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37)

*

"아저씨, 빨리, 빨리! 한 번 더!"

"응··· 윤슬, 근데 아직 안 졸려?"

"무궁화 꽃 한 번만 더 하면 졸릴 거 같은데!"

"알았어···.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유안은 3층 복도 끝 벽에 팔을 대었다.

이대로 벽에 기대 잠들고만 싶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윽···! 윤슬, 규칙 그거 아니라니까."

"근데 이렇게 하면 더 재밌잖아!"

복도 끝에서부터 우다다 달려와 이유안에게 찰싹 매달린 윤슬이 해맑게 웃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어린이가 이 시간까지 안 자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기청해 몹쓸 인간···. 애를 낮에 왜 재워!'

이윤슬은 낮잠을 거하게 자버린 탓에 잠이 오지 않는다며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는 중이었다.

몸을 움직이게 해 힘을 빼 놓으면 잠들겠지 싶어서 놀아주고 있는데 어느덧 두 시간이 흘렀다.

지치지도 않는 어린이 체력이 무서웠다.

'이럴 거면 그냥 원흉한테 맡기고 올까.'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한 유안은 짧게 고민했다.

멀쩡해 보여도 환자이니 밤에는 편히 쉬게 해 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기청해의 잘못이 명백하니 어쩔 수 없다.

이유안은 여전히 기운 넘치는 이윤슬을 번쩍 들어서 미술관으로 향했다.

"우아! 우리 요리 선생님한테 가아?"

"응, 가서 선생님이랑 놀자."

"좋아!"

아이는 별생각 없이 기뻐하니 다행이었다.

유안은 침대에 누워 있는 기청해에게 윤슬을 선물했다.

"선생니임!"

"···응?"

기청해가 눈을 천천히 떴다.

정말 자다 깼는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오늘 윤슬이 좀 재우십시오. 저는 갑니다."

낮잠 재운 사람이 책임지고 밤잠도 재워야지.

유안은 윤슬이 기청해 배 위에서 뛰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본점으로 돌아갔다.

'이제 진짜 잘 수 있겠다.'

육아로부터 해방된 유안이 기쁜 마음으로 침실에 들어가려 했다.

그때, 3층 복도 창 바깥으로 낯선 차량이 보였다.

검은색이었다.

'저거···!'

잠이 확 달아난 유안은 계단을 와르르 내려가 차가 주차된 담벼락으로 뛰었다.

'누군지 보고 만다!'

전력질주는 정말 오랜만이라서 숨이 찼지만 쉴 틈이 없었다.

다행히 차가 도망치기 전에 붙잡았다.

터업.

이유안이 운전석 바로 위쪽에 손을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선팅이 짙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반짝-.

그 안에서 희미한 새벽달 빛을 받은 금속성 안경테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유안이 아는 사람 중 저런 안경을 쓰는 건···.

"성여진 대표님?"

이름을 부른 순간 부르릉 소리가 나며 시동이 걸렸다.

"대표님!"

꽁무니를 내빼기 시작한 차에 대고 소리쳤으나 멈추지 않았다.

검은색 특수차량은 어느새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멀어져버렸다.

"뭐야···. 왜 도망쳐?"

어안이 벙벙해진 유안의 목소리만 밤공기에 쓸쓸하게 스몄다.

술래잡기

담벼락 옆에 혼자 남은 유안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차가운 밤바람에 등 떠밀려 건물 안으로 돌아왔다.

"허어···."

불 꺼진 1층 홀에서 좀 전의 상황을 곱씹자 자꾸 헛숨만 나온다.

이유안은 헌터 디바이스를 꺼내 중앙 카페 헌터그램 계정과 이메일 계정을 차례로 확인했다.

스윗박스에서 따로 연락이 온 것은 없었다.

'그럼 진짜 왜 찾아왔어?'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다.

안경 너머로 보였던 성여진의 눈은 명확하게 당황을 담고 있었다.

스윗박스 대표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언가 훔치러 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황만 봐서는 뭐라도 훔쳤다고 생각하는 게 더 말이 될 지경이다.

그때, 문득 기청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성여진 대표가 의외로 소심한 성격일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왠지 가능성이 느껴졌다.

'그거 말고는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정말로 순수하게 중앙 카페에 놀러 오고 싶었는데 초대해주지 않아서 그런 걸까?

성여진 대표가 방문하지 못하게 돌려돌려 막아두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아쉬워하고 말 줄 알았는데.

'중앙 카페 음식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가.'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납품을 시작하고 나서는 성 대표가 몰래 찾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

스윗박스에서도 중앙 카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면 구태여 게이트 근처까지 바쁜 걸음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럼 오늘이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거겠네.'

당장 내일부터 납품이 시작된다.

께름칙하기는 하지만, 유안은 뜻밖의 방문을 조용히 덮어 넘기기로 했다.

*

"으음, 흠···. 으으음···!"

"소라 씨, 왜 그러십니까."

"사, 사장님··· 뭐 숨기는 거 있죠···!"

"제가 뭘 숨깁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유안이 그렇게 말했으나 홍소라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며 코를 킁킁거렸다.

"다, 담벼락 쪽··· 왜 자꾸 기웃거리세요···! 땅에 보물이라도 묻어 놓으셨나···?"

"아닙니다. 소라 씨도 이제 준비하셔야죠."

"흐으음···!"

끝까지 유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소라가 이내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드디어 스윗박스에 물건을 전해주러 가는 날이다.

소라와 재이가 지휘하는 주방 군단이 열심히 만든 1차 납품 음식들이 특수차량에 가득 실렸다.

트럭 세 대를 끌어야 하니 특수차량 대형 면허가 있는 주변인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안녕하세요~ 이 사장님!"

"민희 씨,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뭘요."

각종 탈것 자격증을 모두 갖춘 류민희가 오늘의 운전사 중 하나였다.

나머지 두 대는 각각 수창 길드의 조서혁, 비조 길드장이 몰아주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기청해에게 걸린 속박 스킬도 풀어주었다.

"조서혁 씨도 오랜만입니다. 재윤 씨는 종종 놀러 오셨는데."

"아, 걔 얘기는 하지도 마십쇼."

"······."

권재윤 얘기를 꺼내니 정색하는 것으로 보아 또 싸운 듯했다.

수창 길드의 두 사람이 투닥대는 일이야 흔하니 유안은 조용히 넘어갔다.

괜히 끼어봤자 S급 싸움에 E급 등만 터질 뿐이다.

"기청해 씨, 면허증 보여주시죠."

"세상에, 나만 못 믿는 거야?"

"평소 행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류민희, 조서혁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기청해의 면허만큼은 따로 확인 작업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유안이 청해의 손에서 거침없이 면허증을 빼앗았다.

면허증 사진은 유안도 익히 아는 기청해의 모습이었다.

인식 방해 아이템을 밥 먹듯 쓰는 인간이니 사진도 다를 거라 예상했건만 의외였다.

이유안은 면허증을 돌려주며 속닥거렸다.

"지금 이거 진짜 기청해 씨 얼굴이었습니까?"

당연히 이것도 아이템으로 꾸며낸 가짜일 거라 생각했는데.

유안은 반질반질한 얼굴을 죽죽 잡아당겨 보았다.

"아야, 아파···."

"가면 쓴 것도 아니네. 무슨 자신감으로 맨얼굴을 드러내고 다니셨습니까?"

"자신감 가질 만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베일에 싸인 비조 길드장 컨셉은 바다에 갖다 버렸죠, 아주."

"어차피 중앙 카페에 매인 몸이 되었잖아."

그건 그렇다.

유안은 청해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어쨌든 진짜 얼굴이란 말이지···.'

얼굴을 때려봤자 타격 없을 거란 생각에 건드리지도 않고 있었는데, 앞으로 유용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실었으면 출발합시다."

"네, 사장님."

일반 재료를 조금씩 섞어 만든 음식들이 트럭을 꽉꽉 채웠다.

서정원도 오늘 하루는 다른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스윗박스 본사에 함께 다녀올 예정이었다.

류민희가 모는 트럭에 홍소라, 방재이가 함께 타고, 조서혁의 차에는 서정원이 탔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기청해 옆자리는 유안이 선심 쓰듯 차지했다.

"운전 실력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편인데, 다들 날 선택하지 않다니 보는 눈이 없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유안은 대충 기청해 말에 맞장구쳤다.

길게 대화가 이어져봐야 피곤할 뿐이다.

그러나 기청해는 유안과의 스몰 토크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다시 입을 연다.

"어젯밤에 전해주고 간 선물은 잘 받았어. 덕분에 아직도 배가 얼얼한 것 같아."

"윤슬이 가벼운데 엄살은."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뛰더라고."

"재밌게 놀아주셨네요. 종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유안 사장도 스윗박스 대표와 오붓한 새벽 보냈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기청해에 유안은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만 바라보던 시선이 운전하는 청해의 옆 얼굴로 향한다.

"뭐야··· 다 보고 있었습니까. 미술관 창문에 문 달아놨어요?"

"그냥 찍어본 건데 맞혔어?"

"이 인간이 진짜."

홍소라보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기청해는 분명 유안이 하루 종일 무언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앞에서는 티를 내면 안 됐는데··· 이미 들켰으니 늦었다.

"그래서 그 새벽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한데. 그것도 단둘이."

"대화는 무슨. 얼굴도 제대로 못 봤습니다.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이상한 사람에게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잖아."

"납품 계약은 어쩔 수 없죠. 성여진 대표와 개인적으로 만날 일만 없으면 꽤 괜찮은 회사입니다. 스윗박스."

이름 그대로 달콤했다.

중앙 카페가 통째로 먹어치우면 더 달콤할 것이다.

유안은 본의 아니게 스윗박스 본사에 도착할 때까지 기청해와 대화를 끊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청해가 윤슬의 요리 실력을 칭찬하는 바람에 학부모 상담이 시작된 것이다.

이윤슬이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유안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

본사에 도착한 트럭 세 대를 반겨준 것은 성여진의 비서실장이었다.

원래는 이유안 사장을 대표실까지 바로 안내할 일정이었으나 약간의 차질이 생겼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경영진 회의가 잡혀 대표님께서 부재중이십니다."

비서실장은 성여진 대표를 대신해 사죄를 표했다.

묘한 표정으로 비서실장을 보던 유안은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벌렸다.

성여진 대표의 부재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눈앞에 있었다.

"손님··· 으로 왔던 분이시죠?"

"······예, 맞습니다."

이래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 건데, 대표가 먼저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은 유안의 뜨거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죄송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가 대표님께 납품 계약 내용을 충분히 전달 받았으니 크게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계약서 조율이 필요한 만남도 아니었고, 그냥 물건만 잘 전달해주면 되는 거니 성여진 대표가 없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다만 새벽에 왜 찾아왔냐고 물어볼 기회가 사라진다는 게 아쉽긴 했다.

"수량 확인하시면 됩니다."

트럭 문을 열고 손짓하자 비서진을 비롯한 스윗박스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물건을 꼼꼼하게 살폈다.

중앙 카페에 와서 성 대표를 욕하던 얼굴들이 불쑥 보일 때마다 유안은 속으로만 웃었다.

'어떤 대표가 그렇게 악덕인가 했더니 성여진이었어?'

일을 잘하는 것과 비례해서 재수도 없다는 평가를 받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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