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회 일에 심해 던전 공략대 일까지 하느라 바빠진 류지우는 중앙 카페에도 통 못 들르고 있었다.
언뜻 듣기로는 협회 건물에서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불쌍하게 살고 있다고···.
"일 좀 쉬엄쉬엄 하십시오. 전처럼 쓰러지지 말고."
"쓰러지면 또 본점에서 유안 씨한테 병간호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제가 이번에 유능한 미술 교사 겸 요리 교사 겸 가정부를 고용했습니다. 병간호도 그분이 맡아주실 겁니다."
유안이 기청해를 가리키며 말하자 류지우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스윗박스 인수하신다면서요."
청해 얘기를 더 하기는 싫었는지 류지우가 말을 돌렸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에는 성여진 쪽을 가리켰다.
"자세한 사항은 저쪽 대표님께 물어보면 친절하게 답변해주실 겁니다."
"유안 씨, 저랑 얘기하기 싫어요?"
"설마요."
그냥 여기저기서 시달렸더니 급격히 피곤해져서 혼자 있고 싶어졌을 뿐이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건강 주스 윈터 스페셜을 꺼내 지우에게 내밀었다.
특별한 건강 주스를 받은 류지우가 얌전하고 조용해졌다.
'이제 끝인가···.'
더 달려드는 헌터가 없으면 대충 인사하고 먼저 올라가 쉴 생각이었다.
"유안 사장님!"
"이 사장님."
수창 길드장과 새로 길드장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중앙 카페의 단골 손님들로만 이루어진 바베큐 파티에 참석한 이상, 이유안 사장이 쉬기는 글렀다.
*
"우와···. 이거 진짜 예쁘네요, 이 사장님. 허어···, 이걸로 장신구 만들면 얼마나 예쁠까요! 조금만 세공해도 반짝거릴 것 같은데."
김주현이 장갑 낀 손으로 던전산 백진주를 어루만졌다.
어떤 재료를 만질 때보다 섬세한 손길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안이 듣고 싶은 건 백진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평이 아니었다.
"주현 씨, 그래서 감정 결과는 어떻습니까?"
등급 높은 아이템은 간혹 정보가 감춰져 있는데, 감춰진 정보는 [감정] 스킬을 가진 헌터가 읽을 수 있었다.
"스킬 쓰니까 글자가 깨져 보였던 부분이 제대로 보이기는 하는데··· 그 이상의 정보는 알 수 없었어요."
[심해의 백진주]
깊이 잠든 심해의 영약.
바다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스며든다.
그래도 영약이라니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게 된다.
"이 정도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볼게요."
김주현보다 더 높은 등급의 [감정] 스킬을 가진 헌터가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백진주에 대한 정보 발설을 금지하는 계약을 쓰고 감정을 진행해야겠지만, 그런 수고로움은 별것도 아니었다.
"아저씨!"
유안이 인벤토리에 진주를 다시 챙겨 넣으려던 때, 윤슬이 만물 공방에 쳐들어왔다.
어찌나 씩씩하게 들어왔는지 문이 불안하게 덜컹거렸다.
"오늘도 나랑 안 놀아줄 거야?"
"아냐, 지금 윤슬이한테 가려고 했어."
"으음··· 근데 아저씨, 그건 뭐야?"
요즘 바빠서 자주 못 놀아줬더니 어린이의 원성이 대단했다.
윤슬은 유안이 손에 쥐고 있던 백진주를 가리키며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아, 이건···."
"나 주려고 사 온 거야?"
"응? 아······."
아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데 차마 아니라고 하기가 민망했다.
그래도 이건 기청해를 위한 것이었으니 눈을 질끈 감고 부정했다.
"요리 선생님 거야."
"···그렇구나아."
윤슬은 많이 아쉬웠는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백진주를 만져보고 싶은데 선생님 거라니까 작은 손을 꼬물대기만 한다.
유안은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품에 꼭 안고 백진주를 내밀었다.
"구경하는 건 괜찮아."
"으응, 정말? 우와··· 이거 엄청 커! 진짜 보석 같아!"
진짜 보석 맞단다.
유안은 윤슬이 양손으로 백진주를 쓰다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 사장님, 윤슬이도 [감정] 스킬 있을 텐데요!"
그때 김주현이 뜻밖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공방 체험 학습 때 스킬 쓰는 거 보여줬더니 바로 따라했거든요. 윤슬이 등급이 저보다 훨씬 높으니까 스킬 등급도 높을 거예요!"
"윤슬."
"웅? 나한테 또 부탁할 거 있어?"
이윤슬은 제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눈빛을 뿌듯하게 받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뭐든 말해! 내가 제일 강하니까!"
"그럼, 윤슬···."
유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윤슬에게 [감정] 스킬을 쓰게 했다.
김주현이 스킬을 썼을 때와는 다르게 시간이 한참 걸렸다.
"으응··· 다 된 거 같아."
마나를 많이 쓴 어린이가 작게 하품하며 유안에게 기댔다.
이유안은 졸려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백진주의 아이템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
[심해의 백진주]
깊이 잠든 심해의 영약.
바다와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 스며든다.
단, 사용자를 각성 이전의 상태로 되돌린다.
어린이가 읽어낸 정보는 단 한 줄이었으나 이 아이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아이템을 쓰면··· 기청해는 비각성자가 된다.
비각성자
무엇보다 중요한 건 기청해의 의견이다.
'백진주 부작용 설명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봐야겠지.'
마음만 같아서는 몸에 좋은 거라고 하면서 억지로 흡수시키고 싶지만, 그렇게 마구잡이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스킬은 F급까지 떨어졌으니 그걸 유지한 채로 살고 싶을 수도 있고."
상어 요리를 계속 섭취하자 기청해가 가진 [바다의 부름] 스킬은 최하급인 F급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무리 요리를 먹어도 등급 변동이 없었다.
깔끔하게 뿌리 뽑으려면 진주를 쓰는 게 답인 것 같기는 한데···.
"윤슬, 잠깐 정원 씨랑 놀고 있을래?"
"아저씨는 요리 선생님한테 가려는 거 아니었어?"
"맞아. 단둘이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요리 선생님 잠깐만 빌려줄 수 있지?"
"음··· 그래!"
아이는 흔쾌히 기청해 대여권을 넘겼다.
유안은 윤슬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정원에게 안겨주었다.
기청해의 침실 앞에서 유안은 한참 망설였다.
평소에는 노크도 없이 방문을 벌컥벌컥 열었지만, 오늘은 모든 동작이 조심스럽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가자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기청해가 보였다.
"이유안 사장."
"···예."
"무슨 일이야?"
청해는 발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유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방을 조금 둘러보았다.
이 방은 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잔소리할 거리를 찾지 못해 아쉬웠다.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뜸 들이는 걸 싫어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러고 있었다.
"사람 사는 것처럼 해놓고 지내시죠. 덩그러니 침대 하나만 있고, 이게 뭡니까."
그래서 기껏 뽑아낸 잔소리가 이것이었다.
트집 잡을 일 아닌 거 안다.
알지만··· 긴장을 풀려고 어쩔 수 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주현 씨가 보급형 가구 많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몇 개 사서 방 좀 채우세요. 윤슬이 요즘 물고기 좋아하던데 수조 같은 거 넣어도 좋을 것 같고."
"응."
"······."
"그래서 무슨 얘기 하러 온 거야?"
밑도 끝도 없는 잔소리에도 고분고분 대답하던 기청해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물었다.
이제 더 미룰 수 없었다.
유안은 기청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청해 씨, 각성 언제 하셨습니까."
"게이트 등장 초기에 했어."
"하긴, 그랬으니까 비조 길드 세운 거겠네요."
"응, 운이 좋았어."
기청해가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인정했다.
"···각성한지 오래 되셨으니까, 비각성자일 때 어땠는지 잘 기억 안 나죠?"
"그런 편이지. 그래도 감기 걸렸던 거나 팔 부러졌던 건 기억해."
"예? 팔도 부러졌습니까? 어느 쪽이요."
"오른쪽. 어릴 때 미끄럼틀에서 떨어졌어. 지금은 멀쩡해. 원래 애들은 한 번씩 부러지고 커야 더 튼튼해진다잖아."
놀이터에서 놀다가 팔 부러진 기청해라니···.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은 유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인간도··· 어린 시절이 있긴 하겠구나.
"안 믿깁니다. 기청해 씨는 태어날 때부터 이랬을 것 같아서."
"설마."
기청해가 여름 바다처럼 청량하게 웃었다.
환하게 짓는 눈웃음에 이유안이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청해가 미소를 싹 지우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이유안 사장, 어릴 때 이야기는 다음에 더 이어서 하자.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잖아."
"······."
"아이템 정보 알려줘."
"···알겠습니다."
유안은 인벤토리에서 백진주를 꺼내지는 않고 헌터 디바이스를 통해 정보만 공유했다.
푸른 빛을 담은 눈이 아이템 설명의 단서까지 빠르게 읽어내린다.
그리고 곧, 그린 듯 아름다운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유안 사장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저야 당연히 기청해 씨 비각성자로 만들고 싶죠. 그간 재수 없었는데 잘 됐다 싶습니다만. 비각성자 되는 순간 각오하십시오."
"등이 남아나질 않겠어."
기청해는 우는 소리를 하다가 손가락 끝으로 유안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이유안 사장이 하자는 대로 할게. 그게 내가 원하는 방향이야."
"···비각성자 되면 인벤토리도 못 씁니다."
"어차피 내 인벤토리는 이유안 사장한테 저당 잡힌 거 아니었어?"
"그건···! 맞죠."
"길드 건물도 빼앗겼고, 인벤토리의 아이템도 빼앗기면 나는 정말 가진 게 하나도 없게 되겠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금은 S급 각성자라서 그나마 봐줄 구석이 있지만, 등급까지 빼앗기면 그냥 미술관에서 요양 중인 백수가 된다.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기청해 입에서 정말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나왔다.
왠지 모르게 양심이 콕콕 찔린 유안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냥 베이비 시터 역할이나 계속 하시죠! 미술이나 요리 선생님도 괜찮고."
"그럼 비각성자가 되어서 쓸모 없어져도 여기서 계속 지내도 돼?"
"기청해 씨, 술담배 안 하죠."
"···응."
"시력도 좋고, 사지 멀쩡하고, 수술 경험 없고."
"······응."
"그럼 쓸모 많은 거죠. 여기 계속 지내셔도 됩니다."
이유안은 자꾸 몽글몽글해지려는 분위기를 깨부수기 위해 일부러 으름장을 놓았다.
청해도 유안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웃었다.
"인벤토리에 있는 것부터 다 뺄까?"
"예."
유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청해의 인벤토리에서 각종 아이템과 냉동 생선들이 산더미처럼 튀어나왔다.
정말 끝도 없이 나온 아이템들은 커다란 침실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멈추었다.
"가구··· 당분간은 필요 없겠습니다."
"그러게."
기청해가 이유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안은 하얀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백진주를 꺼냈다.
인벤토리도 비웠으니 이제 정말 시간이 되었다.
이유안이 우윳빛 구체를 청해의 손 위로 도르륵 굴렸다.
사아아······.
어쩐지 성스럽게 느껴지는 빛이 들꽃처럼 퍼지며, 백진주가 기청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흡수 전이나 후나 별 차이 없었다.
"기청해 씨, 제대로 됐는지 확인 한 번만 해보겠습니다."
짜악!
유안이 대뜸 청해의 등짝을 내리쳤다.
마찰이 생겼으니 손바닥이 얼얼하긴 했지만, 이전처럼 콘크리트 벽을 때린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파하는 건 청해 쪽이었다.
"아야··· 각성한 헌터가 비각성자를 때리면 얼마나 위험한데."
"축하드립니다."
이걸로 기청해는 바다의 부름을 받지 않게 되었다.
유안은 비각성자의 등을 살살 매만지며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