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37)

질문을 들은 해민은 어쩐지 더 피곤해보이는 표정으로 제 휴대폰을 꺼냈다.

[선생님은 성도 만들어 봤어?]

[성은 엄청 크지?]

[나는 나중에 아저씨랑 이빨 요정 나라에 놀러 가기로 했어!]

[이빨 요정 성도 엄청 클까?]

[선생님도 같이 갈래?]

이빨 빠진 할로윈 이후로 윤슬은 계속 이빨 요정과 성 이야기만 했다.

어린이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테니 채팅 기록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는데, 한글 선생님을 이런 식으로 들들 볶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고생했어."

"됐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어."

강해민은 심드렁한 표정을 꾸며내며 뒤를 돌아서 성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톤의 인테리어에 새카만 옷을 입은 강해민이 얹어지자 충치균 같아서 이유안은 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저씨 표정 이상해!"

알고 있단다, 윤슬.

*

외관은 독특하지만 내부는 당장 장사를 시작해도 될 만큼 완벽한 카페의 모습이었다.

유안은 중앙 카페 본점과 비슷하게 리모델링된 1층을 확인하고 놀랐다.

이제 비조 길드의 흔적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공들여 꾸며둔 건데 아쉬워라."

기청해가 생글생글 웃으며 바 테이블로 바뀐 리셉션 카운터를 손으로 쓸었다.

유안은 문득 그 직원이 떠올랐다.

"기청해 씨, 이제야 물어보는 건데 예전에 비조 길드에 있던 직원들도 전부··· 그쪽이 스킬로 만든 겁니까?"

"응."

"조종도 직접 해요?"

"기본적으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만 성격이나 말투, 사소한 습관 같은 걸 불어넣을 수도 있어. 보여주고 싶은데 이제 방법이 없네."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그 직원도 죽은, 사람이었다는 거죠?"

청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은하게 소름이 끼치기는 한다.

평범한 사람처럼 웃고 떠들던 리셉션 직원이 사실 시체였다니.

"이유안 사장, 날 무서워하지 마."

"무섭겠습니까? 이제 비각성자면서."

어쨌든 그렇게 께름칙한 스킬을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유안은 한층 인간다워진 기청해의 어깨를 붙잡아 주방 쪽으로 빙글 돌렸다.

"요리할 시간입니다."

"이유안 사장도 같이 하는 건 어때?"

"아뇨, 전 됐고. 해민아!"

아이를 보고 있던 강해민을 불러 기청해 옆에 딱 붙여주었다.

장르가 다른 작품에서 인물을 하나씩 끄집어낸 것처럼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다.

"둘 다 파이팅."

그러나 오늘 요리는 둘이 같이 해야 한다.

윤슬이 기대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요리하는 동안 우리는 성 구경하자, 윤슬."

"응, 좋아!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주세요!"

이윤슬은 강해민과 기청해의 뺨에 각각 뽀뽀해주는 것으로 하루치 일당을 지급했다.

아이의 사랑스러운 뽀뽀까지 받았으니 안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이윤슬 어린이."

해민과 청해가 전혀 안 친해 보이는 모습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유안은 픽 웃고 윤슬의 손을 잡았다.

저 둘은 두고 평화롭게 건물 구경이나 해야지.

"근데 아저씨, 여기에도 요정들이 몰래 놀러 오면 어쩌지? 요정 나라에서 여기까지 왔으면 배고플 테니까 베개 밑에 맛있는 거 넣어둬야 할까?"

카페로 사용될 층들을 지나서 직원 기숙사 층까지 올라오자 윤슬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유안 역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베개 밑에 두면 음식이 찌그러지지 않을까, 윤슬."

"으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방에 냉장고를 두는 거야! 작게 만들면 요정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좋아. 주현 씨한테 말해 놓을게.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

"이만하게!"

아이는 작은 냉장고를 상상하며 허공에 네모를 그려 보였다.

'음료 몇 개 정도 들어갈 크기를 원하는구나.'

이유안은 곧장 김주현에게 연락해 미니 냉장고 수십 대를 주문했다.

직원 기숙사 방마다 하나씩 넣으려면 많이 필요하다.

순전히 아이의 동심으로 시작된 일이 직원 복지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꼭대기에 가 보자!"

요정의 배고픔 문제를 멋지게 해결한 어린이는 성의 외관을 맨 위층에서 보고 싶어했다.

유안은 윤슬을 안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최상층까지 올라간다.

"우아아···."

"···우와."

아이와 어른이 동시에 감탄을 뱉었다.

강해민이 끝까지 최상층 리모델링 시안만큼은 보여주지 않아서 유안도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최상층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원래도 완벽하긴 했지만, 이제는 정말 사람 사는 집 같다.

탁 트인 시야 끝에 걸린 테라스 밖의 제주 바다가 영롱했다.

일부러 바다 쪽으로 전면창을 넓게 설치해서 경치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둔 것이다.

집안은 따뜻하지만 창밖에는 겨울 특유의 시원한 느낌이 가득했다.

"좋다."

"나두! 나도 좋아!"

별장이 생긴 기분이다.

유안은 윤슬을 높이 안고 한참이나 바다 구경을 시켜주었다.

한참 바다를 보다가 [전망대 가는 길]이라고 표시된 계단을 쭉 올랐다.

그 끝에 다락방처럼 안락한 공간이 펼쳐졌다.

"아저씨, 저건 뭐야?"

"궁금하면 싶으면 눌러 봐, 윤슬."

"응!"

벽면에 붙은 파란 버튼에 아이의 손이 닿았다.

달칵.

버튼이 눌리자 다락방 전체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조금 놀란 윤슬이 유안에게 달려들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상앗빛 이빨 형태의 외부 돔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윤슬이 유안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감탄했다.

유리 천장을 가리었던 돔이 사라지자 제주의 맑은 하늘이 훤히 보였다.

오늘 날씨도 좋아서 더 깨끗하고 청량한 느낌이 났다.

"여기 별 보는 곳인가 봐!"

"그러게. 하늘 멋지다."

이래서 전망대라고 되어 있었구나.

기껏해야 설치형 망원경 정도를 생각했던 유안은 강해민의 스케일에 감탄했다.

삭막하던 길드 건물을 무슨 유원지처럼 꾸며버렸다.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

"당연히 되지."

"우아! 그럼 선생님들이랑 다 같이 자자!"

"···그래, 그러자."

강해민과 기청해를 양쪽에 끼고 잠자리에 드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눈 딱 감고 하루만 참자.

*

저녁 식사도 만찬 형식으로 진행됐다.

윤슬은 요정 나라에 온 기분을 내기 위해 날개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반짝거리는 왕관까지 썼다.

기청해의 인벤토리에서 나왔던 아이템 중 하나이다.

"나중에 요정 나라에 친구들이랑 같이 다녀올래! 아저씨랑 선생님들은 어른이라서 못 갈 테니까."

장래희망을 요리사에서 요정 나라 왕으로 전향한 윤슬이 당당하게 제 계획을 말했다.

어차피 어릴 때만 가질 수 있는 동심일 테니 어른들은 트집 잡지 않고 아이의 꿈을 응원했다.

'요정 나라에도 이미 왕이 있긴 하겠지만··· 꼭 반란에 성공하렴, 윤슬.'

배가 볼록해질 만큼 든든히 먹은 윤슬이 선생님들 손을 하나씩 붙잡고 최상층으로 질질 이끌었다.

유안은 어린이 한 명에게 끌려가는 어른들의 모습이 웃겨서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것을 본점 직원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보내니 난리가 났다.

빠른 시일 내로 직원들에게도 제주점을 보여줘야 원성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별 완전 많다아!"

아직 초저녁이긴 했으나 하늘이 워낙 맑아서 별이 총총 보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캄캄해지면 더 많이 보일 것이다.

윤슬이 감탄하는 사이 어른들은 최상층에 있는 침구를 잔뜩 끌어와 전망대를 침실처럼 꾸몄다.

침대 없이 바닥에서 자는 것이니 이불을 몇 겹으로 깔아 푹신하게 만들었다.

"옛날 생각 나!"

어린이가 이불 페스트리 위로 몸을 던지며 외쳤다.

"···윤슬, 무슨 옛날 생각?"

"아저씨 만나기 전에! 기차가 내 집이었을 때."

아이는 전혀 슬프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으나 어른들만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그래도 유안은 윤슬을 거둔 장본인이니 어린이의 과거를 알고 있었지만, 기청해와 강해민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적잖이 놀랐다.

"갑자기 인형 생겼을 때도 기분 엄청 좋았는데, 지금이 그때보다 더 좋아!"

이유안은 아이의 작은 보금자리에 던전산 인형을 가져다둔 일이 떠올랐다.

윤슬은 아직 그 인형을 선물해준 것이 유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안 역시 굳이 밝힐 생각이 없었다.

"착한 어린이라서 선물 받은 거야."

"진짜?"

"응. 원래 산타는 착하고 예쁜 어린이한테만 선물 주거든."

"산타가 뭔데?"

윤슬이 동글동글한 눈에 순수한 호기심을 가득 담고 물었다.

이번만큼은 유안도 얼굴을 일그러트릴 뻔했다.

"응? 그게 뭔데에?"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일 없는 어린이는 산타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초대합니다.

유안과 해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얽혔다.

두 사람 모두 당황한 눈빛을 감추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유안은 그나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청해를 쿡쿡 찔렀다.

강해민마저도 한뜻이 되어 청해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두 어른의 모습에 기청해가 살풋 웃더니 윤슬에게 다가갔다.

"산타가 뭔지 궁금한 모양이야. 그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역시 미술 선생님! 알려줘어···, 알려주세요!"

"일단 자리에 예쁘게 누우면."

"누웠어!"

윤슬이 잠자리에 반듯하게 누워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기청해를 보았다.

청해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신도 느긋하게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빨 요정 나라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네에."

"그것처럼 산타 마을도 있어. 아주아주 추운 곳에 있는 마을인데···."

기청해가 능숙하게 윤슬을 재우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안과 해민은 일단 안심하고 작전 회의를 위해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비상이다, 해민아."

"···너는 애한테 산타도 안 알려주고 뭐 했냐."

"말할 기회가 없었어. 그리고···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아서."

크리스마스가 뭔지는 아는 것 같았는데, 산타나 선물 같은 건 전혀 몰랐다.

그냥 막대 과자 데이처럼 맛있는 걸 나눠먹는 기념일 정도로만 생각한 모양이다.

"어쩌지···."

아직 크리스마스까지 시간이 남기는 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산타를 알게 되었으니 기분이 방방 떴을 어린이를 위해 내일 당장 기분 좋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고, 이건 이거지.'

그간 윤슬이 누리지 못한 열흘 남짓의 크리스마스를 이제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윤슬이 친구들 연락처 가지고 있냐."

"응, 윤슬이 디바이스에."

"그럼 일단 초대해. 비행기도 있으니까 직접 데리러 가면 되겠다."

"···해민아, 뭐 하려고?"

강해민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해민은 이미 요정 성의 최상층을 어떻게 꾸밀지 구상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해민이니까 믿긴 하겠지만···.'

유안은 강해민에게 생각 공유를 부탁하고 싶었으나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해민이 최상층을 한 바퀴 빙 도는 사이 기청해도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애 재웠어."

"아, 감사합니다. 무슨 얘기 해줬습니까?"

"산타와 관련된 동화와 민담 몇 개를 섞고, 그걸 중앙 카페 버전으로 풀어냈지."

"···잘하셨습니다."

중앙 카페 버전의 산타 이야기라니, 그 카페 사장으로서 흥미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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