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37)

요즘은 버는 만큼 쓰는 중이었다.

지금도 강해민을 시켜서 본점 지하에 공사를 시작한 참이다.

"공사 중에는 꼼짝없이 영업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비조 길드장님이 좋은 아이템을 갖고 계셔서 다행이에요."

서정원이 유안 앞에 생강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바로 아래에서 지하실 공사가 한창인데 카페까지는 소음이며 먼지가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잔 속의 찻물도 흔들림 없이 평온하다.

"정원 씨도 기청해 씨한테 이것저것 꼬투리 잡으면서 아이템 뺏으십시오. 훨씬 좋은 것도 많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소음 차단, 먼지 차단 아이템보다 더 값어치 높은 것들이 가득가득 들어있을 테다.

유안은 본점 직원들에게도 기청해를 벗겨먹으라고 종용했다.

"비조 길드장님이 저희한테는 그리 무르지 않아서요, 사장님."

"마, 맞아요···! 사장님한테만 잘해주지··· 우리한텐 얄짤 없어요···!"

"······항상 웃고 있지만 속을 모르겠는 분이긴 합니다."

평소 잘 지내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이유안은 중앙 카페 사람들이 털어놓는 불만에 그리 공감하지 못했다.

"차라리 윤슬이를 시키는 건 어떨까요?"

서정원이 좋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지금도 이윤슬은 미술관에 가서 기청해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윤슬이 인벤토리 괴도로 전직한다면···.

'홀랑 넘어가겠지.'

어린이가 귀여운 얼굴로 '주세요' 하는데 안 줄 수 있을까.

유안은 오늘부터 윤슬에게 기청해 인벤토리 터는 법 강의를 하기로 했다.

띠링!

메일함이 반짝였다.

발신인은 이번에도 스윗박스였다.

다행히 만나자는 얘기는 아니었고, 납품 일정을 정확하게 조정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소라 씨, 재이 씨. 새로 뽑은 직원들은 좀 어떻습니까?"

"그, 그게요···. 큰일났어요···!"

소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유안도 덩달아 긴장하며 찻잔을 꽉 쥐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빠, 빵을 저보다 잘 만들어요···. 저 자르지 마세요, 사장님······."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별일 아니었다.

유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소라 씨를 왜 자릅니까."

"···저도, 부탁드립니다."

"재이 씨도 안 잘라요."

직원들이 이상한 걱정을 한다는 것 말고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큰 주방만 있으면 바로 생산 들어갈 수 있겠군요."

"마, 맞아요···. 지금 주방에서 전부 일하기에는 너무 좁아요···!"

새로 뽑은 직원 수가 상당하다 보니 인원을 나눠서 불러야 할 정도였다.

재이 역시 소라의 말에 동의하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큰 주방이라···.'

이유안은 어디 더 공간 낼 곳이 있는지 고민했다.

'역시 방법은 하나뿐인가.'

본점, 강남점, 박물관과 미술관까지 포화 상태이다.

심지어 이니티움 길드 건물도 창고까지 빽빽히 차 있었다.

"해민이 지금 지하에 있다고 했죠?"

"뭐, 뭐 시키려고요···? 해민 씨 다크서클 더 심해졌어요···! 또 과로하면 안 되는데···!"

"간단한 거니까 괜찮습니다."

소라와 재이, 그리고 서정원까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유안을 보았다.

여태 강해민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런 시선을 받자 억울했다.

'난 진짜 쉬운 일만 줬는데!'

항상 네모 반듯한 건물만 요구했고, 그나마 어려운 건 지금 본점에 지하실을 뚫는 정도일 테다.

그마저도 기청해가 기부한 아이템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유안은 자신이 악덕 클라이언트가 아님을 자신할 수 있었다.

"잠깐 지하에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그럼 잠시, 잠시만요···!"

홍소라가 주방으로 달려갔다.

방재이도 바 테이블 너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돌아온 두 사람은 양손 가득 강해민을 위한 간식거리를 들고 있었다.

"···더 챙겨드리고 싶은데 강해민 씨가 비각성자셔서."

"휴, 휴대용 인벤토리 같은 거 있었으면 좋겠어요···. 탈부착 되는 거로···!"

중앙 카페 직원들이 다른 회사 사장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예, 다들 감사합니다. 해민이가 좋아하겠네요."

유안은 직원들이 챙겨준 간식을 인벤토리에 넣고 지하로 이동했다.

강해민을 바로 마주칠 수도 있으니 살풋 웃는 표정을 유지한 채였다.

*

던전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중앙 카페 사이에 단층 건물 하나가 뚝딱 지어졌다.

이유안은 깨끗한 하얀색 건물의 외벽을 만져보았다.

손에 묻어나는 것 하나 없이 깔끔하다.

역시 강해민.

"만족하냐?"

해민이 건강 주스 한 병을 비우고 물었다.

"그럼. 누가 지은 건데."

유안이 진심으로 그렇게 답하며 샐쭉 웃었다.

해민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드러난 옆 얼굴이 조금 붉다.

'하여튼 칭찬에 약하다니까. 저런 성격이면 어디 가서 엄한 일 떠맡을 수도 있으니까 평생 중앙 카페 일만 시켜야지.'

유안의 머릿속에서 강해민은 이미 종신형 일꾼이었다.

이유안은 내친 김에 해민을 붕 띄워주기 위해 오 분 정도 더 건물을 찬양했다.

마감은 어떻고 색상은 어떻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칭찬할 거리를 전부 털어내자 강해민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기 시작했다.

좋은 의미의 빨간불이었다.

"해민아, 이제 이런 단층 건물 정도는 하루만에 뚝딱 지을 수도 있겠다. 네 실력이면 충분할 것 같아."

"···뭐, 그건 그렇지. 내부 인테리어도 까다로운 건 아니었잖냐."

건물의 용도는 대형 주방이었다.

던전 부산물로 만든 가구를 넣는 것도 김주현이 도와주어서 금세 끝났다.

주현은 한 번 만들어 본 제품을 만들 때 기계 수준으로 손이 빨라지곤 했다.

'공장인 줄 알았어.'

유안이 부탁하기도 전에 주방용 가구를 여러 개 만들어 놓았다며 인벤토리에서 쑥쑥 꺼내었다.

'이 사장님, 처음에 만든 것보다 기능도 훠얼씬 좋아졌다구요!"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를 거친 가구들은 주현이 자랑할 만했다.

버튼 하나 눌렀는데 변신 로봇처럼 움직이는 싱크대를 봤을 때 유안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류민희와 어울려 놀더니 이상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래도 실용적이기는 하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대량 생산이었다.

유안은 최첨단 주방 기구가 들어간 건물에 새로 뽑은 직원들을 배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해민아, 배달 지점 인테리어도 끝나간다고 들었는데. 맞아?"

"···어, 끝나가긴 한다."

따끈하게 익은 뺨을 문지르던 해민이 본능적으로 불퉁하게 말했다.

그 뾰족한 반응에도 유안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툴툴거리는 건 평소의 강해민일 뿐이다.

"지하 공사도 같이 들어가서 많이 바빴을 텐데. 대단하다, 해민아. 정말 수고 많았어."

앞으로 더 수고하게 되겠지만.

이렇게 따뜻한 말이라도 건네야 개미처럼 일하는 해민에게는 소소한 위로가 될 것이다.

유안은 해민의 손을 꼭 붙잡으며 눈을 휘었다.

"왜, 왜··· 그러냐···."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뭐, 를···."

"본점에서 만든 음식을 매번 전국 각지의 창고로 옮기기는 엄청 번거롭잖아. 그치?"

"······."

"해민이 너도 사업하는 사람이니까 잘 알 거 아냐, 응?"

당장 매니저나 홀 직원을 더 구해서 지역마다 중앙 카페 분점을 내기는 어렵더라도, 원활한 배달 서비스를 위해 생산 라인을 각지에 유치시키면 두고두고 편할 것이다.

이유안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 슬슬 빠져나가려는 강해민의 손에 아예 깍지를 끼어버렸다.

비각성자와 E급 헌터 간 힘의 차이는 극명해서 해민은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원하는 게 뭔데······."

자포자기한 목소리의 해민이 유안의 요구사항을 물었다.

'다 넘어왔군.'

승리를 직감한 이유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배달 지점에도 단층으로 주방 건물 지으면 좋을 것 같아서."

"······."

"어때, 해민아? 좋은 생각이지."

"···알았, 으니까······. 손 놔라."

"응."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낸 유안은 깍지 낀 손을 살랑살랑 흔들다 놓아주었다.

강해민은 살짝 저릿한 손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내 팔자야···."

몇 개월 전과 다르게 유안이 자신을 자주 찾아주고, 연락도 항상 먼저 하는 건 좋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일을 끝없이 떠맡게 되어서··· 득이 더 큰지 실이 더 큰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확실한 건.

"고마워, 해민아. 진짜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일 다 끝나면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어."

이유안이 진심으로 전하는 마음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강해민은 심장께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품에서 업무 다이어리를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빽빽한 스케줄 사이에 빈 공간은 없었으나 어떻게든 여백을 찾아내 방금 유안이 시킨 일을 꾹꾹 눌러 적었다.

*

오후에는 오랜만에 수창 길드원들이 본점에 놀러 왔다.

그들은 요즘 새로 길드와 함께 심해 던전 공략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특히 길드장 진 선은 차건오와 사사건건 의견이 엇갈린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진짜 깐깐한 차가놈! 오늘도 공략대 포메이션 가지고 세 시간이나 트집 잡히다 왔다니까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안은 선의 옆에 앉아서 한풀이를 들어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다른 생각 중이었다.

'둘이 안 맞는다고 하지만 붙여놨을 때 제일 효과적인 건 사실인데.'

지나치게 허술한 진 선, 과하게 조심성 많은 차건오.

둘을 따로따로 두면 50씩의 효과를 내지만 합쳐두면 200 이상의 시너지가 났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기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호수 던전 답사 갔을 때도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아니, 사장님. 차 씨 진짜 우리 미정이보다 잔소리 더 심하다니까요?"

수창 길드의 부길드장 최미정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유안은 진 선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인들의 근황을 파악했다.

대충 고개만 끄덕여줘도 진 선은 혼자 화냈다가 웃었다가 반복하며 말을 쉬지 않았다.

쌓인 게 많긴 한가 보다.

"심해 던전 공략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나 봅니다."

"아, 차 씨만 없으면 완벽하죠. 걔가 우리 공대의 유일한 오점이랄까."

노련하기로 유명한 S급 헌터를 오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진 선밖에 없을 것이다.

"심해 호흡기는 어땠습니까?"

"일단 호수랑 강, 그리고 얕은 바다에서 썼을 때는 이상 없었어요."

기청해의 인벤토리에서 잠깐 빌린 [얼룩 상어의 기포]를 이용해 만든 호흡기는 심해 던전 공략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안타깝게도 공략대 중 물 저항 스킬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여러 개의 호흡기가 필요했다.

김주현 혼자서 만들었으면 절대 불가능할 양이었지만, 기청해가 도와주어서 금세 끝낼 수 있었다.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진 선의 헌터 디바이스가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수창 길드장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 받기 싫어."

누군지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았다.

유안은 곧 차건오에게 불려갈 진 선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로 잔소리 폭탄을 맞은 진 선이 헌터 디바이스에 대고 미국식 욕을 날렸다.

영상 통화가 아니었는데도 차건오는 '욕할 시간에 빨리 던전 앞으로 오세요'라고 말했다.

진 선의 평소 행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갈게, 갈게! 간다고요~. 던전에 꿀을 발라놨나···, 같은 던전 탐사를 몇 번이나 가자는 거야."

툴툴거리며 전화를 끊은 선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 가요, 사장님···.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공략 끝나고 또 오시면 되죠. 수창 길드장님이 좋아하는 감자탕 해 놓겠습니다."

"와! 역시 사장님밖에 없어요."

"내려갑시다. 건오 씨 기다리겠네요."

이유안과 진 선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호수 던전으로 불려간 것은 수창 길드장 하나뿐이었기에 길드원들은 여전히 2층에서 하하호호 놀고 있었다.

길드장이 일하러 가는데 그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으휴, 길드원 키워봐야 다 부질없다···."

선이 꿍얼대며 본점 담벼락 근처에 세워둔 특수차량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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