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37)

컨셉에 푹 빠지기는 했어도 솔루션은 제대로 제공한 모양이다.

혹시 방재이도 말투를 바꾸었는지 궁금해졌다.

'재이 씨는 안 그렇겠지.'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하며 주방 쪽을 힐끔거리게 된다.

소라의 조언을 받은 카운터 직원이 유안과 다시 눈을 맞추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님. 바로 주문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발음 한 번 안 틀리고 이유안이 시킨 메뉴를 줄줄 읊었다.

그리고 진동벨을 내밀었다.

메뉴가 전부 준비되면 울리는 그것이었다.

"우리도 이거 도입할까요?"

"있으면 편할 것 같기는 해요."

유안이 정원에게 진동벨을 내밀며 묻자, 서정원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주현 씨한테 말해 보겠습니다."

"픽업 공간이 필요할 테니까 바 테이블도 좀 연장해야겠어요, 사장님."

본점 매니저인 서정원은 머릿속에 이미지를 넣어둔 것처럼 무엇이 더 필요한지 척척 말했다.

"내부가 혼잡하니까 벨 울리면 제가 들고 갈게요. 사장님은 가서 앉아 계세요."

그리고 서버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믿음직스러운 매니저였다.

유안은 고맙다는 의미로 서정원의 어깨를 몇 번 주무르고 김명주가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명주는 눈에 불을 켜고 스윗박스 777호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사냥감을 노리는 육식 동물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뭐하고 계셨습니까?"

"아, 깜짝···! 저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지 보고 있었어요."

김명주가 스윗박스 777호점의 전 애인처럼 말했다.

"흥, 역시 엉망인 부분이 많네요. 알바생 몇 쓴 것 같기는 한데 2년차 직원 실력 따라잡기는 힘들겠죠.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더러운 스윗박스."

"···직원들이 괴롭히기라도 했습니까?"

"네? 아뇨? 우리 매니저님이랑 직원들은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다들 너무 착한 바람에 스윗박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유일한 흠이죠······."

"중앙 카페가 원망스러웠겠습니다."

"네에?! 왜요!"

직원들과는 친했는데 단순히 일거리가 너무 많아서 관둔 거라면, 일이 많아지게 한 원흉인 중앙 카페를 미워할 법도 했다.

그런데 김명주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부정했다.

"대책 생각 안 하고 대뜸 납품 수락한 본사가 문제죠, 본사가! 대표는 특히 더 생각이 없다니까요! 사퇴해라, 성 대표."

"······."

김명주도 성여진을 고깝게 여기는 듯했다.

얼결에 둘 사이에 낀 포지션이 된 이유안이 애매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성여진이 요즘은 개과천선했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퇴사할 조건 갖춰준 덕분에 지금 중앙 카페로 이직도 하게 됐고, 사장님도 만났으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좋아요! 스윗박스 대표는 평생 그렇게 살든 말든 알 바 아니에요!"

이랬는데 스윗박스를 중앙 카페가 인수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유안은 명주에게 꼭, 직접 말해주기로 했다.

"사장님."

그때 서정원이 음료와 디저트의 탑을 쌓고 자리로 돌아왔다.

묘기에 가까운 서빙 실력에 주변에서는 마구 박수를 쳤다.

"정원 씨, 너무 눈에 띕니다."

"한꺼번에 들고 오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어요. 이거 드세요, 사장님."

정원은 스윗박스의 마카롱으로 유안의 입을 막았다.

잔소리를 더 해야 하는데 단맛으로 막혀버렸다.

'평범한데 나쁘지 않네.'

유안은 이어서 서정원이 내민 겨울 시즌 음료를 쪽 빨아 마셨다.

이것도 저것도 다 단맛이라 입안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무슨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를 벌써부터 내. 산타랑 같이 하늘나라 가버려라······."

옆에서 명주는 익숙한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초록색 입힌 휘핑 크림이 트리 모양으로 쌓인 음료에는 특별히 더 많은 악담을 퍼부었다.

"이거 만들기 진짜 귀찮아요. 휘핑 모양 흐트러지면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한다고요!"

"마시멜로 같은 걸로 대신하면 훨씬 편하겠죠?"

"네! 직원들도 맨날 그 얘기 했어요!"

명주는 오래 일한 직원답게 어떻게 하면 메뉴를 더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지 잘 알았다.

푸념 겸 솔루션을 귀 기울여 듣던 유안이 명주에게도 음료 한 잔을 내밀었다.

"이거 중앙 카페 거죠? 음, 맛있다. 근데 역시 본점이나 강남점에서 마시는 게 훨씬 나아요. 이것도 괜찮긴 한데···."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사장님."

스윗박스에 여러 차례 방문한 서정원은 음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방재이의 손길이 닿은 음료는 일반 식재료가 일부 섞였음에도 중앙 카페와 흡사한 맛을 자랑했다.

세 사람은 열띤 토론을 나누느라 주변 손님들 및 777호점 직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것도 몰랐다.

*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일이야.'

유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헌터 디바이스를 보고 있었다.

게이트뉴스 말고 다른 인터넷 신문사에서 추측성 기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

[화제의 중앙 카페, 대규모 프렌차이즈 스윗박스 인수한다?]

전국 1500개 이상의 매장을 가진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 스윗박스가 중앙 카페에 인수당한다는 것이 항간의 소식이다.

양사가 정확히 밝힌 사항은 없으나 스윗박스의 국내 지점뿐 아니라 해외 지점까지 포함하면 올해 최대 규모의 인수전이 벌어질 것으로 추측되며···

···한편, 중앙 카페의 대표인 이유안 사장은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강남 던전 근처에서 최초로 카페를 시작하여···

-

인수하긴 할 거다.

그런데 당장은 아니었다.

성여진 대표를 완벽하게 설득하지도 못했는데··· 이런 기사가 나기에는 일렀다.

유안은 여진이 먼저 연락하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빨리 해명하지 않으면 성여진은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릴 수도 있다.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다.

'얼른 기사 내리겠다고 하면서 살살 달래고··· 은근히 인수 얘기까지 꺼내면 되겠다.'

홍소라와 방재이가 스윗박스 지점 곳곳을 다니며 솔루션을 제시한지도 몇 주가 지났다.

그들이 다녀간 지점마다 혼란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온다고 해서 스윗박스 직원들은 암암리에 소라와 재이를 메시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를 열심히 팔았더니 축복이 내린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유안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러니 인수 기사가 나기 전까지 성여진 대표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승산이 있다.

유안은 가볍게 입을 풀고 여진의 번호를 누르려 했다.

지이잉-.

그러나 다른 곳에서 먼저 전화가 와 그럴 수가 없었다.

발신인은 새로 길드장, 차건오였다.

"예, 건오 씨."

-사장님, 심해 길드 공략 보상으로 특이한 게 나왔어요.

"특이한··· 거요?"

-네, 이거··· 직접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비조 길드장도 데려갈게요!"

언제나 그랬듯 바쁜 일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유안은 여진에게 연락하는 것을 잠시 미루고 미술관으로 달려갔다.

기업 인수에는 사람 목숨까지 달리지 않았지만, 지금 터진 일은 아니었다.

이유안의 심장이 흥분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흑등상어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기청해는 팔자 좋게 윤슬과 함께 자고 있었다.

유안은 일단 윤슬을 이불에 돌돌 말아 침대 반대쪽으로 굴리고, 외따로 혼자가 된 기청해를 발로 꾹꾹 밟았다.

"일어나십시오."

"으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얼른 일어나."

이 인간 왜 이렇게 나태해졌지?

분명 처음에는 며칠씩 잠도 안 자면서 일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 모습을 보면 그때의 기청해는 환영이었던 것만 같다.

"오 분만······."

"오 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진짜 빨리 일어나요."

윤슬이 깨울 때보다 더 했다.

짜증이 난 유안은 기청해를 툭툭 차서 침대 밑으로 떨어트렸다.

쿵!

바닥에 제대로 부딪힌 청해가 스르르 눈을 뜬다.

"과격해···."

"이런 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제주로 가야 하니까 얼른 준비하고 나오시죠. 1층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유안 사장이 기어이 내 길드를 훔치려고······."

"예, 예. 비조 길드 털러 가는 거니까 기청해 씨의 많은 협조가 필요하긴 합니다."

그쪽은 들를 생각도 않았는데 굳이 언급해준다면 방문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제주까지 가는 김에 비조 길드 인테리어를 다시 살피고 와도 괜찮겠다.

유안은 비척비척 욕실로 들어가는 기청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러니 길드 다 털리고 아이템도 다 털리지.'

국내 3위 길드장이 저렇게 허술해서야.

어쨌든 이유안과 중앙 카페에는 좋은 일이었다.

'해민이도 데려가야지.'

유안은 강해민에게 연락해 본점 앞으로 오라고 했다.

어차피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 됐겠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해민이라면 충분히 마무리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귀신에 홀린 기청해가 씻는 동안 유안은 잠시 미술관을 구경했다.

이런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이 마음은 급했지만, 일단 비행기 소유자 겸 조종사가 욕실에 들어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문화 생활이나 즐기자 싶었다.

'그동안 스윗박스 일 때문에 바빠서 제대로 못 봤는데··· 꽤 많이 꾸며놨네.'

미술관은 청해에게 온전히 맡겼는데, 준수한 실력의 미술 선생님답게 구석구석 잘도 채워놨다.

수채화나 유화뿐 아니라 던전 부산물을 활용한 조각이나 콜라주 작품도 있었다.

'언제 이걸 다 했대.'

김주현의 소개로 알게 된 미술 동호회 사람들의 작품도 곳곳에 보이기는 했으나 대부분 기청해의 작품이었다.

마냥 잠만 자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낮과 밤이 바뀌었다거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해."

어느새 다 씻은 기청해가 푸른 머리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내려왔다.

유안은 눈을 찡그리고 청해를 다시 올려보냈다.

"작품은 미술관에 있을 때 관리가 제일 수월합니다. 머리나 제대로 말리고 오시죠. 감기 걸리면 바로 내쫓을 겁니다."

윤슬이한테 옮기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유안에게 등을 떠밀린 청해는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린 뒤에야 미술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륙 준비 해두세요. 저는 해민이 좀 데려오겠습니다."

"단둘이 데이트하는 게 아니었어?"

"카페 근처에서 이륙하면 먼지 날리니까 좀 멀리 가시고요."

서로 제 할 말만 했지만 어쨌거나 대화가 됐다.

유안은 기청해를 보내고 본점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해민을 챙겼다.

"왜 불렀냐. 아침부터."

"내가 깨운 거야?"

"그건 아냐. 배달 지점 가 있었다."

역시 강해민.

일 중독자답게 새벽같이 깨어나 일하고 있던 모양이다.

유안은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해민의 어깨를 툭툭 치고 용건을 말했다.

"우리 제주도 갈 거야."

"···뭐?"

뜻밖의 단어를 들은 해민이 당황하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조 길드. 인테리어 하기로 했잖아. 오늘 가서 좀 보려고."

다른 목적이 더 크기는 했지만, 일단 강해민은 비각성자이니 안전한 비조 길드 건물에 넣어둘 생각이었다.

"아··· 그거 때문에."

순수한 제주 여행을 3초 정도 기대했던 해민이 약간 아쉬운 티를 내었다.

오랜 친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빠르게 읽어낸 유안이 후다닥 덧붙였다.

"일 다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제주도에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해. 같이 가자."

"······뭐, 그러든가."

좋아, 이걸로 강해민 구워삶기는 끝났다.

해민은 오늘도 완벽하게 인테리어 전문가 역할을 해줄 것이다.

*

비조 길드 건물과 [흑등고래의 요람] 던전 사이 거리는 꽤 됐다.

그래서 이유안은 일행을 데리고 비조 길드부터 방문했다.

기청해가 중앙 카페에 본격적으로 감금되고 나서 비조 길드는 일시 휴업 상태였다.

정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 위로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얼른 여십시오."

"이유안 사장은 내 길드 건물만 보고 날 만나는 거지."

"이게 왜 기청해 씨 건물입니까? 제 건데."

계약서도 작성했다.

단서가 여럿 붙었기에 아직 증여 계약이 완벽하게 발효되지는 않았지만, 곧 이유안의 소유가 될 것은 자명했다.

기청해가 작게 투덜거리며 인벤토리에서 열쇠를 꺼냈다.

철컥, 열쇠와 맞물려 돌아간 자물쇠는 제 역할을 다하고 스르르 사라졌다.

일회성 아이템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이지만 안쪽은 먼지 하나 없이 이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청해가 희귀 아이템을 이것저것 써서 청소 없이도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건물의 또다른 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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