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은 일부러 허튼 생각을 하여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여름에 끊어져 있어."
기청해는 담담하게 자신이 확인한 것을 말했다.
공교롭게도, 유안이 회귀한 것도 여름이었다.
사계절 중 두 번째로 긴 계절이니 아무렇게나 때려 맞힐 확률도 꽤 높겠지만, 이유안은 알고 있었다.
'이런 걸로 허튼 소리 할 인간은 아니지.'
회귀한 후에는 오래오래 잘먹고 잘살려고 던전에도 안 들어갔다.
각종 위험한 일에서 멀어지기 위해 강한 사람들을 모았고, 그들은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왜.'
3년 회귀가 아니라, 3년 유예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유예 기간에서 반 년을 썼으니 이제 2년 반이 남았다.
*
기청해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려 했으나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청해도 각종 상어 요리를 먹었지만 스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 음식을 삼킬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어디냐.'
흑등상어의 끔찍한 맛을 겪은 기청해는 이제 웬만한 음식은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애지중지 인벤토리에 보관하던 중앙 카페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먹는 장면이 포착되곤 했다.
기청해가 회복의 기미를 보이니 다행이긴 했지만, 유안은 이제 제 코가 석 자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데.'
회귀 전이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다.
그때는 정말 던전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죽음을 체험한 당시에도 크게 슬프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냥 때가 되었구나, 하고 묵묵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도 늑대한테 씹히는 기분을 또 느끼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은 책임질 사람이 많아졌다.
일단 애도 한 명 있었고, 자신만 믿고 여기까지 함께해준 직원들이 있었다.
본점, 강남점··· 그리고 저 지하에도 한가득.
비조 길드 리모델링이 끝나면 제주점도 오픈할 예정이었다.
'죽으면 안 되지. 못 죽지.'
이유안은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다.
기청해는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지만, 매니저인 서정원이나 셀라에게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슬퍼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 해결하고 나서 영영 비밀로 묻어두고 싶었다.
'해결해야지. 기청해도 살렸는데 내 목숨 하나 못 살릴 이유 없으니까.'
유안은 제게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그 안에 뭐든 다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었다.
*
"성여진 대표님 온다고 했죠?"
"네, 사장님. 제가 같이 있을까요?"
"아뇨. 그 사람 안 그렇게 보여도 상급 헌터 있으면 겁 먹습니다. 비각성자이니 배려해야죠."
"음···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참을게요."
안 참으면 어쩌려고 했던 걸까.
서정원은 정말 착하고 순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매니저지만 가끔 살벌한 미소를 흘릴 때가 있었다.
분명 눈은 웃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품에서 칼을 꺼낼 것 같은 느낌.
성여진을 볼 때마다 그런 표정을 지어서 유안이 정원의 기분을 가까스로 풀어준 것도 몇 번이나 되었다.
유안은 여진이 도착하자 3층 사무실 대신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인수 관련 기사를 보고 화난 성여진이 며칠 전부터 찾아오겠다고 난리였지만, 이유안이 바빠서 오늘에야 만남이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니 사무실처럼 밀폐된 공간보다는 탁 트인 곳에 있는 게···.
"지금! 이런 기사가 났는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래, 탁 트인 곳에 있는 게 고막 건강에 좋을 것이다.
이유안은 쩌렁쩌렁 화내는 성여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에 맞붙어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처음 인수 관련 기사가 났을 때는 중앙 카페에서도 열심히 기사를 막아보고, 정정 보도를 요청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신문사 하나에서 불씨를 던지자 다른 신문사도 먹잇감 찾은 들짐승처럼 우르르 달려든 것이다.
중앙 카페에서 아무리 열심히 막아도 새로운 추측성 보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마 스윗박스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을 거고···, 실패했겠지.'
여진이 화날 만도 하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이유안 사장! 정말 우리 스윗박스를 인수라도 할 생각이에요?"
"예.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하고는 싶습니다."
"···뭐? 지금···, 지금 뭐라고 했어요."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유안은 차분하게 대답하며 성여진을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이 사람은 흥분할 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는 습관 좀 고쳐야겠다.
지금도 여진이 갑자기 확 일어나는 바람에 테이블이 넘어질 뻔했다.
"성 대표님,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이나 하시죠!"
"여진 씨."
"···뭐, 뭐요. 왜 그럽니까."
유안이 최근 찾아낸 성 대표의 약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까칠하게 굴었으면 성 떼고 이름만 불려본 적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성여진은 직함 대신 제 이름 두 글자만 들으면 물에 닿은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었다.
덕분에 이유안은 그 점을 아주 잘 이용해 먹고 있었다.
"여진 씨랑 계속 일하고 싶어서 그러죠."
"그럼··· 스윗박스가 중앙 카페를 인수하면 될 일 아닙니까. 나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연락했던 건데."
그랬었지.
성여진은 당당하게도 중앙 카페를 꿀꺽 삼키려고 접근했었다.
아직 그 야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 여진다웠다.
"여진 씨, 요즘 스윗박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음료가 뭔지 아십니까?"
"···버터 핫 초콜릿, 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람들 역시 음료 좀 마실 줄 안단 말이야.
유안은 스윗박스 손님들의 탁월한 선택에 만족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제일 잘 팔리는 디저트는?"
"······고원 땅콩 쿠키."
"그럼 지난달 매출 가장 높았던 매장, 1위부터 5위까지 말해보세요."
"777호점, 1호점, 1500호점, 100호점, 제주점 순입니다. 내가 이런 것도 못 외웠을 줄 알아요? 매출 정도는 꾸준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대표의 자질을 평가하려고 물어본 게 아닌데 발끈하는 모습이 좀 웃겼다.
유안은 성여진에게 흑등상어 푸딩 하나를 건네며 진정시켰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 푸딩에는 상어 지느러미가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다.
홍소라가 싫다, 싫다 하면서도 흑등상어의 생김새를 정확히 구현해 만든 것이었다.
자매품으로는 흑등상어 젤리가 있다.
"여진 씨, 제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 그냥 사실만 얘기하는 거니까 화내지도 맙시다. 아셨죠?"
"······."
여진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푸딩을 떠 먹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기분 좋아지는 효과가 붙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유안은 푸딩이 바닥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스윗박스 777호점, 저희 중앙 카페에서 제일 많이 신경 쓴 지점입니다. 그리고 매출 상위에 오른 지점들도 우리 직원들이 방문해서 자세한 솔루션을 제시했고요."
"그 지점들은 이전부터 매출이 높았어요! 중앙 카페를 등에 업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여진 씨, 그렇게까지 우겨서 얻는 게 뭡니까. 이제 인정하시죠, 중앙 카페 음식을 팔기 시작하고부터 매출이 급등했다는 걸."
"······."
"여진 씨가 계속 아니라고 우기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유안은 여진 앞으로 포장된 흑등상어 젤리를 내밀며 말했다.
"스윗박스와 했던 납품 계약은 없던 걸로 할 거예요. 중앙 카페에서 제공했던 기계도 빼갈 겁니다."
짐짓 단호하게 말하자 성여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손에도 힘이 들어갔는지 여진이 쥐고 있던 흑등상어 젤리가 콰지직 뭉개진다.
'이제 화내겠지. 그래도 알아들을 때까지 잘 설명하고 타이르고 협박하는 거야.'
유안은 성여진의 3초 뒤 반응을 예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흐, 읍."
"······여진 씨?"
마음의 준비 못 했다!
다 망해버렸다.
성여진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때보다 놀란 유안은 삐그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애석하게도 근처에 휴지도 없었다!
"자, 잠시만요."
머릿속이 하얗게 휘발되는 감각을 경험하며, 유안은 1층 홀로 들어갔다.
그러자 서정원이 기다렸다는 듯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통째로 건넸다.
"에베베··· 사, 사장님이 대표님 울렸대요···."
이 와중에 홍소라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유안을 놀렸다.
그런데 지금은 소라의 놀림에 반응해줄 정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왜 울어! 내가 뭐 욕이라도 했냐고!'
다시 후다닥 뒷마당으로 돌아간 유안은 여진의 손에 휴지를 쥐어주었다.
그러나 성여진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여진 씨, 여진 씨···! 그만 울어요. 휴지로 좀 닦고, 예?"
"······."
유안은 허둥댔고, 여진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사람이 되어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기만 했다.
한참 울던 성여진이 젖은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나는 이제··· 다 끝났습니다."
사람이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고 우울해졌다.
이유안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여진 씨가 끝나긴 왜 끝납니까. 아닙니다."
"이유안 사장도··· 결국 나를 버린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여진이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렸다.
결국 유안이 나서서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 성여진의 얼굴에 꾹꾹 눌러주었다.
"중앙 카페가 스윗박스 인수하면 되는 일입니다. 제가 아까도 말했잖아요, 여진 씨랑 계속 일하고 싶다고."
성여진을 꾀어내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심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거대 기업의 자본과 공격적인 투자 전략은 중앙 카페가 당장 따라하기에는 힘든 부분이다.
특히 해외 지점에 관해서는 여진의 힘을 빌리는 것이 낫다.
"···그렇게 말해놓고 이유안 사장도 마음이 바뀌면······."
그나저나 성여진 이 인간,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저기서 뒤통수 많이 맞아본 모양이다.
지금 이만큼 까칠한 성격이 된 것도 그런 과거의 결과물 아닐까.
"마음 안 바뀌니까 저 한 번만 믿어보시죠."
유안이 여진의 얼굴에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꾸욱 눌렀다.
겹겹이 젖어가는 걸 보니 이 휴지 다시는 못 쓰겠다.
"중앙 카페가 스윗박스 인수하면, 여진 씨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질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
"예. 저희 직원들도 여진 씨한테 웬만큼 정은 붙은 것 같던데요."
이유안이 그렇게 말하자 성여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데.'
인수전선에 초록불이 들어왔다.
하우카르틀
유안은 여진이 울음을 완전히 그치길 기다렸다가 흑등상어 젤리 몇 개를 더 꺼내주었다.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느라 당이 떨어졌는지 바로 포장을 까서 입안에 쏙 넣는 모습이 이상하게··· 약간은 귀여웠다.
"이제 좀 진정하셨습니까?"
"···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말해보시죠."
"······흡."
실수했다.
또 울려고 한다.
눈물샘이 고장났는지 무슨 말만 해도 울먹이는 분위기로 넘어가서 유안은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말하지 마세요. 말 안 해도 됩니다."
"······말하고 싶은데요."
"예? 아··· 그럼 하세요."
우는 윤슬이 달래는 게 차라리 더 쉬울 지경이다.
유안은 그냥 성여진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기로 했다.
울지만 않으면 뭐든 괜찮다.
카페 메뉴 하나씩 다 달라고 졸라도 들어줄 수 있다!
"다들 중앙 카페 이야기만 합니다."
성여진이 울먹울먹 꺼낸 말에는 주어가 없었으나 누굴 말하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필시 스윗박스 비서진 이야기일 것이다.
여진이 가장 많이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비서진뿐 아니라 스윗박스 직원들 전체가 중앙 카페에 푹 빠졌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냥··· 스윗박스는 잊히는 것 같고. 손님들한테도, 직원들한테도. 지난 일주일간 그냥 중앙 카페랑 합쳤으면 좋겠다는 말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다들,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윗박스는 성여진 대표님이 어릴 때부터 만들고 싶던 카페라고 하셨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정도는 기사 찾아보면 다 나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윗박스의 대표에 관한 정보인데, 간단한 건 검색 몇 번으로 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기업인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놓고 싶지 않은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
"제가 제안하는 것도 스윗박스의 본질을 다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