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자신의 입에도 음식을 넣으며 맛을 음미했다.
저번에도 서정원이 간단하게 떡볶이를 만든 적은 있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건 처음이다.
그때보다 여러 차원 업그레이드 된 맛에 유안도 만족했다.
평소 분식류를 즐겨 먹지는 않는데 이건 이상하게 자꾸 손이 갔다.
튀김도 마찬가지였다.
서정원은 오늘도 환상적인 화력으로 최적의 조건에서 해산물과 채소를 튀겨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수분기를 유지해 촉촉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못하는 요리가 없네.'
중앙 카페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정원은 수준급의 요리 실력을 자랑하긴 했다.
그런데 일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요리 솜씨가 쑥쑥 성장하는 게 유안의 눈에도 보였다.
서정원을 당장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내보내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사장님' 하며 1등 트로피를 손에 쥐여줄 것 같았다.
"그, 그 많던 게··· 줄어들긴 하네요···."
유안이 요리 경연 프로그램 상금이 얼만지 검색하는데 홍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냄비를 기웃거리던 소라가 이제 반밖에 안 남았다며 감탄했다.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물론 유안은 아직 그득그득한 냄비 안을 확인하고 소라와 다르게 고개를 슬슬 저었다.
손님이 계속 몰려들고 있으니 오늘 안에 다 나눠주기는 할 테지만, 오후 영업 시간 내내 떡볶이 파티는 계속될 것 같았다.
"떡볶이 퍼주느라 줄어든 매상은 기청해 씨 인벤토리에서 차감하겠습니다."
"흐음, 또 얼마나 가져갈 생각이야?"
"우리 가게 하루 매출 얼마나 되는지 아시죠?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합쳐서 아이템 서른 개는 받아야겠습니다."
"이러다간 빈털털이가 되겠어."
기청해는 꿍얼거리면서도 비교적 온순하게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넘겼다.
이번에는 재료뿐 아니라 장비도 몇 개 있어서 갖다 팔기만 해도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장사를 모조리 말아먹은 것의 수백 배에 달하는 이익이 찾아오자 유안은 환하게 웃었다.
*
"와! 아직 영업 안 끝났나 봐요. 다행이다."
"스케줄 조정 때문에 퇴근 늦어져서 심장 쫄렸는데 다행이에요."
"그쵸, 실장님?"
"그러게 말입니다."
중앙 카페 앞에 도착한 스윗박스 비서진은 아직 불이 들어와 있는 본점 건물을 보며 안심했다.
헌터그램에 명시된 영업 시간은 지났지만, 다행스럽게도 열려 있어서 헛걸음할 일은 없었다.
"얼른 들어가요!"
비서진이 비서실장을 질질 끌어당겼다.
실장은 끝까지 못 이기는 척 중앙 카페로 발을 디뎠다.
사실 정문 바깥까지 흘러나온 음식 냄새 때문에 위장이 요동을 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아-."
선두에 선 비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뒷마당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헌터그램에서 봤을 때 떡볶이 파티는 분명 카페 뒷마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어, 어··· 사장님···! 손님 오셨어요···!"
마침 주방으로 가려던 홍소라가 비서진을 발견하고 유안에게 외쳤다.
뒷마당은 이미 정리가 한창이었다.
그 많던 떡볶이를 어떻게든 다 해치우고 조리 기구들을 치우는 중이었다.
"아··· 이미 끝났나 보다."
"너무 늦게 왔나 봐요, 어떡해."
특히 많이 기대하던 비서 두 명이 울상을 지었다.
그들의 대화로 상황을 파악한 이유안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은 거 하나 있을 텐데.'
윤슬이 들고 달려오다가 엎을 뻔한 것.
일반적인 크기의 냄비에 소담히 담긴 궁중 떡볶이가 떠올랐다.
그것을 끓인다면 지금 온 손님들의 배 정도는 든든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여기까지 와 줬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손님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유안은 일단 뒷마당의 테이블 하나를 가리키며 비서진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음식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까 분명 서정원이 그 떡볶이 냄비를 통째로 인벤토리에 넣었었다.
유안이 정원을 바라보자 눈치 좋은 본점 매니저가 곧장 인벤토리에서 냄비를 꺼냈다.
"금방 익혀 올게요, 사장님."
"오늘의 마지막 손님들께 대접할 거니까 더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서정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와, 엄청 친절해요!"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대표님이 여기 사장님 좀 닮았으면 좋겠다고."
"진짜, 진짜! 완전 공감해요."
"아··· 갑자기 퇴사하고 여기로 재취업하고 싶어요."
뒷마당이 한적했기에 비서진이 속닥거리는 소리는 유안의 귀에도 잘 들렸다.
'회사에서 단체 회식 온 건가? 저 회사 대표가 어지간한 악덕 상사인가 보네.'
직원들이 밖에 나와서 상사 욕만 왕창 할 정도라면 안 봐도 뻔하다.
유안은 문득 스윗박스의 성여진 대표를 떠올렸다.
'성 대표도 보통 까칠한 게 아니니까 직원들이 고생깨나 하겠지.'
저 손님들의 대표와 성 대표 중 누가 더 나쁜 상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안은 은근한 동병상련을 느꼈다.
'진짜 잘해줘야겠다.'
어차피 마지막 손님이니 오늘 다 팔지 못한 음식을 모조리 대접해주기로 했다.
손님들이 떡볶이 때문에 배가 차서 디저트를 주문하지 않아 평소보다 남는 게 많았다.
유안은 1층 홀의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디저트류를 남김 없이 트롤리에 옮겨 담았다.
"사, 사장님··· 저 손님들이랑 아는 사이에요···?"
"아뇨. 오늘 처음 봅니다."
"어어··· 이렇게 퍼주다간 거덜나요···!"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기청해에게 아이템을 넉넉하게 받아서 씀씀이가 커진 상태였다.
유안은 놀란 토끼 눈이 된 홍소라를 뒤로 하고 디저트 트롤리를 뒷마당으로 밀었다.
3단 트롤리 가득 채워진 디저트의 향연에 스윗박스 비서진의 눈이 돌아갔다.
"저희 이거 안 시켰는데요!"
"이렇게 많이는··· 아, 혹시 실장님이 주문하셨어요?!"
"아닙니다."
가끔 소리소문 없이 음식을 주문하곤 하는 비서실장을 의심해 봤지만, 정답이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손님들에게 유안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 권한으로 드리는 서비스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걸 받아도 되나 고민하던 비서진이 달콤한 디저트의 생김새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짜라는데···!'
맛있기로 소문난 중앙 카페 디저트가 종류별로 펼쳐지니 두 번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어느새 비서실장을 포함한 스윗박스 비서진은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포크를 손에 들고 있었다.
"떡볶이도 같이 드릴게요. 식사 아직이시면 떡볶이 먼저 먹고 디저트 드시는 걸 추천드려요."
때마침 잘 익은 궁중 떡볶이가 테이블 가운데에 세팅되었다.
나비처럼 살랑살랑 웃은 서정원이 깔끔하게 메뉴 설명을 하고 뒤로 빠졌다.
"와···."
중앙 카페의 극진한 대접에 스윗박스 비서진은 그간 성 대표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거 진짜, 진짜 맛있어요!"
"미쳤다···. 회사 앞에 있었으면 매일 먹었을 텐데."
"실장님, 실장님도 얼른 드셔 보세요!"
떡볶이를 한 입씩 맛본 비서진은 잠깐 정신을 잃을 정도의 황홀함을 느꼈다.
그리고 다 같이 비서실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흠, 괜찮은 맛입니다."
입에 채소와 떡을 함께 넣고 깔끔하게 삼킨 비서실장이 평가를 내렸다.
생각보다 담백한 반응에 비서진의 야유가 쏟아졌다.
"에이, 재미없게 그러지 말고 좀 더 격하게 반응해 주세요!"
"맞아요, 맞아~. 입에 떡 넣었을 때 살짝 웃으시는 거 다 봤다구요."
비서진이 실장의 접시 위로 앞다투어 음식을 담아주며 재잘거렸다.
비서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떡 몇 개를 더 우물거리고 최대한 열심히 맛을 칭찬했다.
"제가 평생 먹어 본 떡볶이 중에 가장 맛있습니다. 자주 먹어도 질리지 않겠네요."
여전히 싱거운 반응이기는 했지만 그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칭찬이라는 걸 알았다.
"음~, 노력하셨으니까 넘어가 드릴게요!"
"대신 다음에는 더 활기찬 리액션 연습해 오셔야 해요."
실장님 괴롭히기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비서진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 덕분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저녁 시간이었다.
*
"아아··· 너무 아쉬워요···."
홍소라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성여진 대표와 키보드 배틀을 뜨지 못해서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답장 안 오면 편하고 좋죠. 뭐가 그렇게 아쉽습니까."
"제대로 엿 먹이려고 이모티콘 잔뜩 만들어놨단 말이에요···!"
"소라 씨, 좀 더 건전한 취미를 가지십시오."
"그, 그러는 사장님은··· 정원 씨를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팔아넘기려 했으면서···!"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 디바이스 해킹했어요?"
"흐, 흥··· 헌터그램 카페 계정 검색 내역은 저한테도 다 뜨거든요···!"
그건 몰랐다.
유안은 자신이 여태 헌터그램으로 뭘 검색했었는지 떠올리며 팔을 슥슥 문질렀다.
어째 오한이···.
"절 팔아넘기려고 하셨어요, 사장님?"
저승사자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서정원이 무섭게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A급 헌터의 기백에 흠칫 놀란 E급이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오해입니다, 오해!"
"저는 중앙 카페 밖에서는 요리 안 할 거예요, 사장님."
"그럼요, 그래야죠. 저도 정원 씨가 평생 중앙 카페에서만 일해줬으면 합니다."
유안이 다급하게 정원을 달랬다.
쩔쩔매는 사장님의 모습을 본 매니저가 드디어 평소처럼 싱긋 웃었다.
"제 마음이랑 사장님 마음이 똑같다니 행복하네요. 우리 평생 같이 일해요, 사장님."
"서정원 씨가 싫다고 도망가기 전까지는 일 시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망가도 지구 끝까지 쫓아와주세요. 사장님한테 쫓기는 건 행복할 것 같은데."
"···취향이 왜 그러십니까."
"왜, 왜요···! 저도 사장님이랑 술래잡기는 해 보고 싶은데···. 제가 이길 수 있어요···!"
F급 헌터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에이, 정원 씨면 몰라도 소라 씨는 내가 이기지.'
E급 헌터 역시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중이었다.
"우리 다 같이 도망가도 윤슬이한테 순식간에 붙잡힐 걸요."
서정원이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자 소라와 유안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
스윗박스의 비서실장은 중앙 카페에서 회사로 다시 돌아왔다.
다른 비서들은 집에 돌려보냈지만 자신에게는 마지막으로 대표실을 점검할 의무가 남아 있었다.
'대표님은 외출 후 집에 바로 들어가신 건가.'
대표실이 어둑하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안쪽으로 들어간 비서실장은 책상 위에서 키 하나를 발견했다.
낮에 자신이 성여진 대표에게 넘긴 특수차량 키였다.
"이게 왜···."
이 키가 책상 위에 있다는 건 성 대표가 회사에 들렀다는 말이 된다.
비서진을 우르르 이끌고 중앙 카페에 방문한 사이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그런데 왜 카페에서 못 봤지?'
중앙 카페에는 다른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성 대표가 카페 말고 다른 곳을 방문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굳이 특수차량을 끌고 갈 이유는 없다.
비서실장은 본능적으로 찝찝한 기분을 느꼈다.
'기우겠지.'
그러나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덮어두고 대표실을 나서기로 했다.
이제 정말 퇴근할 시간이다.
비서실장이 대표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불이 켜지지 않아 캄캄한 복도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어둠에 잠긴 사람이 서늘하게 입을 연다.
"좋았어요?"
수상한 흔적
성여진 대표는 드디어 헌터그램 메시지 대신 메일로 연락을 주었다.
내용을 확인하니 성 대표가 직접 쓴 메일 같지는 않았다.
'이제 직접 찾아오는 건 포기했나 보네.'
답신을 보낸 유안은 만족했다.
막상 성여진이 중앙 카페에 오면 나름대로 잘 대응할 수 있지만, 유안이 아무렇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본점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그러니 성 대표는 카페에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납품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다행이야."
스윗박스 측에서는 유안이 최초 제안한 것보다 많은 지점에 중앙 카페 음식을 납품하길 원했다.
어차피 이번에 음식 대량 생산을 위한 직원들도 새로 뽑았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유안은 스윗박스에 납품을 시작하고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하며 배부른 사자의 표정을 지었다.
'돈 많이 벌어서 비조 길드 인테리어 할 때 써야지.'