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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친 티만 내려고 찾아온 줄 알았던 성여진 대표는 의외로 일거리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내 서명 필요한 서류가 이렇게 많았구나.'
성여진이 깔끔하게 정리해서 가져오지 않았다면 서류의 산에 파묻혔을 양이다.
유안은 새삼 일 잘하는 여진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성여진에게 복잡한 서류 처리를 전부 맡기면 효율이 좋을 것 같았다.
"이거 다 끝내고, 우리 같이 시범 운영 지점들 둘러보러 갈까요?"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 없습니다."
좋으면서 아닌 척하긴.
아무리 봐도 성여진은 강해민이랑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인수와 관련된 서류를 꼼꼼히 읽고 서명한 유안이 성여진과의 외근 일정을 잡았다.
어차피 한 번 둘러보려고는 했으니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진과 함께하는 게 좋을 것이다.
"777호점부터 갈까요?"
가장 먼저 중앙 카페를 받아들였던 곳이 지금 얼마나 변해있을지 궁금했다.
성여진은 유안의 장소 선정에 군말 없이 끄덕였다.
외관까지 완벽하게 중앙 카페처럼 바뀐 (구) 스윗박스 777호점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중앙 카페 메뉴를 팔기 시작한 지점이 많아지면서 손님이 어느 정도 분산되었다고는 하지만, 777호점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지점이었다.
간판에 걸린 이중앙 마스코트의 얼굴마저 위풍당당해 보인다.
유안은 카페 안쪽에 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음료 두 잔만 얼른 포장해서 나왔다.
'명주 씨도 열심히 일하고 있네.'
김명주 알바생은 777호점으로 잠시 파견 나온 상태였다.
스윗박스와 중앙 카페에 대한 이해도가 모두 높다 보니 여러모로 활약하고 있는 듯했다.
유안은 바쁘게 돌아가는 777호점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차로 돌아갔다.
"여진 씨."
"···저 이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압니다."
"···뭐라고요?"
"제가 좋아하거든요."
메뉴를 버터 핫 초콜릿으로 통일했더니 뾰족한 불만을 들었다.
그래도 타격을 전혀 입지 않은 이유안이 성여진에게 꾸역꾸역 음료를 넘겼다.
"이 사장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좋겠죠. 우리 친구잖아요. 이제 어느 지점으로 갈까요?"
"······."
성여진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일부러 그걸 노리고 말한 거긴 하지만, 너무 정직한 반응을 보이니 자꾸 웃음이 나오려 했다.
유안은 딱딱해진 여진을 쿡 찔러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근처의 다른 지점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는 친구' 소리를 들을 때마다 굳어버리는 성여진을 데리고 한참 드라이브했다.
한국은 스윗박스 공화국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을 만큼 스윗박스 지점이 많았기 때문에 돌아봐야 할 곳도 상당했다.
카페를 방문할 때마다 빈손으로 나올 수는 없으니 이것저것 샀더니 뒷좌석에 음식만 한가득 쌓였다.
"777호점 말고 다른 지점들도 웬만큼 적응은 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네."
"다 여진 씨가 잘 관리해주신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별거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안이 대놓고 칭찬과 감사를 표하자 여진은 새빨개진 얼굴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잔잔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 얘기라도 해서 간질거리는 분위기를 끊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국내 지점들 다 정리되면, 해외로 나갈 겁니다. 미국부터 처리하고, 그 후에 유럽 쪽으로요."
"여진 씨 계획이라면 완벽할 테니 걱정은 안 합니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세요."
"···완벽한 계획에는 무리 같은 거 없습니다."
성여진은 상대의 걱정을 들었을 때 더 열심히 일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강해민 케이스를 겪으며 이런 부류의 인간을 학습한 유안은 계속해서 여진의 건강을 걱정했다.
'걱정된다는 게 완전히 빈말도 아니니까···. 성여진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
좋은 게 좋은 거지.
여진을 본사 앞에 내려준 유안이 인수 관련해서는 더 신경 쓸 부분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중앙 카페 본점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정말이지, 주변에 일 중독자들이 많아서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회귀하길 잘했다.
*
비각성자이자 백수 신분이 된 기청해는 예술 활동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헌터로서의 능력은 잃었으나 타고난 미적 감각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청해의 미술 교실은 그 인기가 여전했다.
최근에는 직장인 교실도 열었다.
"요즘 즐거워 보이십니다?"
"이유안 사장을 만난 후로는 늘 즐거웠어."
"말은 잘해요. 윤슬이는 침실에 있습니까?"
"응, 낮잠 시간이야."
윤슬은 여전히 청해의 옆에 꼭 붙어 있으려고 했다.
선생님이 약해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윤슬의 애정 표현이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기는 했다.
전에는 마냥 매달리고 어리광을 부렸다면, 이제는 어린이 호위 기사처럼 기청해를 지켜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잘 그렸네요."
미술관 1층의 가장 넓은 벽에 붙은 아이의 그림.
전에 그렸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물들이 캔버스 안쪽에서 복작거리고 있었다.
유안은 성여진으로 추정되는 동그라미 뭉치와 손수혜 기자로 추정되는 네모 뭉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림의 정중앙에서 윤슬은 집게발을 높이 들고 기청해로 추정되는 파란색을 보호하는 중이었다.
"든든한 기사님이 생겨서 좋으시겠습니다."
"그럼 악당 역할은 역시 이유안 사장인가."
"말이 됩니까. 제가 기청해 씨 살려드린 건 다 잊으셨나 봅니다."
"설마. 평생 못 잊어. 내 목숨은 이유안 사장 거야."
"사양하겠습니다."
이유안은 부담스러운 고백을 단칼에 거절하고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청해와 농담이나 하려고 미술관에 찾아온 건 아니었다.
"제주도 갈 건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유안은 강해민이 보낸 문자를 보여주었다.
비조 길드 리모델링이 거의 끝났으니 확인하러 올 거면 오라는 내용이었다.
와도 되고 안 와도 된다, 는 문장이었으나 유안은 이럴 때 안 가면 해민이 며칠간 삐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가야 한다.
"윤슬이 데려올 테니까 비행기에 먼저 가 있어."
베스트 드라이버가 군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안은 전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이는 기청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앙 카페 근처의 이륙장으로 향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기다리자 곧 윤슬을 안은 기청해가 나타났다.
아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이불 채로 데려온 것에 유안이 기함했다.
이윤슬이 거대 부리또처럼 이불에 포옥 감겨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나 잘했지?"
"···예, 뭐."
이유안은 기청해를 대충 칭찬하고 조종석으로 보냈다.
비행기가 출발하자 윤슬은 중간에 스르륵 깨어났다.
그리고 바로 유안과 눈을 마주치며 꺄르륵거렸다.
"아저씨, 우리 놀러 가는 거야?"
"응, 놀러 가는 거야. 윤슬,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저씨가 해주는 거는 다 좋아! 아, 선생님이 해주는 것도 좋아!"
"거기 가면 한글 선생님도 있을 거야."
"진짜아? 그럼 한글 선생님이랑 미술 선생님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달라고 하자!"
음··· 재밌겠는데.
강해민과 기청해의 합동 요리라니.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의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니 즐거웠다.
"그래, 윤슬."
"히이, 좋아!"
윤슬은 꼬물꼬물 움직여 이불에서 빠져나오려다 팔다리가 막혀서 당황했다.
힘을 세게 주면 충분히 나올 수 있겠으나 이불이 멀쩡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윤슬은 자신의 애착 이불을 찢어버릴 수 없어서 울상만 지었다.
"아저씨이···."
"잠시만, 윤슬. 금방 꺼내줄게."
뭐 이렇게 꽁꽁 싸맸담.
이유안이 침착하게 어린이 부리또의 포장을 푸는 동안 비행기는 비조 길드 앞마당에 부드럽게 착륙했다.
"우아아!"
부리또 감옥에서 벗어난 아이는 (구) 비조 길드 건물을 보고 와다다 달려갔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외관의 건물 앞에 강해민이 서 있었다.
어쩐지 해민의 피곤한 눈에서 은은한 광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리모델링을 했지···? 좋긴 한데······.'
유안은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 건물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강해민은··· 좋은 쪽으로 말하면 건축 실력이 엄청났고, 나쁜 쪽으로 말하자면······.
"변태 같은 실력이야."
그래, 그거.
유안은 제 속마음을 대변해준 기청해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요정 나라 성
"그래도 해민이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애가 은근히 상처 잘 받아요."
"다정해라."
"친구니까요."
유안은 당연한 소리를 하는 기청해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눈앞의··· 그래,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요정 성을 보았다.
스윗박스 인수 때문에 바빠서 내부 인테리어 시안만 확인한 게 화근이었다.
'외부를 이렇게까지 파격적으로 바꿔버릴 줄은 몰랐지···.'
어쩌다 이런 디자인을 하게 된 걸까.
'해민이가 놀이공원이나 아기자기한 걸 좋아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짚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유안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상앗빛 띠는 건물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첨탑처럼 높게 솟아오른 건물의 끝은 납작하고 뭉툭한 부분도 있었고, 송곳니처럼 뾰족한 부분도···.
"···저거 설마, 이빨인가······."
이유안은 번뜩 깨닫고 놀랐다.
강해민이 건물 디자인 레퍼런스로 치아를 택할 줄은 몰랐다.
대형 치과 병원에서도 저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린이의 동심을 지켜주려고 하나 봐. 좋은 선생님이야."
"···예?"
유안은 기청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해는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고 해민 쪽을 턱짓했다.
리모델링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라는 뜻이다.
강해민은 건물 앞에서 윤슬을 안고 외벽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주는 중이었다.
"날개옷 입고 날아보면 안 돼?"
"그건 위험하잖아. 어디가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꼭대기!"
"위에 올라가면 볼 수 있어. 날개옷 안 입어도 돼."
윤슬은 키가 작아서 높은 곳까지 볼 수 없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비행 능력이 붙은 아이템을 쓰겠다고 조르다가도 살살 타이르니 금세 알겠다고 대답하는 아이가 착하고 예뻤다.
유안은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고 해민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바꾼 거야? 아니, 잘 만들기는 했는데··· 음,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해서."
"···뭐냐, 기억 못 해?"
해민의 표정이 불량해졌다.
비상이다.
유안은 제 머릿속을 빠르게 헤집어 강해민이 무얼 말하는 것인지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실패했다.
"······미안, 기억 안 난다."
강해민이 최근에 치과에 갔다거나 해강 그룹이 의료 산업으로도 진출했다거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다 말이 안 되었다.
유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해민을 바라보자 덜컥 화를 낸 건 의외로 윤슬 쪽이었다.
"아저씨이! 나랑 약속했던 거 까먹었어?"
"응···?"
"이빨 요정 나라 놀러 가기로 했잖아! 같이 이빨 성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요정들이랑 숨바꼭질도 하구우······."
"아, 기억 나. 기억 났어. 까먹은 게 아니고 잠깐··· 아주 잠깐 기억이 안 났던 거야, 윤슬."
"그게 까먹은 거잖아!"
반박할 수 없었다.
유안은 쩔쩔매며 해민에게서 윤슬을 받아 안았다.
그래도 안아주는 걸 거부하지는 않고 힘 뺀 주먹으로 어깨를 콩콩 때리는 게 귀여웠다.
정말 미워서 때린 거라면 연약한 E급 어깨뼈 같은 건 진작 박살났을 것이다.
이유안은 윤슬의 솜주먹을 손으로 말아 쥐고 재차 사과했다.
"미안해, 윤슬. 같이 요정 나라 가기로 했었는데 어른은 안 들여보내준대서 포기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까먹었나 봐."
"···진짜야?"
"응. 그래도 이제 우리한테는 이빨 성 생겼으니까 괜찮지? 요정들 대신 친구들 초대하자."
"으응, 좋아!"
아저씨와 함께 요정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3초 정도 침울해졌던 윤슬은 친구를 초대하면 된다는 말에 미소를 되찾았다.
"해민이 너는 어떻게 알고 있었어?"
요정 나라 이야기는 자기 전 베개 밑에 빠진 유치를 놓아두며 했던 것 같은데.
강해민이 윤슬의 동심을 어떻게 낱낱이 알고 있던 건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