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37)

유안은 나중에라도 기청해에게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일단.

"윤슬이 디바이스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응, 이거?"

"왜 기청해 씨가 갖고 있죠?"

"새벽에 산타가 찾아오면 사진을 찍으라는 임무를 받았어."

기청해가 이유안의 손에 아이의 디바이스를 넘기며 말했다.

"산타 분장은 기청해 씨가 할 거니까 셀카라도 찍으셔야겠습니다."

"···내가 산타야?"

"예."

본점에 산타 옷도 배달왔는데 청해에게는 아직 보여주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분장할 건 아니고, 진짜 크리스마스에 말입니다."

"응, 그럼 지금은?"

"해민이가 윤슬이 친구들을 다 초대하라고 하네요. 그래서 기청해 씨도 할 일이 있습니다."

유안은 윤슬의 디바이스로 친구들에게 모바일 초대장을 보내고 말했다.

"애들 마중 좀 나가십시오."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다.

윤슬이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으니 내일 늦게 일어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어린이가 깨기 전에 친구들을 전부 이곳으로 데려오는 게 목표였다.

"명단 드릴 테니까 다녀오십시죠."

그래도 다들 서울에 살아서 지역이 한 군데로 좁혀지는 게 다행이었다.

"산타 체험을 하는 기분이야."

"크리스마스 전에 미리 연습해두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요즘 산타는 루돌프 썰매 대신 비행기를 탄다.

유안은 기청해의 등을 떠밀어 1층으로 빠르게 내려보냈다.

그렇게 중앙 카페 산타는 한밤중에 요정 성에서 쫓겨났다.

*

유안은 해민을 도와 무언가 하려고 했으나 단박에 거절당했다.

"혼자 일하는 게 더 편해. 올라가서 자라."

"응··· 그럼 부탁 좀 할게."

줄 수 있는 게 건강 주스밖에 없었다.

철야를 예상한 강해민은 이유안이 내민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최상층은 벌써 반 이상이 꾸며져 있었다.

아직 크리스마스는 아니니 이빨 성 컨셉을 지킬 생각인지 빨강과 초록 대신 하양과 분홍이 주를 이루었다.

강해민은 건물 내부 창고에서 아기자기한 가구와 소품을 이것저것 꺼내더니 적재적소에 척척 배치했다.

해민의 손에서 하나의 키즈 카페가 완성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툭툭 두는 것 같은데··· 조화로워.'

일반인은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유안은 자신이 끼어봤자 방해만 될 거라 확신하고 근처 테이블에 강해민을 위한 간식거리를 잔뜩 준비해두었다.

윤슬은 혼자 자면 중간에 깨어서 칭얼대곤 했으니 누군가 같이 있어줘야 했다.

전망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끌어안자 습관적으로 품속에 깊이 파고들며 입술을 오물거린다.

"우웅."

이유안은 치사량의 귀여움을 느끼며 윤슬의 등을 토닥거렸다.

밤하늘에 수놓인 별무리를 시선으로 좇다 보니 유안도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일찍 일어나야지···.'

잠들이 직전에 그렇게 다짐했으나 유안이 눈을 뜬 시각은 늦은 아침이었다.

얇은 눈꺼풀을 찌르고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깨었다.

유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의 돔을 닫았다.

빛이 차단된 전망대는 다시 한밤처럼 캄캄해졌다.

자신은 몰라도 어린이는 지금 깨면 안 된다.

'얼마나 됐으려나.'

유안은 아래층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해민이 층마다 손을 쓴 것인지 어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요정 성다워졌다.

'어···?'

직원용 객실도 확인하던 유안의 눈에 색다른 것이 들어왔다.

미니 냉장고.

주문한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그게 벌써 객실마다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안쪽에 연분홍색 종이로 포장된 선물이 보였다.

선물 옆에는 음식 부스러기가 조금 남은 접시도 놓여 있었다.

'이빨 요정···.'

요정이 음식을 먹고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두고 간 것이다.

동심이 듬뿍 담긴 컨셉에 유안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이유안은 새벽 내내 열심히 일해준 사람을 만나기 위해 1층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이 사장님!"

그런데 키즈 카페로 변신한 1층 홀에서 유안을 반겨준 것은 강해민이 아니라 김주현이었다.

"주현 씨···? 왜 여기 계십니까?"

"왜요, 저는 요정이 아니라서 오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연히 오셔도 됩니다."

"흐흐, 농담이구요. 냉장고 주문하셨잖아요! 그거 전해줄 겸 해서 왔죠~."

김주현은 역시 대량 주문에 강했다.

밤새 미니 냉장고 수십 개를 만들고도 멀쩡한 장인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만들어주셔서··· 놀랐습니다.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주현 씨 덕분에 윤슬이가 더 좋아하겠어요.

"별말씀을요."

"아, 그런데 해민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아, 해민 씨는 저쪽에요!"

주현이 주방 쪽을 가리켰다.

바닥에 폭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이 발끝에 닿았다.

"오, 오오··· 해민 씨 소질 있네요···?"

"···애초에 쉬운 일만 시키셨잖아요."

"아니, 아닌데요···!"

주방에서는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홀에서 주현을 만났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새벽의 손님은 한둘이 아닌 것 같았다.

주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볼에 밀가루를 잔뜩 묻힌 강해민과 홍소라가 보였다.

"해민아, 안 피곤해?"

"어어···, 새벽에 잠깐 잤다. 그리고 다들 많이 도와줘서 괜찮아."

"사, 사장님···!"

"소라 씨는 언제 오셨습니까?"

"새벽에 비조 길드장님이 비행기로 데려다 줬어요···! 아···, 매니저님이랑 재이 씨는 가게 봐야 해서 못 왔구요······."

서정원과 방재이는 본점에 남은 모양이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민의 얼굴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줬다.

강해민은 지금 쿠키 반죽 위로 모양을 찍고 있어서 손이 없었다.

"그럼 지금 기청해 씨는 어디 있죠?"

"구, 굴뚝 타러 갔어요···!"

윤슬의 친구들을 데리러 갔나 보다.

어린이들은 새벽에 데려오기 힘들 테니 아침 시간을 노린 모양이었다.

"소라 씨랑 주현 씨 말고, 또 같이 오신 분들···."

"싸장님!"

"···태영 씨."

주방 문이 벌컥 열리며 충치균이 나타났다.

까만 망토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뾰족한 뿔 머리띠까지 착용한 정태영이었다.

"가, 간단한 연극을 준비했는데··· 저희 중에는 태영 씨 등급이 제일 높아서 악당 역할을 맡았거든요···! 차, 참고로 사장님은 이빨 요정 4예요······."

이유안이 잠든 사이 정말 많은 일이 진행되었다.

유안은 태영에게서 대본 한 부를 받아들고 놀랐다.

"이건 또 언제···."

"비조 길드장님이 주셨어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길게는 못 썼는데 그래도 어린이용 연극으로는 적당할 거래요! 이것 보세요, 제 삼지창 완전 멋지죠!"

"···대본 좀 보고 오겠습니다. 제 대사 안 많죠?"

"네! 싸장님은 그냥 우는 연기 몇 번?"

그게 제일 힘든 연기 아닌가.

유안은 충치균 정태영과 합을 맞춰보기 위해 주방 밖으로 나왔다.

어린이들을 위한 이벤트의 스케일이 생각보다 커지고 있었다.

*

"우아!"

"와아아···!"

"우와아!"

따뜻한 털옷을 차려입고 온 아이들이 아기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하룻밤 사이에 급조된 것치고는 퀄리티가 높아서 다행이었다.

윤슬은 무리의 가장 앞에서 친구들을 이끌고 도슨트 역할을 했다.

"여기는 이빨 요정들이 노는 곳이야!"

1층 한구석에 볼 풀장을 비롯해 미끄럼틀, 나무 그네 등을 설치하길 잘했다.

아이들은 한참 그곳에서 뛰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싸장님, 준비 되셨죠?"

"······예."

"대사는 다 외우셨고요?"

"예, 뭐."

유안은 백스테이지에서 충치균과 함께 막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빨 요정 4라고 해서 비중 없는 엑스트라일 줄 알았는데 이빨 요정 1, 2, 3을 합친 것보다 분량이 많았다.

우는 연기가 대부분이지 않았다면 대사 외우느라 혼쭐이 났을 것이다.

이유안이 마지막으로 대본을 확인하는 사이 1층의 모든 불이 꺼졌다.

무대가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싸장님, 파이팅!"

정태영은 제일 분량 많은 역을 맡았으면서도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런 태영 덕분에 무대 위에 올라가서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이 연극답게 주요 스토리는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는데, 유안은 충치균에게 납치당하는 역할을 맡아 극 내내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윤슬도 활약했다.

"크아아!"

정태영이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객석으로 뛰어내리자, 이윤슬이 멋지게 일어나서 B급 헌터를 눌러버린 것이다.

윤슬이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짠 것이긴 했지만, 아이의 힘이 생각보다 세서 태영이 바닥을 세 번 내리치며 항복 선언을 했다.

"윤슬이 멋있다!"

"엄청 세!"

"윤슬이가 충치균을 물리쳤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태영을 밟으려고 하기에 급하게 조명을 켰다.

홀이 환해지자 몰입이 깨진 아이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이빨 요정 성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답니다."

기청해가 마이크에 대고 나레이션을 읊어 잽싸게 극을 끝내버렸다.

어린이들은 갑작스러운 엔딩에도 만족하며 영웅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특히 이윤슬은 꼬마 영웅들 사이에서도 대장이었다.

'생각보다 더 좋아하네.'

이유안은 윤슬이 웃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여, 여긴 이대로 키즈 카페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홍소라가 쓰러진 정태영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안은 소라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꾸며둔 것도 아깝긴 하네요, 싸장님! 제주도는 가족 단위로 놀러 오는 경우도 많으니까 키즈 카페 하면 대박날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현 씨한테 부탁해서 장난감 좀 더 가져다두면 되겠죠. 그보다 태영 씨, 몸은 괜찮습니까?"

"으으, 네······. 윤슬이 힘이 더 세졌네요."

"어디 다친 곳은 없죠?"

"좀 삐걱거리기는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맛있는 거 먹으면 싹 나을 것 같은데."

이유안은 태영의 눈가로 흘러내린 충치균 머리띠를 정리해주며 웃었다.

어쨌든 밥 먹을 시간이기는 했다.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어린이들은 위층에 올라가 요정들이 준 선물을 수거하는 일을 맡았다.

아이들 머릿수대로 선물이 마련된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선물 하나가 남았다.

"거기에 아저씨 이름 달려 있어!"

"···응, 그러네."

뭐지.

유안은 제 이름표가 대롱대롱 매달린 선물 포장지를 열어보았다.

아이들 것과 다르게 가벼워서 수상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안쪽에는 종이 한 장만 달랑 들어있었다.

[중앙 카페 크리스마스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본점으로부터의 초대장이었다.

이유안은 정갈하게 적힌 서정원의 글씨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게이트 앞의 크리스마스

"어? 아저씨, 우리집 색깔이 달라졌어!"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서울로 돌아온 윤슬이 본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서 보아도 중앙 카페는 예전 모습과 달랐다.

"크, 크리스마스 에디션···!"

홍소라는 빨강과 초록이 어우러진 본점 외벽을 그렇게 평가했다.

제주점에 있다가 이쪽으로 넘어오니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다.

박물관, 미술관과 카페를 연결하는 길에도 바닥등이 설치되어 따뜻한 겨울 마을에 놀러 온 것만 같았다.

"눈 왔으면 좋겠어!"

윤슬이 유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소망했다.

이유안도 어린이의 말에 동의하며 통통한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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