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37)

특히 오픈 초창기에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중앙 카페가 늘 손님으로 북적이지만 메인 파티시에와 바리스타 한 명씩만 있어도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일반 머신이랑은 속도부터 달라.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서 그런지 고장도 안 나고.'

비각성자들이 가득한 스윗박스에 들어갈 것이었으니 마나 문제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김주현의 노련한 솜씨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배달 지점마다 주유소를 설치하며 익힌 스킬이라는데, 겉으로는 마나가 전혀 새어나가지 않게 하면서 연료통 내부에만 응축된 마나를 가두는 방식이다.

주기적으로 충전만 해주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주현 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음, 뭔데요?"

유안이 헌터 디바이스를 켜자 주현이 바짝 다가왔다.

화면에 떠오른 그림을 본 김주현이 시원하게 깔깔 웃기 시작했다.

"으학, 이거, 이 그림 사장님이 직접 그렸어요?"

"······예."

사실 기청해한테 부탁하려다가 자존심 상해서 관뒀다.

그래도 세 시간이나 투자해서 그린 그림인데 이렇게 즉시 비웃음 사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에 얕은 상처를 입은 유안이 입을 비죽대며 헌터 디바이스 화면을 껐다.

"어쨌든 어떤 디자인인지 알아 보시겠죠?"

"아하학, 그럼요, 그럼요!"

"···그럼 그대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큭, 큽··· 크흡, 알았어요. 근데 그 그림 보내주시면 안 돼요?"

"안 됩니다."

"한 번 보고 완벽하게 외우는 건 힘들잖아요. 보면서 만들어야 더 좋은 완성품이 나오죠!"

그건··· 그렇지.

유안은 주현의 속삭임에 넘어가 제 그림을 개인 메시지로 전송···.

"아···!"

하려다가 손을 삐끗해 단체 채팅방에 공유해버리고 말았다.

중앙 카페 본점, 강남점 직원들과 단골 손님까지 모조리 있는 채팅방이었다.

유안이 소리 없이 절규하는 사이 김주현은 웃다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그리하여 며칠 뒤, 스윗박스 777호점에는 커다란 상자가 여러 개 도착했다.

그리고 그것을 옮길 인력으로 기청해가 동원되었다.

"빨리빨리 하시죠."

유안은 외형 변경 아이템을 쓴 기청해의 등을 꾹꾹 밀었다.

"며칠만의 외출이 노동 현장일 줄은 몰랐어."

"그래서 싫습니까?"

"아니, 좋아······."

미술관에 갇혀 있다가 바깥 공기를 맞을 수 있는 기회이다 보니 노동 현장이라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유안은 묵묵히 일하는 기청해를 보다가 저쪽에서 꺄르르 놀고 있는 윤슬을 보았다.

청해를 째려보느라 굳어 있던 표정이 저절로 풀린다.

"귀여워!"

"볼 말랑말랑해!"

"어떡해,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

"웅!"

스윗박스 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윤슬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가 많이 생겨서 기쁜 모양이다.

'내가 혼자 스윗박스 다녀왔다고 하니까 한참 삐쳤었지.'

이유안은 물론이고 서정원, 홍소라, 방재이, 거기에 요리 선생님까지 스윗박스에 방문했는데 자신만 못 간 것을 많이 서러워했다.

그러다 드디어 오늘 기회가 생겨서 어린이도 데리고 왔다.

윤슬이 직원들에게 맛있는 걸 받아먹는 사이 커피머신과 주방 용품 세팅이 완료되었다.

"김주현 공방주는 정말 대단한 인재야. 그 그림을 보고 이런 역작을 탄생시키다니."

"집에서 쫒겨나고 싶죠?"

기청해의 시비에 으르릉대긴 했으나 유안도 동의하는 바였다.

커피머신의 전체적인 색감은 이중앙 컬러였고, 손잡이도 중앙이의 꼬리를 닮은 디자인이었다.

멀리서 봐도 중앙 카페 머신이라는 걸 알 수 있게 중앙이의 얼굴도 크게 달려 있다.

커피머신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주방 기계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주현이 서비스로 만들어준 티 스푼과 머그컵에는 대놓고 중앙이 발바닥 문양이 새겨졌다.

"노골적이야."

스윗박스 직원들이 일할 공간을 슥 둘러본 기청해가 감상평을 말했다.

이번만큼은 유안도 부정할 수 없었다.

'목적이 뭔지 빤히 보이긴 하지.'

그래도 다 상부상조하자고 이러는 것이다.

지금의 스윗박스는 중앙 카페의 손을 잡아야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우와···."

"헐, 대박!"

"귀엽다!"

그리고 스윗박스 777호점 직원들은 다행히 중앙이를 무척 좋아했다.

그냥 귀여운 거라면 물불 안 가리고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았다.

성여진 대표가 보았다면 한 마디 했을 테지만, 여진은 지금 이곳에 없으니 괜찮았다.

'777호점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다른 지점들 불만사항도 처리하느라 바쁘겠지.'

시기가 딱 좋았다.

유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777호점을 시작으로 스윗박스 전체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생각이었다.

'디자인은 제대로 확인 안 하고 효율 좋은 기계로 바꿔준다니까 냉큼 수락한 게 잘못이지, 뭐.'

성여진은 커피머신이나 주방 용품이 중앙 카페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우리 정식 오픈했을 때 생각나네요, 사장님."

서정원이 헌터 디바이스를 내밀었다.

게이트뉴스의 손수혜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는 스윗박스 777호점의 현 상황을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카페 바깥으로 쭉 이어진 대기열이 번화가 대로변을 점령하고 있었다.

줄이 너무 길어서 사진 한 장에 다 담지도 못했다.

'이렇게 되는 것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777호점의 생산성이 좋아지라고 투자한 것인데, 늘어난 생산성에 비례해 손님도 이만큼이나 많아질 줄은 몰랐다.

이래서는 새 기계를 들인 보람이 없을 만큼 바빠졌을 것이다.

"···원두가 바뀌어서 그럴 겁니다."

방재이가 사태의 원인을 간략하게 추측했다.

중앙 카페에서 쓰는 던전산 원두를 기계와 함께 제공했더니 커피 맛이 순식간에 좋아졌고, 그 맛은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져서 손님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레시피는 스윗박스에서 쓰던 것 그대로더라도, 에스프레소 원액이 달라진 것만으로 맛이 확 변합니다."

재이의 담담한 설명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원두가 달라졌으니 커피 맛이 업그레이드 되는 것까지는 예상했지만, 그게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줄은 몰랐다.

지이잉! 지잉, 지이이잉!

그리고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건 중앙 카페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유안은 묘하게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진동 소리에 헌터 디바이스를 꺼냈다.

[성여진 대표].

올 것이 왔다!

이유안은 앙칼진 목소리가 쏟아질 것을 예감하며 전화를 받았다.

-이유안 사장님, 제안할 게 있습니다.

필살기

그런데 여진은 의외로 침착했다.

헌터 디바이스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에서 흥분이나 노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체념?'

그래, 모든 걸 놓아버린 것처럼 잔잔한 말투였다.

"어떤 제안 말입니까?"

-만나서, 만나서··· 얘기합시다.

며칠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렇게 죽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유안은 환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힘 없는 성여진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일단 약속을 잡았다.

진 빠진 비각성자를 게이트 근처까지 오라가라 하기도 민망해서 장소는 스윗박스 본사로 결정했다.

"언제 보자고 하던가요, 사장님?"

"···되도록 빨리 보고 싶대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음."

서정원은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불길한 침음을 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 싸늘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유안은 요근래 성여진과 엮이며 본점 매니저의 색다른 성격을 옅보게 되었다.

정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거나 화나는 일이 있으면···.

'큰누나 같아져.'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사실이었다.

이유안의 큰누나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 더 다정한 표정을 짓는데, 서정원이 딱 그 꼴이었다.

모르는 사이 제자로 들어가 인수인계를 받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똑같았다!

"정원 씨, 별일 없을 겁니다. 중앙 카페에 나쁜 제안이면 당연히 제가 거부할 거고요. 스윗박스 비서진과 친분을 쌓아두기도 했으니 그리 불편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래도 서정원이 큰누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어떻게 대해야 좋은지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일단 애처롭고 절박하게 굴면 반 이상은 해결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으음."

서정원이 은근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작전이 잘 먹히고 있다는 증거다!

큰누나도 화가 풀릴 것 같으면 이렇게 시선을 피하곤 했다.

유안은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부야베스 한 접시를 꺼냈다.

지난번 배달 지점에서 만들어 먹었던 것으로, 아직 뜨끈뜨끈하다.

생선 살점이 하트 모양으로 떨어진 부분을 담아 두어서 보기에도 좋았다.

'좀 뜬금없긴 하지만··· 줄 게 이것밖에 없어.'

이유안은 생선 요리를 정원의 손에 꼭꼭 쥐어주었다.

"프, 픕···."

그 꼴이 웃겼는지 홍소라가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유안은 소라가 비웃거나 말거나 상관 없었다.

무시무시한 본점 매니저의 화를 풀고 스윗박스 본사에 멀쩡히 방문하려면 이렇게 얕은 수라도 써야 한다.

"사장님."

"예."

"다녀오세요. 대신."

"···예, 대신?"

"비조 길드장님이라도 데리고 가셨으면 좋겠네요."

미술관에서 은퇴 체험 중인 인간을 보디가드로 끌고 가라는 소리였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었다.

기청해에게 S급 헌터의 기운을 죽이고 변장 똑바로 하라고 윽박만 지르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데려가봤자 별 쓸모는 없을 텐데.'

스킬도 못 쓰고, 요양 중이니 힘도 크게 못 쓰는 상태인데 쓸모가 있나.

차라리 윤슬을 데려가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데려가세요, 사장님."

유안의 떨떠름한 표정을 읽은 서정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뭐··· 매니저가 시키면 해야지.'

지금까지 서정원의 말을 들어서 나쁜 일이 생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유안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

"졸면 죽습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지금 탄 차가 아무리 튼튼한 특수 차량이더라도 졸음 운전 끝에는 사고만 있을 뿐이다.

유안이 미술관 침실에 쳐들어갔을 때 기청해는 윤슬과 함께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늦잠을 자는 어른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기청해는 육아를 본격적으로 도맡은 이후 부쩍 잠이 많아졌다.

"그러게 일찍 좀 일어나지. 점심 다 되도록 자는 게 뭡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응······."

스윗박스 본사에 도착할 때까지 777호점 상황을 꾸준히 파악해야 해서 기청해를 운전석에 앉혔다.

그런데 영 불안했다.

"이거 마셔요."

하는 수 없이 건강 주스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그건 좀 그런데."

"잔말 말고. 이제 음료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거 다 압니다."

"···음료의 범주를 넘어선 것 같아."

기청해는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는 건강 주스를 피해서 고개를 뒤로 뺐다.

'윤슬이도 안 하는 반찬 투정을 하네.'

이유안은 건강 주스를 인벤토리에 다시 넣고 평범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꺼냈다.

이건 잘 받아 마신다.

"안전 운전."

"알았어."

그래도 잠이 깨긴 한 모양인지 안경알 너머의 눈이 전보다 또렷해졌다.

인식 방해 아이템을 덕지덕지 착용해서 평소와 다른 외관의 기청해는 평범한 중급 헌터로만 보였다.

마나를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아티팩트도 몸에 지니게 한 보람이 있었다.

"공방 일은 어디까지 진행됐어?"

"···그건 갑자기 왜 묻습니까."

얌전히 운전 잘 하던 기청해가 갑자기 만물 공방 일을 물었다.

류민희가 데려온 장인들 덕분에 제작 속도가 훨씬 빨라져서 공장 수준으로 물건을 찍어내고 있기는 한데.

"기청해 씨, 공방 일에도 관심 있어요?"

"그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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