가의 입체파 그림 한 점이 완성되었다.
제목은 <크리스마스 빨리 와!>였다.
빨강, 초록 두 가지 색으로 다채로운 인물을 표현한 것이 대단했다.
"이윤슬 어린이, 실력이 많이 늘었어."
"그치이. 이제 내가 미술 선생님보다 잘 그려요!"
"맞아."
기청해의 칭찬에 윤슬이 방방거리며 좋아했다.
붓을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청해의 흰 셔츠에 줄을 죽죽 그어버리기도 했다.
유안은 윤슬이 그린 그림의 빈 공간에 짙은 초록색을 채워넣었다.
중앙 카페를 직접 지었던 강해민은 알록달록해진 모습을 보고 미약한 두통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완전히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 아··· 저도 들어가서 케이크랑 쿠키 만들래요···! 크, 크리스마스으~ 크리스마스으으······."
홍소라가 음 이탈을 내며 흥얼거렸다.
방재이도 조용히 커피 머신 쪽으로 향했다.
"완전 재밌을 것 같아요, 싸장님! 파티 열면 저도 꼭 초대해주셔야 해요!"
정태영이 단골 손님 대표로 사장 이유안에게 부탁했다.
"당연하죠. 휴일에 시간 빼놓고 계세요."
"아싸!"
이렇게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는 처음이라 유안 역시 아이처럼 설렜다.
*
"음···."
"으, 음······."
"흐음, 솜을 더 넣어야겠어요."
이유안, 홍소라, 김주현이 산타를 둘러싸고 말했다.
빨간 산타복을 입은 기청해가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씬한 산타도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 맞아요···! 이렇게 대충 분장하면··· 애들한테 다 들킨다고요···!"
"자, 솜 여기 더 있어요."
김주현이 인벤토리에서 던전산 목화솜을 쑥쑥 끄집어내 청해에게 내밀었다.
세 사람은 기청해의 바지가 빵빵해지도록 솜을 넣은 후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도 달아야 해? 그건 지저분해 보여서 정말 싫은데···."
"어리광 부리지 마십시오. 다 컸으면서."
유안은 기청해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반질반질한 얼굴에 흰색 수염을 꼼꼼히 붙여버렸다.
얼굴의 반 이상이 가려지자 그나마 누구인지 못 알아볼 것 같았다.
그래도 상대는 S급을 훌쩍 뛰어넘는 어린이다.
이 정도로 안심하기는 이르다.
"아이템 써 보시죠."
"응······."
반쯤 포기한 기청해가 인상이 흐릿해지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등급 높은 윤슬에게는 외형 변경 아이템이 아예 안 통하기 때문에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유안은 흐릿해진 기청해의 얼굴에 만족하며 수염을 죽죽 당겨보았다.
"튼튼하게 잘 붙었네요. 이제 출발합시다."
"밖에 애들 많이 왔어?"
"윤슬이 친구들은 다 왔죠."
"너무 떨려."
"씁, 참으십시오."
유안은 자꾸만 약한 소리를 하는 청해의 등짝을 내리쳐 밖으로 내보냈다.
비각성자 기청해는 울상을 짓고 붉은색 선물 보따리를 어깨에 멨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어린이들이 모인 뒷마당을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옷에 솜을 잔뜩 넣은 상태라서 바르게 걷는 것이 불가능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어린이들, 누가누가 안 울고 착하게 지냈나 볼까?"
그래도 유안이 시킨 대사는 착실히 읊었다.
뒷마당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청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년이면 11살이 되는 아이들이니 대부분은 산타의 정체가 부모님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확실히 부모님이 아니었다.
동심을 자극당한 어린이들이 너도나도 외치기 시작했다.
"선물 주세요!"
"저 한 번도 안 울었어요!"
"엄마랑 아빠 말 잘 들었어요!"
아이들이 와락 달려드는 바람에 기청해가 주춤거리다 흔들 의자에 앉았다.
선물 보따리에 눈이 돌아간 어린이들이 의자와 청해의 몸을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허허, 어린이들. 착하게 줄 서야 선물 줄 거예요."
"···네에."
유안은 뒷마당 구석에서 꼬맹이들이 쪼르륵 줄 서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역시 기청해한테 산타 시키길 잘했다.
'근데 윤슬이는 뭐 하고 있지?'
기청해를 분장시키러 올라가기 전까지는 골목대장처럼 친구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윤슬이 저기 있어요, 사장님."
그때 서정원이 다가와 뒷마당 구석을 가리켰다.
윤슬은 건물과 담벼락 사이에서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이유안은 화들짝 놀라서 다가갔다.
"윤슬, 여기서 뭐 해. 산타가 선물 나눠주고 있는데."
"······나는 선물 못 받아."
"···응? 왜 못 받아."
유안은 일단 구겨진 아이를 살살 꺼내서 품에 안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차갑게 식은 몸이 안쓰러웠다.
"···예쁜 말만 쓰고, 안 울어야 선물 받는다고 했어. 나는 나쁜 어린이니까··· 산타한테 선물 못 받아."
"윤슬이 착한 어린이 맞는데. 내가 계속 봐서 알잖아."
아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유안은 훌쩍이는 윤슬을 토닥이며 뒷마당을 천천히 돌았다.
아저씨가 달래주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울음을 터트린 이윤슬은 자신이 착한 어린이가 아닌 이유를 말했다.
"흐윽, 나는··· 난, 아저씨 처음 봤을 때 나쁜 말도 많이 했구······ 혼자 있을 때 맨날 울었단 말이야아······. 흑, 혼자 자는 거 무서워서······."
윤슬은 중앙 카페에 오기 전을 떠올린 것이었다.
아이의 슬픈 목소리 때문에 억장이 무너진 유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말을, 어떤 말을 해야 이 상처 많은 어린이를 달랠 수 있을까.
"윤슬, 나는 네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윤슬이 주변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많은 사람이 윤슬이 덕분에 행복하고, 웃을 일도 많아졌거든. 그러니까 윤슬이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어린이야."
"······진짜?"
"응, 정말이야. 산타한테도 물어볼까?"
"우응···."
윤슬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유안의 어깨에 비비며 대답했다.
이유안은 덩달아 눈물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고 아이를 기청해 산타에게 데려갔다.
"허허허, 기다리던 어린이가 왔구만."
그새 산타 역할에 익숙해진 청해가 이윤슬을 받아 안았다.
윤슬은 다행히 미술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디 보자··· 우리 착한 어린이한테는 어떤 선물을 줘야 좋을까?"
어차피 선물은 정해져 있지만, 긴장감 조성을 위해 청해가 빨간 보따리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한참 그러다가 결정했다는 듯 커다란 선물 상자 하나를 꺼낸다.
"크흥, 이거 진짜로오··· 나 주는 거예요?"
"그럼. 윤슬이가 올해 착한 일 많이 해서 주는 거야. 지금 열어볼래?"
"···네에."
윤슬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기까지 다섯 번의 회의와 스무 번의 간이 회의, 열두 번의 가벼운 말다툼이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선물로 정해진 것은 바로···.
"우아아···! 이거 요정 나라 왕이 입는 옷이에요?"
"응, 맞아."
온갖 버프와 특수 효과가 붙은 어린이 의상 세트였다.
이윤슬이 가장 최근에 가지게 된 꿈을 이뤄주기 위해 휴멜 대표 디자이너의 손까지 빌렸다.
"진짜 좋아아! 산타 최고!"
윤슬은 언제 울었냐는 듯 밝은 얼굴이 되어서 산타의 눈가에 쪽쪽 뽀뽀했다.
그리고 제 방으로 쑥 들어가서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에 다른 어린이들이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좋아해서 다행이다.'
산타가 주는 선물은 옷 한 벌이지만, 내일 아침 트리 아래에 차곡차곡 쌓일 선물은 중앙 카페 1층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양이었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돌보는 마음으로 너도나도 이윤슬의 선물을 준비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저씨! 나 완전 멋있지!"
"응, 진짜 멋지다."
"내가 꼭 요정 나라 규칙 바꿔서 아저씨도 놀러 갈 수 있게 할게!"
"그럴래? 기다리고 있을게."
"응!"
아이는 환하게 웃고 친구들 사이로 돌아갔다.
어린이들의 웃음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
윤슬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는 중앙 카페 식구들과 단골들끼리 트리 꾸미는 시간을 가졌다.
수창 길드장이 설산 던전에서 직접 뽑아온 전나무는 무척 커서 실내에 둘 수도 없었다.
"언제 다 꾸미나 싶었는데, 그래도 여럿이서 하니까 금방이네요."
새로 길드장 차건오가 트리에 갖가지 오너먼트를 매달며 말했다.
이유안도 양손 가득 장식용 볼, 황금색 가랜드 따위를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큰 트리는 저도 처음 꾸며봅니다."
"배, 백화점에나 가야 있을 걸요······."
홍소라가 트리 곳곳에 반짝이 가루를 톡톡 뿌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나는 큰 게 좋아! 친구들한테 사진 보여줬더니 우리집 트리가 제일 크댔어!"
이윤슬이 뺨에 반짝이를 묻히고 히죽거렸다.
어찌 되었든 어린이가 웃는다면 성공한 이벤트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마지막 의식 하나만 남겨둔 상태였다.
아직 비어 있는 꼭대기에 별을 달 차례다.
"윤슬, 안 다치게 조심해야 해."
"응! 조심할게!"
자기 얼굴보다 큰 노란색 별을 품에 안은 이윤슬이 등에 달린 날개를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유안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난 어린이가 아기 천사처럼 훨훨 날아서 초록 트리 꼭대기에 별을 예쁘게 달았다.
"짠! 이제 완성이야!"
신나게 외친 윤슬이 다시 이유안의 품으로 포르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