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줬으면 좋겠다.
"케이크 드릴게요, 사장님."
그래도 때마침 서정원이 나타나서 짧은 소강 상태가 되었다.
테이블 위에 다양한 종류의 조각 케이크가 우르르 놓이자 성여진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유안은 소리 죽여 웃고 말았다.
"성여진 씨 다 드셔도 됩니다."
"···이 사장은 안 먹어요?"
"저는 배가 불러서 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양이 많은데."
여진이 애꿎은 자허토르테의 옆구리를 포크로 쿡쿡 찌르며 꿍얼거렸다.
그 행동 덕분에 유안은 드디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밥 같이 먹어줄 사람이 없어서 날카롭게 굴던 거구나!'
중앙 카페에서 단골 손님들을 위한 파티가 있던 날도 성여진만 따로 2층에 배치하기는 했다.
그때는 다른 손님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그리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 정도로 효과적일 줄은 몰랐다.
성여진은 상상 이상으로 혼밥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던 거다!
"제가 정말 배불러서요. 그래도 성여진 씨 옆에서 말동무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혼자 드시면 심심하죠?"
"···누굴 애로 봅니까.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저 갈까요?"
"······."
재밌다.
유안은 성여진을 놀리는 데에 큰 즐거움을 느껴버렸다.
중앙 카페 직원들이 자신을 자꾸 놀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
"예···? 아닙니다. 대표님은··· 대표님은 혼자 식사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제가 옆에 있으면 거슬린다며 내쫓기도 하셨고요."
"처음 한 번만 그랬죠?"
"···예?"
"한 번 내쫓긴 후에 다시 시도해본 적은 없냐는 말입니다. 없죠?"
"······대표님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성여진 대표는 배를 꽉꽉 채운 후 제 손으로 운전해 돌아갔고, 영업 종료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는 스윗박스의 비서진이 찾아왔다.
비서실장을 다시 만난 김에 유안은 성 대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유안이 겪은 성여진과 비서실장이 아는 대표님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식사 시간마다 짜증이 심해지지는 않았습니까?"
"원래 식사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귀찮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식사를 안 즐기기는, 무슨.
카페에 있는 케이크 거덜내고 갔구만.
아무래도 성여진은 비서실장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드느라 혼자 밥 먹기 싫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한 모양이다.
참 요령 없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대표님이 소리지르고 화내도 무시하고 점심 정도는 같이 먹어줘요.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이유안 사장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여태 몰랐던 실장님이 더 신기합니다."
"······."
요령이 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유안은 스윗박스 대표 조련법을 하나하나 전수하고, 끝으로 비서실장에게 [길냥이랑 친해지는 법] 링크를 공유해주었다.
"앞으로 중앙 카페 올 때는 대표님도 같이 데려오시고요. 본점은 늦게까지 안 하지만 강남점은 새벽 영업도 하고 술도 파니 회식 장소로도 괜찮을 겁니다."
"······."
성 대표와 함께하는 회식 자리를 상상한 비서실장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유안은 걱정 말라며 실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거기에도 아주 일 잘하는 매니저가 있습니다. 성여진 대표는 그쪽에 맡겨두면 편할 겁니다."
셀라 파이팅.
아니지, 셀라라면 여진 같은 성격을 오히려 좋아하며 반길 확률이 높았다.
냥줍해서 집냥이로 데리고 산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 번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성공할 겁니다."
"예···."
성여진 대표 이야기를 끝낸 비서실장이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움찔거렸다.
유안이 얌전히 기다리자 실장은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 이런 정보는 원래 드리면 안 되는 건데 말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기밀이 전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변화의 바람
"대표님께는 절대 말씀드리면 안 됩니다. 제가 이 내용을 발설했다는 걸 알면···."
"알겠습니다. 저 입 무거워요."
유안은 제 입술에 지퍼 채우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비서실장이 주변을 다시 살펴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손님들 반응이 엄청났습니다."
"스윗박스에 납품한 저희 측 음식 말씀이시죠?"
"예···."
반응이 좋으면 좋은 거 아닌가?
유안은 비서실장이 쩔쩔매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러자 실장은 답답함을 느꼈는지 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덧붙여 말했다.
"너무 폭발적인 게 문제입니다. 스윗박스 지점마다 들러서 중앙 카페 디저트가 남아있는지 확인만 하고 나가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SNS에서는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는 사람도 생겨났고··· 심지어 중앙 카페 디저트 잔여량을 파악해주는 모바일 어플까지 만들 거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습니다. ···기사에 실리는 건 어떻게든 막았지만요."
그 좋은 기사를 왜 막았지.
유안은 아쉬웠으나 스윗박스 입장에서는 곤란할 것을 이해는 했다.
바꾸어 생각하면 중앙 카페에서 스윗박스 음식을 팔았는데 손님들이 그것만 찾고 다른 메뉴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상황이니까.
'속 좀 태웠겠네.'
그래도 아직 납품 첫날이니 관련 현상에 대한 보고가 대표한테까지 올라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습니다. 이유안 사장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셨으면 싶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유안은 싱긋 웃으며 비서실장의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실장이 무얼 걱정하는지는 안다.
'중앙 카페와 스윗박스가 맺은 납품 계약, 그게 취소될까 봐 이러는 거겠지.'
그러나 성여진 대표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유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미리 귀띔해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이유안 사장님께서 저희 대표님과 직원들을 워낙 잘 챙겨주셔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보답을 드린 것뿐입니다."
비서실장이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성여진 대표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별로 못 들어본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다.
이유안은 인벤토리를 뒤적여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 건네었다.
"자허토르테 좋아하십니까? 살구잼 들어간 초코 케이크인데."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갑자기 왜 주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유안은 비서실장에게 케이크를 비롯해 단 것을 잔뜩 안겨주었다.
까칠한 고양이 모시고 사느라 고생 많은 집사에게 전하는 심심찮은 위로였다.
*
김스윗(가명), 21세, 스윗박스 777호점 2년차 직원.
최근 고민 하나가 생겼다.
[스윗아 오늘은 몇 개 들어왔어?]
[쿠키 꼭 먹어보고 싶다ㅜㅜ 꼭 하나만 빼놔 줘!! 부탁할게 너만 믿어!!]
[스윗 요즘 머하고 지내?ㅎㅎ 너 스윗박스에서 알바한댔지?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내 장례식 때나 연락할 것 같던 놈들이 갑자기 이러냐."
스윗박스에 중앙 카페 음식이 납품되자 친구의 형의 애인에 팔촌의 육촌 조카까지 연락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중앙 카페 디저트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도 가지각색 다양했다.
'100일 기념 이벤트 할 건데 케이크를 왜 나한테서 찾아! 집앞 파리바게X 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메시지를 읽지 않고 삭제해버린 김스윗은 오늘도 텅텅 비어버린 매장 쇼케이스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구할 수 있으면 벌써 구해줬지! 매장 직원들 맛 볼 것도 없는데 어떻게 물량을 빼 놓겠냐고.'
요며칠, 오픈하기가 무섭게 손님들이 메뚜기떼처럼 몰려와 중앙 카페 음식만 싹 털어가곤 했다.
어떤 날은 한 사람이 디저트를 독점하려고 해서 '1인 1메뉴 한정 판매'라는 이상한 제약을 걸어두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알바생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프로모션 이벤트 할 때보다 삼십 배는 바쁜 것 같아.'
중앙 카페 음식을 쟁취하지 못한 손님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대체품으로 스윗박스 음식을 잔뜩 구매했다.
덕분에 일손이 부족해서 파트타이머 몇 명을 급하게 고용하기도 했다.
그들이 빠릿빠릿하게 일을 해주지 않았으면 스윗박스 777호점은 몰려드는 손님을 견디지 못하고 진작 파업했을 것이다.
"퇴사 말린다."
입버릇처럼 그 말을 중얼거리자 김스윗 옆을 지나가던 매니저가 화들짝 놀랐다.
제자리에서 2m는 튀어오른 것 같다.
"스윗 님, 퇴사는 안 돼요! 요즘 같이 바쁠 때 스윗 님처럼 숙련된 인재가 얼마나 소중한데!"
"예에··· 알죠······. 본사에서 충원은 언제 해준대요?"
"아, 그게···. 다른 매장들도 난리더라고요. 우린 그래도 파트 몇 뽑아서 숨 쉴 구멍이라도 생겼지, 그마저도 어려운 매장들은 파트너들만 갈려나가나고 있나 봐요."
"···충원이, 안 된다는 건가요?"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스윗 님, 퇴사는 안 돼요! 절대!"
더 퇴사하고 싶게 만들어놓고 안 된다고 해 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김스윗은 오늘 집에 가서 사직서 양식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
"이, 이상하네···. 알바 지원자가 갑자기 늘어났어요···!"
홍소라가 프린트한 이력서 뭉치를 유안에게 건넸다.
이유안은 한 장씩 꼼꼼히 살펴보다가 특이점을 발견했다.
"다들 경력자네요?"
짧게는 6개월부터 길게는 3, 4년.
다른 카페 일하던 사람들이 중앙 카페로 몰려들고 있었다.
"어디 카페라도 하나 망했나 봅니다."
규모로 봐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망한 수준이긴 한데.
유안은 지원자들이 전에 일하던 카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어디서 일했기에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같이 비밀로 했지.
"어, 어차피 배달 지점에 보낼 인력 필요했으니까··· 좋네요···!"
홍소라는 면접 볼 사람이 많아서 좋다며 기뻐했다.
소라와 재이는 한 번 제자를 양성해보더니 재미를 붙였는지 눈에 불을 켜고 신입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배달 지점 주방도 공사가 거의 끝나간다고 했지.'
본점에 지하실을 만들어준 강해민은 전국을 돌며 주방 건물을 뚝딱뚝딱 세우는 중이었다.
인간 포크레인이 따로 없었다.
건물이 지어지는 속도만 본다면 조립식이라 해도 믿을 것이다.
"면접 일정 정리해서 제 디바이스로 공유해주세요, 소라 씨."
"네에···! 그, 그리고 오늘 손 기자님 방문하는 거 아시죠?"
"거의 다 도착했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저 먼저 사무실 올라가 있을 테니 올려보내 주세요."
"네···!"
게이트뉴스의 손수혜 기자는 중앙 카페와 스윗박스의 납품 계약을 기사로 다뤄보고 싶다며 유안에게 직접 연락해왔다.
스윗박스 측에서 아무리 기사를 막으려 해도, 중앙 카페에는 이미 든든한 기자 한 명이 단골 손님으로 있었다.
이래서 단골 유치가 중요하다.
"손수혜 씨, 오랜만입니다. 떡볶이 파티 하던 날에 마지막으로 오시고 그 후로는 바빠서 못 오셨죠."
"아, 맞아요~. 진! 짜! 오고 싶었는데 너무 바빴어요···. 그래서 오랜만에 왔으니까 뽕 뽑고 가려고요! 사장님도 뭐 드실래요? 오늘 제가 다 쏠게요!"
"여기 제 가겐데요."
"기분 내는 거죠, 기분~. 뭐가 좋아요? 유안 사장님은 역시 버터 핫 초콜릿?"
손수혜는 취재하러 온 기자답지 않게 품에서 헌터 디바이스부터 꺼냈다.
중앙 카페에서 제대로 플렉스를 즐기고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유안은 수혜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도록 서정원을 불러 본점 메뉴를 하나씩 다 가지고 오게 했다.
사무실 테이블 위를 알록달록한 디저트와 음료들이 채우자 손수혜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많이 드세요, 기자님."
정원의 단정한 눈웃음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다.
테이블 세팅 후 사무실을 나가는 서정원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눈에 담던 손수혜가 씰룩씰룩 입꼬리를 움직였다.
"카페 오래오래 해주세요."
"안 그래도 평생 해먹을 생각입니다."
"직원들 자르지 마시고요!"
"제 손으로 해고할 이유야 없죠."
더 좋은 일을 찾아서 떠나겠다면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이유안은 지금 있는 직원들이 계속 중앙 카페에서 일하고 싶도록 연봉과 복지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월급을 받은 방재이가 0 하나 더 붙은 것 같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먹으면서 인터뷰 진행할까요? 그렇게 막 무거운 인터뷰는 아니니까요~. 사진도 안 찍을 거고. 아, 그래도 음식 사진은 찍을래요! 헌터톡 프사 해야지."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화면 가득 들어오게 항공샷을 촬영한 손수혜가 만족했다.
기자라 그런지 음식 사진도 참 예술적으로 찍는다.
"저 처음에 납품 소식 듣고 깜짝 놀랐잖아요. 스윗박스에서 중앙 카페 인수하려는 줄 알고!"
"다들 많이 오해하긴 했습니다."
그리고 유안은 그 오해를 구태여 풀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들 실상을 알게 될 것이니 불필요한 해명이었다.
이유안은 중앙 카페가 이슈화 된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관심 좋지.'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정도는 견딜 만했다.
애초에 중앙 카페는 항상 SNS의 중심에 있었으니 스윗박스와 계약한 전과 후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음, 그럼 갑자기 납품 계약을 맺은 이유는 뭔가요? 아,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질문 패스하셔도 됩니다!"
"아뇨, 어려울 건 없고. 스윗박스 측에서 먼저 제안을 줬습니다. 어차피 중앙 카페도 배달 서비스를 시작으로 전국 유통망을 확보할 생각이었고··· 스윗박스는 전국 어디에나 지점이 있으니 납품하기 딱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